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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2. 자전거
한은 고용인들과 작업반장들을 불러 모았다.
“돌성을 쌓을 것이오.”
한이 보여 주었던 2차 설계도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목책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목책으로 충분하다고 보오?”
침묵이 흘렀다.
당장은 평화롭지만 몬스터가 남하하는 범람기에는 정착지가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난 부표처럼 휩쓸려가 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엘프가 수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훈련을 위해 가끔 약한 몬스터를 흘려보내면, 미숙한 용병들이 출동에 혼선을 빚거나 해서 목책이 부서지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
영지민들이 목책 너머 작업을 하러 갈 때는 엘프들이 안전에 신경 써 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가능한 인력을 총동원한다 해도 돌성은 시일이 걸립니다. 게다가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돌성은 목책을 보강하는 수준이 아니라 넓은 성벽 위에 군사 배치도 가능한 요새이지 않습니까?”
기사들이 반론하자 한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여러분과 우리 영지민들의 토목 건축 기술이 늘어서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소.”
사람들은 ‘시멘트? 콘크리트?’ 하며 웅성거렸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는 로마 시대에도 쓰인 유서 깊은 건축 재료였다.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족이 번성했던 고대 마도 시대에는 시멘트와 비슷한 재료가 있을 법도 싶지만, 모호한 기록으로 남아서 알려지지 않았다.
한은 회의용 넓은 탁자 위에 사람 머리통 크기의 바위들과 나무통에 담은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꺼내 올려놓았다.
“움푹 파인 이것은 암돌이고 튀어나온 것은 숫돌이라 불리오. 이것을 이런 식으로 결합시켜 쌓으면 성이 매우 견고해지지. 여기에 콘크리트를 접착제로 쓸 것이오.”
한은 고구려의 돌성인 구루를 모델로 성채를 디자인했다.
구루를 쌓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들은 없으니 로마인들이 개발한 콘크리트를 끌어들였다.
바위는 충분했다. 성에서 조금만 달려 나가면 바위들은 넘쳐 나고 석회도 많았다.
한은 그것을 오는 길에 충분히 채취해서 적당한 크기로 굴곡지게 다듬어 놓았다.
“시멘트는 석회와 진흙을 섞어 태워 만들지. 콘크리트는 시멘트를 자갈과 모래, 물로 개어서 만드는 것이오. 이것을 바위를 쌓은 위에 발라 올리면 되오. 시멘트를 고운 모래와 물로 개면 몰탈이 되는데…….”
작업반장들에게 도구와 사용법을 숙지시킨 뒤 일감을 나눠 주었다.
그들은 한의 지휘로 사흘 동안 성벽을 쌓으며 감을 익혔다.
재능 있는 숙련자들이니 진도가 빨랐다.
―띠링! 작업반장 모크가 몰탈과 콘크리트 사용법을 익혔습니다.
모든 작업반장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니 내가 많이 돕겠소. 시멘트와 콘크리트 제조는 내가 할 테니 여러분은 성 쌓기에 집중하시오.”
공병대가 성터에 땅을 파자 한은 자원 채취 스킬로 바닥을 깊게 파낸 뒤 기반석을 깔았다. 거기에 한이 울퉁불퉁한 바위들과 콘크리트를 우르르 부어서 기초 공사를 했다.
이를 견학하는 작업반장들은 어디선가 ‘참 쉽죠?’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은 바위와 몰탈, 콘크리트, 도구를 군데군데 부려 놓았다.
콘크리트는 매일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그때그때 필요한 양만 비볐다.
돌 채취, 가공, 운반, 시멘트와 몰탈 콘크리트 제조를 일일이 사람 손으로 했다면 몇 년이 걸려도 힘든 작업이겠지만, 밑작업을 모두 한이 끝내 놓았으니 작업반장들의 감독하에 설계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므로, 자고 일어나면 성벽이 땅에서 죽순(竹筍) 자라듯이 쑥쑥 올라갔다.
성벽을 높이 쌓는데 필요한 공사용 사다리는 한이 설치해 주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영지민들은 한이 보이는 이 모든 능력에 그저 ‘우리 영주님은 재주가 많구나.’정도로 감탄하며 넘어갔다.
성문이나 성루 같은 까다로운 일은 한과 작업반장들이 직접 했다.
성벽을 쌓으면서 영지민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더불어 ‘우리 영지’, ‘우리 영주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늘었다.
“우리 자작령처럼 훌륭한 성이 있는 곳은 제국에서도 드물 걸?”
“우리 영주님이라면 성 몇 채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한을 믿지 못하고 언제든 여차하면 몸을 뺄 준비가 되어 있는 영지민들이었지만, 그간 일궈 놓은 영지가 아깝기 짝이 없었다.
벌써 푸성귀 종류는 식탁에 올랐고, 나머지 곡류와 과채류의 작황도 순조로웠다.
이만한 주거 환경에 이 정도의 만찬은 평생 가야 접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영주는 부역을 무리하게 시키지 않고, 귀한 약재를 아낌없이 쓰며 영지민들의 건강을 챙겨 주었다.
바보다 멍청이다 욕은 했지만, 내심으로는 이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자(聖者)가 금방 망해서 알거지 신세가 될까 싶어 안타까워했다.
고압적이지 않은 한을 욕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그가 지도력이 부족해서 여론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어느 틈엔가 인정했다.
언제 뿔뿔이 흩어질지 몰랐던 식구들을 영주는 더 가까이 묶어 주었다. 하루 종일 어른들처럼 노동에 시달리거나 시궁창에서 거지로 지내던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흑판 앞에서 글자를 익히게 만들었다. 그들을 질병과 기아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
‘이대로 한 자작님 밑에서 지내고 싶다.’
‘평생 이런 영지에서 살 수만 있다면…….’
돌성을 쌓으면서 영지민들은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영주라면 공지에서 버텨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싹이었다.
영지민들은 빠르게 반감을 버리고 감화되었다.
* * *
한은 꿈속에서 멍하니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인데 걷는 게 가능했다.
한참을 걷던 한은 문득 쉬고 싶어져 발을 멈추고 언덕에 주저앉았다.
말랑말랑한 언덕이었다.
‘말랑말랑?’
밑을 내려다보니 희뿌연 언덕 아래 희미한 빛이 보였다.
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가까이 갈수록 빛은 밝아졌다.
화톳불 아래 숨죽인 숯불 빛처럼 붉은 보석이었다.
한은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똑같이 생긴 언덕과 빛나는 반달형의 붉은 보석을 보고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눈!’
한은 거대한 한 쌍의 눈을 밟고 눈꺼풀 위에 서 있었다.
다행히 살짝 뜨인 눈의 주인은 잠들어 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한은 붉은눈의 거인을 깨울까 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꼼짝 못했다.
“허유…….”
날이 밝아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한은 긴장으로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오늘도 할 일이 많았다.
한은 세수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천막에서 나왔다. 망루에 배치된 용병이 깃발 신호로 ‘이상 무’를 알려 왔다. 행정청 공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향했다.
행정청은 넓은 부지를 이용해 단층으로 지어졌다. 바닥은 온돌을 깔았고 벽은 합금 골조를 짜고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시멘트 벽을 만든 뒤 내화 벽돌을 덧대었다. 주위가 사막이다 보니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는 한파가 밀려들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철근 콘크리트와 내화 벽돌은 공병대가 기술이 부족해서 쓰지 못했다. 한이 직접 작업반장들을 데리고 시공했다. 영지에 용광로를 설치해 찍어 낸 벽돌이라면 모를까, 한이 제조창에서 만든 내화 벽돌들은 건설 공사 경험치가 부족하면 ‘사용 불가’로 떠서, 만약 억지로 쌓는다 해도 일반 벽돌 정도의 효과밖에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성벽이 다 지어지면 공병대의 절반은 내화 벽돌과 철근 콘크리트 시공이 가능하다. 그들을 주택 공사에 투입하면 돼.’
초옥이나 목조 가구부터 시작해서 도시를 서서히 발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지역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진 설계가 된 건물을 지었다.
바닥 난방에 쓸 연료는 다행히 풍족했다. 한은 연료 창고에 둥근 봉 모양의 숯 혹은 석탄처럼 생긴 연료를 가득 쌓아 놓았다. 마계의 흙 크라바트를 가공한 연료 ‘C급 크라바트 탄’이었다.
저급한 마기를 품고 있는 크라바트는 마물과 마족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지만, 중간계의 생물들에겐 신경통과 불면증, 불쾌감, 복부 팽만감, 식욕 감퇴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몬스터를 흉포하게 만들었다. 동식물의 성장도 방해했다.
한은 검은 크라바트를 가공해서 해로움을 빼내고 천연 연료로 만들 수 있었다.
크라바트 탄은 아궁이에 넣고 태우면 숯처럼 달아올라 석탄보다 오래 강한 열을 뿜어냈다.
행정 청사가 넓어서 온돌이 3기로 나뉘었는데, 저녁에 장작 크기의 크라바트를 한두 개 때면 후끈한 열기가 하룻밤 내내 지속되고 아침까지 따뜻했다.
크라바트 채취는 두 랭커와 퀘스트를 하러 마왕의 하수인을 퇴치하러 갔을 때, 랭커들을 기다리며 잔뜩 해 두었다.
‘크라바트는 정화가 어렵고, 자연적으로 없애려면 3천도 이상의 고열로 태워야 한다. 그러나 넓게 퍼진 크라바트는 무르면서 가벼운 바위 조각이라 괭이로 깨서 긁어 모아 놓는 게 보통이지. 그걸 해결할 고위 성직자나 대마법사들이 흔하지는 않으니, 아직 많이 쌓여 있겠지.’
한은 수확기를 떠올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라바트는 가공이 까다로울 뿐 용도가 무궁무진했다.
크라바트 탄은 공해도 없고 태우면 부산물로 태운 흙이 약간 남는 청정 연료였다.
‘크라바트로 몰탈을 만들어 도로를 깔면 최고인데. 공사 경험이 일천하니 후일을 기약해야지.’
한이 직접 하지 않는 이유는 영지민들의 건설 스킬이 고레벨에 이르면 크라바트 몰탈과 같은 고급 자재들이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1반과 2반 영지민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농사를 지으러 가는 대신 반장들을 통해 하달한 한의 지시로 공터에 남았다.
“1반과 2반은 중앙광장으로 모이시오.”
영지민들이 웅성거리며 거주지 중앙의 너른 공터에 모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부르니 모두 2백호, 장정에 속하는 15살 이상의 남녀 352명에 어린이 105명이었다.
반별로 익숙하게 대열을 갖춰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자작이 통장들과 함께 그들의 앞에 나왔다.
“자작님께서 특별히 제작하신 물건을 나눠 주겠소. 우선 각 줄 별로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 하나씩 받아 가시오. 이 물건의 이름은 ‘씽씽이’요. 대중소 세 사이즈가 있고 손잡이 길이는 조절이 가능하니 자신의 체격에 맞는 것을 받으면 되오. 사용법은 일단 우리가 시범을 보인 뒤, 각 줄 별로 줄반장을 따라가 각자 연습하시오.”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영주님이 또 뭔가를 만드셨군.”
“이번엔 뭘까?”
“먹을 거면 좋겠어요.”
“예끼! 욘석아, 방금 먹은 배가 그새 꺼졌다더냐?”
“영주님은 맛난 걸 많이 나눠 주시니까요. 헤헤…….”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푼 영지민들은 별다른 혼잡함 없이 식사 배급 때처럼 줄을 서서 차례로 씽씽이를 받아 갔다.
한이 기생목과 몇 가지 금속을 크라바트와 혼합해서 만든 가벼우면서 튼튼한 킥보드였다. 모양은 킥보드라기보다는 초창기의 자전거와 비슷했다.
영지의 도로가 아직 완전히 고르지는 못하므로, 앞뒤 바퀴를 물동이 크기 정도로 키우고, 기생목 잎사귀로 만든 타이어 바퀴를 달았다.
바퀴는 소모품이지만 방법만 알면 아이들도 손쉽게 갈도록 만들었다.
운전대 아래에는 대나무 같은 길고 동그란 통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물통과 도시락통이었다.
발판은 안정감을 위해 바닥과 가까웠지만 울퉁불퉁한 지역을 지날 때를 고려해서 약간 띄웠다. 브레이크도 달렸다.
“앞으로 도로가 있는 지역을 이동할 때는 씽씽이를 타고 갈 것이오. 먼 곳의 농지에는 창고에 손수레와 농사 장비를 두었으니 최대한 이동 속도를 높여…….”
반장들이 씽씽이를 타고 속도를 확인시켜 주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영지민들은 그동안 멀리 떨어진 농지를 경작하기 위해 이삼 일씩 천막을 치고 농사를 짓다가 돌아오곤 했다. 야숙할 일이 줄었다.
공병대가 닦은 도로는 논밭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확물은 우마차로 실어 오고 엘프들이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집을 벗어나 노숙하는 생활이 달갑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되도록 우측 통행하시오. 씽씽이는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면 되오. 원래 도로 중앙은 우마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아직 통행량이 많지 않으니 씽씽이의 통행도 현재는 가능하오.”
간략한 도로교통법규를 알려 주고 공터에 법규가 빼곡히 적힌 표지판을 세웠으며, 제식 훈련을 하듯이 연습을 시켰다. 이쯤에서 반장들이 귀띔했다.
“저녁에는 반 대항전이 있소. 반별, 성인부, 청소년부, 어린이부로 나눠서 대회가 열리니 연습 열심히 하시오. 상품은 씽씽이를 탈 때 등짐을 편하게 질 수 있는 특제 배낭이라오. 익히 알겠지만 우리 자작님이 워낙 꼼꼼한 물건을 좋아하시지.”
“우와아!”
“내가 1등이다!”
“아니, 내가!”
시녀장 안나와 집사 케인도 은근히 경쟁심을 불태우며 조용히 하인 하녀들과 함께 킥보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은 한이 특별히 제작한 악기 거치대가 있는 킥보드를 타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은 킥보드에 열렬히 매달리는 영지민들의 반응을 확인한 뒤 병영으로 갔다. 용병 100명이 연무장에 모여, 군용으로 뽑은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날렵하고 가벼운 속도 위주의 킥보드를 연습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순조롭습니다.”
은빛으로 번쩍번쩍 광을 낸 판금갑옷을 걸쳐 입은 힌덴과 롤랑이 킥보드를 타고 발로 땅을 박차 미끄러지듯 다가와 절도 있게 브레이크를 잡고 내려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었다.
힌덴과 롤랑은 종자를 둘, 셋씩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밤낮으로 무구를 닦아서 광을 냈다. 겉치장을 위한 장식적 효과보다는 실용적 목적이 강했다. 내구도를 올리고 녹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갑옷 닦기가 중노동이라 경무장을 즐기는 힌덴은 종자를 둘, 중무장을 종종하는 롤랑은 셋을 거느렸다.
반 톤에 달하는 중무장의 무게를 견디며 동시에 가볍게 만들기 위해, 군용 씽씽이에 한이 가지고 있던 금속을 상당량 썼다.
“다시 봐도 놀랍습니다. 씽씽이는.”
“보병들의 행군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지겠습니다. 연락병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배우기도 쉽고 반으로 접으면 휴대하기에도 용이하고…….”
“유일한 단점이라면 적군에게 넘어갈 때 그들이 씽씽이의 유용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정도겠지요. 그러나 이 바퀴는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하니 바퀴 물량까지 탈취하지 않는 이상…….”
케이블 티비 광고 방송 쇼호스트의 영업 멘트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은 손을 내밀어 씽씽이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려 드는 두 기사를 말렸다.
“씽씽이는 영지민으로서 익힐 기본 장비입니다. 군사용으로는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있으니 두 분은 저를 따라 제 관저의 정원으로… 가벼운 차림으로 오시오.”
“군사용 말씀이십니까?”
씽씽이보다 더한 것을 보여 준다는 한의 말에 두 기사가 눈을 빛냈다.
“그렇소. 자전거라고 하오. 씽씽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이오. 다만 자전거를 타려면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오.”
자전거와 킥보드는 판타지 세계라는 설정인 「드래곤 쇼크」에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건 존재했다.
특별한 이벤트 아이템이었다.
드래곤 쇼크의 대주주 한 명이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였다. 그는 세계 제1의 산악 자전거 메이커를 합병할 정도로 산악 자전거에 대한 애정이 지대했다.
드래곤 쇼크의 대주주들은 각자 원하는 아이템을 한 가지씩 드래곤 쇼크 내에 구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가 택한 것이 자전거였다. 킥보드는 자전거의 사은품으로 딸려 왔다.
근현대적 물품이라 해도, 막상 자전거가 드래곤 쇼크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드래곤 쇼크에는 자전거보다 훨씬 유용하고 편리한 이동 수단들이 넘쳐 났다. 굳이 이동 속도가 느리고 힘들여 움직이면서 경로도 제한되는데다, 몇 안 되는 제작자를 찾아 사야 하며 자꾸 수리하고 타이어를 갈아 끼워야 하는 자전거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한은 자전거 제작 퀘스트 때문에 어마어마한 적자를 봐야 했다. 생산직 퀘스트가 대개 그러하듯이, 한이 원해서 받은 퀘스트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 호기심을 느끼고 자전거를 사들인 귀족가의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부상을 입어 추궁당하다 벌금을 무는 해프닝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히, 드래곤 쇼크에 자전거를 도입한 원흉인 대주주가 유저 메이커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대량 주문을 발주해 적자는 면했다.
그런 자전거라도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운송 혁명이었다.
한은 두 기사에게 신비감과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손가락을 입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최소한 두 분이 제대로 다루게 될 때까지는 군사 기밀이니 조용히 오시오. 최대한 가벼운 차림이어야 하오.”
기사들은 훈련을 교관들에게 맡기고 한을 따라나섰다.
한은 관저의 정원에서 연습용으로 평범한 자전거를 두 대 꺼내놓고 기다렸다. 군사를 통제할 기사들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정원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시켰다.
한은 사르릉사르릉 다가오는 두 기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오랬더니 사슬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한의 시선이 닿자 힌덴과 롤랑은 당당하게 항변했다.
“저희는 이게 가벼운 차림입니다.”
“경들이 처음 말 타기를 배울 때는…….”
“이 차림이었습니다.”
눈을 부라리며 주장하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목검을 장난감으로 쥐고 놀았고, 걷자마자 조랑말에 앉혀졌다. 그들이 말을 탈 무렵엔 사슬갑옷을 껴입고 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자전거 훈련을 하려면 넘어지지 않도록 내가 뒤에서 잡아 줘야 하오. 그런데 내 힘이 약하니 가볍게 입어 달라는 말이었소.”
두 기사의 덩치와 판금갑옷까지 더하면 무게가 실로 감당불가였다. 사슬 갑옷만 입는다 쳐도 자전거를 잡다 넘어질 때, 기사들이 다칠 일보다 한이 혹시 깔릴 일이 걱정이었다.
힌덴과 롤랑은 군말 없이 사슬갑옷을 벗었다. 두 기사는 단단한 가죽갑옷 차림으로 자전거 옆에 섰다.
“…….”
“속옷입니다.”
“…….”
카테르니아 대륙인들은 별다른 속옷을 입지 않았다. 멋쟁이 여성만 가슴에 띠를 두르거나 치마 아래 코르셋을 껴입는 정도였다.
한은 기필코 영지 내에 런닝셔츠와 트렁크를 보급시켜 불학무식한 기사들에게 속옷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심어 주겠노라 결심했다.
힌덴과 롤랑이 처음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는 평범한 자전거를 탔다. 병사들이 대회를 앞두고 킥보드를 연습하는 시간에, 고요한 뒤뜰에서 한이 뒤에서 잡아 밀어 주며 배웠다.
기사들이 몇 번 넘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균형 감각이 탁월한 기사들이 금세 요령을 익혔다. 일견 돈독해 보이면서 민망한 감이 있기도 한 군신(君臣)의 화기애애한 광경은 금방 끝이 났다.
한은 약간 실망하며 준비해 두었던 산악 자전거 두 대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두 기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한눈에 봐도 산악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와 포스부터 달랐다.
아직 의장용 마감을 하기 전이라 검게 밑칠만 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거칠면서 흉흉해 보이는 위엄을 풍겼다.
세월에 따라 개량을 거듭한 산악용 자전거는 가상현실 게임이 출시될 때쯤 더욱 현격한 개발이 이루어져서, 보조 장비와 연습만 충분하다면 기울기가 있는 암벽도 오르내릴 정도였다.
“연습용은 일반 자전거였소. 군용은 따로 준비했소. 산악 자전거라 하오. 평지뿐 아니라 산의 비탈길도 오르내릴 수 있지.”
한은 기사들을 감동시킬 회심의 장비를 선보였다.
“여기는 군용칼이 담긴 검집이오. 이렇게 비틀어서 빼면 되오. 그리고 이 부위를 누르면 맥가이버칼이 나오지. 이것들은 만들 장비가 없어서 일일이 수제로 가공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두 분의 것만 준비했소.”
기사들은 맥가이버칼에 달린 작은 손도끼와 병따개를 확인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악 자전거 훈련법이오.”
한은 롤랑과 힌덴에게 산악 자전거 훈련 교본을 만들어 주었다.
한이 드래곤 쇼크의 서점에서 사들인 훈련 교본의 원전은 베개만큼 두꺼웠으나, 한은 그걸 요약집으로 만들었다. 한의 서지 창고에 책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꺼내 쓰려면 일일이 필사를 거쳐야 했으므로 자연히 얇아졌다.
‘손이 아프긴 해도 아직 타자기를 도입하기엔 이르지.’
사나운 전마(戰馬)를 타고 한 몸처럼 거침없이 모는 힌덴과 롤랑은 산악 자전거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두 기사는 한동안 병사들의 훈련이나 한의 호위마저 등한시할 정도로 산악 자전거에 푹 빠져들었다.
힌덴과 롤랑은 한이 범접할 수 없는 험준하고 머나먼 산꼭대기로 올라가 며칠 죽치고 산 끝에, 한이 교본에서 생략했던 각종 익스트림 게임 기법을 창안해 내는 쾌거를 올렸다.
그들은 무한 질주의 꿈을 안고 하산했다. 그들의 야망을 가로막은 것은 한 자작이었다.
「도로 교통 법규」
“저희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기사입니다.”
“교통법 위반 시 벌점이 쌓이면 자전거 면허가 취소되오.”
힌덴과 롤랑은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며 한이 내민 두 권의 책자를 펼쳐 보았다.
한이 내민 책에 따르면, 자전거를 몰기 위해서는 영지에서 인정하는 자전거 면허가 필요했다. 일반 자전거는 2종, 산악 자전거는 1종 면허였다.
자전거 운전면허를 따려면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을 거쳐야 했다. 감독관은 한이었다.
필기시험은 두세 번 떨어진 기사들이었지만 실기는 단번에 붙었다.
기사들은 산악 자전거에 보조 안장을 달고 한을 태웠다. 성 내의 도로를 다니며 길목마다 대기 중인 병사들의 깃발 신호에 따라 착실하게 교통법을 준수하면서 도로 주행 시험을 마쳤다.
전마(戰馬)로 내달리는 기사들에게 산악 자전거 운전 시험은 꼭 필요했다. 최소한의 교통법규를 주입시키지 않으면 심각한 교통사고가 속출할 터였다.
‘어차피 지구에서도 자전거 사고는 자동차 사고와 동급으로 취급되니까.’
한은 필기시험에 떨어지며 보였던 기사들의 원망 어린 눈망울을 외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바쁜지라 앞으로 자전거 면허 시험 감독관은 케…….”
“처음엔 저희가 하고, 그 뒤엔 저희가 감독관을 뽑겠습니다.”
집사 케인에게 부탁하려는 한을 저지하고 힌덴과 롤랑이 강하게 요청했다.
‘운전면허를 어렵게 붙으면 다들 그만큼 신중하게 자전거를 타겠지.’
한은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힌덴과 롤랑은 즉시 병사들의 자전거 훈련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
용병들의 형편없는 자질로 미루어 훈련이 한참은 걸릴 거라 여겼는데, 롤랑의 스파르타식 특훈이 빛을 발해 기간을 단축시켰다.
1차 훈련을 마치고 자질이 엿보이는 자들을 선발해 산악 자전거병으로 뽑았다.
한은 병사용으로 약간의 무구 거치대가 있는 산악 자전거를 만들어 용병들에게 배우도록 지시했다.
기생목과 크라바트 합금 체인, 기생목잎―크라바트 타이어가 쓰인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만드느라 한이 가지고 있던 금속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힌덴과 롤랑의 것은 특별히 멋들어지게 장식되고 좀 더 튼튼하며 유선형으로 잘 빠진 장수급 산악 자전거였다. 일반 병사용 자전거는 검은색과 녹색, 황토색의 국방색 얼룩무늬였다. 힌덴과 롤랑의 자전거는 하얀 몸체에 금박과 은박으로 아낌없이 장식하고, 잘잘하지만 보석까지 박아 둔 뒤 강화 코팅 처리를 했다. 백마, 아니, 백자전거를 탄 기사들이었다.
한이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한은 감탄하며 읊조렸다.
“큐빅 스티커를 이열종대로 붙여 놓은 신형 핸드폰만큼이나 블링블링하군.”
기사용 자전거의 휠에 원형으로 16개씩 박아둔 것은 아낌없이 쓴 굵은 다이아였다.
브릴리언트 커팅이 개발되지 않은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의 가치는 잡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원석을 손에 넣기도 쉽지 않았으나, 헤더 남작에게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의뢰해 놨으니 도성에 가면 제법 많은 원석이 입수될 예정이었다.
한은 카르텐의 도성에서 출발 전, 며칠 동안 궁벽하고 외진 귀족가의 초청을 다니면서 광산을 찾았다. 그것을 헤더 남작에게 알려 사들이도록 했다.
12. 자전거
한은 고용인들과 작업반장들을 불러 모았다.
“돌성을 쌓을 것이오.”
한이 보여 주었던 2차 설계도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목책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목책으로 충분하다고 보오?”
침묵이 흘렀다.
당장은 평화롭지만 몬스터가 남하하는 범람기에는 정착지가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난 부표처럼 휩쓸려가 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엘프가 수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훈련을 위해 가끔 약한 몬스터를 흘려보내면, 미숙한 용병들이 출동에 혼선을 빚거나 해서 목책이 부서지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
영지민들이 목책 너머 작업을 하러 갈 때는 엘프들이 안전에 신경 써 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가능한 인력을 총동원한다 해도 돌성은 시일이 걸립니다. 게다가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돌성은 목책을 보강하는 수준이 아니라 넓은 성벽 위에 군사 배치도 가능한 요새이지 않습니까?”
기사들이 반론하자 한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여러분과 우리 영지민들의 토목 건축 기술이 늘어서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소.”
사람들은 ‘시멘트? 콘크리트?’ 하며 웅성거렸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는 로마 시대에도 쓰인 유서 깊은 건축 재료였다.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족이 번성했던 고대 마도 시대에는 시멘트와 비슷한 재료가 있을 법도 싶지만, 모호한 기록으로 남아서 알려지지 않았다.
한은 회의용 넓은 탁자 위에 사람 머리통 크기의 바위들과 나무통에 담은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꺼내 올려놓았다.
“움푹 파인 이것은 암돌이고 튀어나온 것은 숫돌이라 불리오. 이것을 이런 식으로 결합시켜 쌓으면 성이 매우 견고해지지. 여기에 콘크리트를 접착제로 쓸 것이오.”
한은 고구려의 돌성인 구루를 모델로 성채를 디자인했다.
구루를 쌓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들은 없으니 로마인들이 개발한 콘크리트를 끌어들였다.
바위는 충분했다. 성에서 조금만 달려 나가면 바위들은 넘쳐 나고 석회도 많았다.
한은 그것을 오는 길에 충분히 채취해서 적당한 크기로 굴곡지게 다듬어 놓았다.
“시멘트는 석회와 진흙을 섞어 태워 만들지. 콘크리트는 시멘트를 자갈과 모래, 물로 개어서 만드는 것이오. 이것을 바위를 쌓은 위에 발라 올리면 되오. 시멘트를 고운 모래와 물로 개면 몰탈이 되는데…….”
작업반장들에게 도구와 사용법을 숙지시킨 뒤 일감을 나눠 주었다.
그들은 한의 지휘로 사흘 동안 성벽을 쌓으며 감을 익혔다.
재능 있는 숙련자들이니 진도가 빨랐다.
―띠링! 작업반장 모크가 몰탈과 콘크리트 사용법을 익혔습니다.
모든 작업반장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니 내가 많이 돕겠소. 시멘트와 콘크리트 제조는 내가 할 테니 여러분은 성 쌓기에 집중하시오.”
공병대가 성터에 땅을 파자 한은 자원 채취 스킬로 바닥을 깊게 파낸 뒤 기반석을 깔았다. 거기에 한이 울퉁불퉁한 바위들과 콘크리트를 우르르 부어서 기초 공사를 했다.
이를 견학하는 작업반장들은 어디선가 ‘참 쉽죠?’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은 바위와 몰탈, 콘크리트, 도구를 군데군데 부려 놓았다.
콘크리트는 매일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그때그때 필요한 양만 비볐다.
돌 채취, 가공, 운반, 시멘트와 몰탈 콘크리트 제조를 일일이 사람 손으로 했다면 몇 년이 걸려도 힘든 작업이겠지만, 밑작업을 모두 한이 끝내 놓았으니 작업반장들의 감독하에 설계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므로, 자고 일어나면 성벽이 땅에서 죽순(竹筍) 자라듯이 쑥쑥 올라갔다.
성벽을 높이 쌓는데 필요한 공사용 사다리는 한이 설치해 주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영지민들은 한이 보이는 이 모든 능력에 그저 ‘우리 영주님은 재주가 많구나.’정도로 감탄하며 넘어갔다.
성문이나 성루 같은 까다로운 일은 한과 작업반장들이 직접 했다.
성벽을 쌓으면서 영지민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더불어 ‘우리 영지’, ‘우리 영주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늘었다.
“우리 자작령처럼 훌륭한 성이 있는 곳은 제국에서도 드물 걸?”
“우리 영주님이라면 성 몇 채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한을 믿지 못하고 언제든 여차하면 몸을 뺄 준비가 되어 있는 영지민들이었지만, 그간 일궈 놓은 영지가 아깝기 짝이 없었다.
벌써 푸성귀 종류는 식탁에 올랐고, 나머지 곡류와 과채류의 작황도 순조로웠다.
이만한 주거 환경에 이 정도의 만찬은 평생 가야 접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영주는 부역을 무리하게 시키지 않고, 귀한 약재를 아낌없이 쓰며 영지민들의 건강을 챙겨 주었다.
바보다 멍청이다 욕은 했지만, 내심으로는 이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자(聖者)가 금방 망해서 알거지 신세가 될까 싶어 안타까워했다.
고압적이지 않은 한을 욕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그가 지도력이 부족해서 여론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어느 틈엔가 인정했다.
언제 뿔뿔이 흩어질지 몰랐던 식구들을 영주는 더 가까이 묶어 주었다. 하루 종일 어른들처럼 노동에 시달리거나 시궁창에서 거지로 지내던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흑판 앞에서 글자를 익히게 만들었다. 그들을 질병과 기아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
‘이대로 한 자작님 밑에서 지내고 싶다.’
‘평생 이런 영지에서 살 수만 있다면…….’
돌성을 쌓으면서 영지민들은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영주라면 공지에서 버텨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싹이었다.
영지민들은 빠르게 반감을 버리고 감화되었다.
* * *
한은 꿈속에서 멍하니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어둠 속인데 걷는 게 가능했다.
한참을 걷던 한은 문득 쉬고 싶어져 발을 멈추고 언덕에 주저앉았다.
말랑말랑한 언덕이었다.
‘말랑말랑?’
밑을 내려다보니 희뿌연 언덕 아래 희미한 빛이 보였다.
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가까이 갈수록 빛은 밝아졌다.
화톳불 아래 숨죽인 숯불 빛처럼 붉은 보석이었다.
한은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똑같이 생긴 언덕과 빛나는 반달형의 붉은 보석을 보고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눈!’
한은 거대한 한 쌍의 눈을 밟고 눈꺼풀 위에 서 있었다.
다행히 살짝 뜨인 눈의 주인은 잠들어 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한은 붉은눈의 거인을 깨울까 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꼼짝 못했다.
“허유…….”
날이 밝아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한은 긴장으로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오늘도 할 일이 많았다.
한은 세수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천막에서 나왔다. 망루에 배치된 용병이 깃발 신호로 ‘이상 무’를 알려 왔다. 행정청 공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향했다.
행정청은 넓은 부지를 이용해 단층으로 지어졌다. 바닥은 온돌을 깔았고 벽은 합금 골조를 짜고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시멘트 벽을 만든 뒤 내화 벽돌을 덧대었다. 주위가 사막이다 보니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는 한파가 밀려들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철근 콘크리트와 내화 벽돌은 공병대가 기술이 부족해서 쓰지 못했다. 한이 직접 작업반장들을 데리고 시공했다. 영지에 용광로를 설치해 찍어 낸 벽돌이라면 모를까, 한이 제조창에서 만든 내화 벽돌들은 건설 공사 경험치가 부족하면 ‘사용 불가’로 떠서, 만약 억지로 쌓는다 해도 일반 벽돌 정도의 효과밖에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성벽이 다 지어지면 공병대의 절반은 내화 벽돌과 철근 콘크리트 시공이 가능하다. 그들을 주택 공사에 투입하면 돼.’
초옥이나 목조 가구부터 시작해서 도시를 서서히 발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지역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진 설계가 된 건물을 지었다.
바닥 난방에 쓸 연료는 다행히 풍족했다. 한은 연료 창고에 둥근 봉 모양의 숯 혹은 석탄처럼 생긴 연료를 가득 쌓아 놓았다. 마계의 흙 크라바트를 가공한 연료 ‘C급 크라바트 탄’이었다.
저급한 마기를 품고 있는 크라바트는 마물과 마족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지만, 중간계의 생물들에겐 신경통과 불면증, 불쾌감, 복부 팽만감, 식욕 감퇴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몬스터를 흉포하게 만들었다. 동식물의 성장도 방해했다.
한은 검은 크라바트를 가공해서 해로움을 빼내고 천연 연료로 만들 수 있었다.
크라바트 탄은 아궁이에 넣고 태우면 숯처럼 달아올라 석탄보다 오래 강한 열을 뿜어냈다.
행정 청사가 넓어서 온돌이 3기로 나뉘었는데, 저녁에 장작 크기의 크라바트를 한두 개 때면 후끈한 열기가 하룻밤 내내 지속되고 아침까지 따뜻했다.
크라바트 채취는 두 랭커와 퀘스트를 하러 마왕의 하수인을 퇴치하러 갔을 때, 랭커들을 기다리며 잔뜩 해 두었다.
‘크라바트는 정화가 어렵고, 자연적으로 없애려면 3천도 이상의 고열로 태워야 한다. 그러나 넓게 퍼진 크라바트는 무르면서 가벼운 바위 조각이라 괭이로 깨서 긁어 모아 놓는 게 보통이지. 그걸 해결할 고위 성직자나 대마법사들이 흔하지는 않으니, 아직 많이 쌓여 있겠지.’
한은 수확기를 떠올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라바트는 가공이 까다로울 뿐 용도가 무궁무진했다.
크라바트 탄은 공해도 없고 태우면 부산물로 태운 흙이 약간 남는 청정 연료였다.
‘크라바트로 몰탈을 만들어 도로를 깔면 최고인데. 공사 경험이 일천하니 후일을 기약해야지.’
한이 직접 하지 않는 이유는 영지민들의 건설 스킬이 고레벨에 이르면 크라바트 몰탈과 같은 고급 자재들이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1반과 2반 영지민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농사를 지으러 가는 대신 반장들을 통해 하달한 한의 지시로 공터에 남았다.
“1반과 2반은 중앙광장으로 모이시오.”
영지민들이 웅성거리며 거주지 중앙의 너른 공터에 모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부르니 모두 2백호, 장정에 속하는 15살 이상의 남녀 352명에 어린이 105명이었다.
반별로 익숙하게 대열을 갖춰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자작이 통장들과 함께 그들의 앞에 나왔다.
“자작님께서 특별히 제작하신 물건을 나눠 주겠소. 우선 각 줄 별로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 하나씩 받아 가시오. 이 물건의 이름은 ‘씽씽이’요. 대중소 세 사이즈가 있고 손잡이 길이는 조절이 가능하니 자신의 체격에 맞는 것을 받으면 되오. 사용법은 일단 우리가 시범을 보인 뒤, 각 줄 별로 줄반장을 따라가 각자 연습하시오.”
시끌벅적해졌다.
“우리 영주님이 또 뭔가를 만드셨군.”
“이번엔 뭘까?”
“먹을 거면 좋겠어요.”
“예끼! 욘석아, 방금 먹은 배가 그새 꺼졌다더냐?”
“영주님은 맛난 걸 많이 나눠 주시니까요. 헤헤…….”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푼 영지민들은 별다른 혼잡함 없이 식사 배급 때처럼 줄을 서서 차례로 씽씽이를 받아 갔다.
한이 기생목과 몇 가지 금속을 크라바트와 혼합해서 만든 가벼우면서 튼튼한 킥보드였다. 모양은 킥보드라기보다는 초창기의 자전거와 비슷했다.
영지의 도로가 아직 완전히 고르지는 못하므로, 앞뒤 바퀴를 물동이 크기 정도로 키우고, 기생목 잎사귀로 만든 타이어 바퀴를 달았다.
바퀴는 소모품이지만 방법만 알면 아이들도 손쉽게 갈도록 만들었다.
운전대 아래에는 대나무 같은 길고 동그란 통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물통과 도시락통이었다.
발판은 안정감을 위해 바닥과 가까웠지만 울퉁불퉁한 지역을 지날 때를 고려해서 약간 띄웠다. 브레이크도 달렸다.
“앞으로 도로가 있는 지역을 이동할 때는 씽씽이를 타고 갈 것이오. 먼 곳의 농지에는 창고에 손수레와 농사 장비를 두었으니 최대한 이동 속도를 높여…….”
반장들이 씽씽이를 타고 속도를 확인시켜 주자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영지민들은 그동안 멀리 떨어진 농지를 경작하기 위해 이삼 일씩 천막을 치고 농사를 짓다가 돌아오곤 했다. 야숙할 일이 줄었다.
공병대가 닦은 도로는 논밭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확물은 우마차로 실어 오고 엘프들이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집을 벗어나 노숙하는 생활이 달갑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되도록 우측 통행하시오. 씽씽이는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면 되오. 원래 도로 중앙은 우마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아직 통행량이 많지 않으니 씽씽이의 통행도 현재는 가능하오.”
간략한 도로교통법규를 알려 주고 공터에 법규가 빼곡히 적힌 표지판을 세웠으며, 제식 훈련을 하듯이 연습을 시켰다. 이쯤에서 반장들이 귀띔했다.
“저녁에는 반 대항전이 있소. 반별, 성인부, 청소년부, 어린이부로 나눠서 대회가 열리니 연습 열심히 하시오. 상품은 씽씽이를 탈 때 등짐을 편하게 질 수 있는 특제 배낭이라오. 익히 알겠지만 우리 자작님이 워낙 꼼꼼한 물건을 좋아하시지.”
“우와아!”
“내가 1등이다!”
“아니, 내가!”
시녀장 안나와 집사 케인도 은근히 경쟁심을 불태우며 조용히 하인 하녀들과 함께 킥보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은 한이 특별히 제작한 악기 거치대가 있는 킥보드를 타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은 킥보드에 열렬히 매달리는 영지민들의 반응을 확인한 뒤 병영으로 갔다. 용병 100명이 연무장에 모여, 군용으로 뽑은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날렵하고 가벼운 속도 위주의 킥보드를 연습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순조롭습니다.”
은빛으로 번쩍번쩍 광을 낸 판금갑옷을 걸쳐 입은 힌덴과 롤랑이 킥보드를 타고 발로 땅을 박차 미끄러지듯 다가와 절도 있게 브레이크를 잡고 내려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었다.
힌덴과 롤랑은 종자를 둘, 셋씩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밤낮으로 무구를 닦아서 광을 냈다. 겉치장을 위한 장식적 효과보다는 실용적 목적이 강했다. 내구도를 올리고 녹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갑옷 닦기가 중노동이라 경무장을 즐기는 힌덴은 종자를 둘, 중무장을 종종하는 롤랑은 셋을 거느렸다.
반 톤에 달하는 중무장의 무게를 견디며 동시에 가볍게 만들기 위해, 군용 씽씽이에 한이 가지고 있던 금속을 상당량 썼다.
“다시 봐도 놀랍습니다. 씽씽이는.”
“보병들의 행군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지겠습니다. 연락병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배우기도 쉽고 반으로 접으면 휴대하기에도 용이하고…….”
“유일한 단점이라면 적군에게 넘어갈 때 그들이 씽씽이의 유용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정도겠지요. 그러나 이 바퀴는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하니 바퀴 물량까지 탈취하지 않는 이상…….”
케이블 티비 광고 방송 쇼호스트의 영업 멘트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은 손을 내밀어 씽씽이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려 드는 두 기사를 말렸다.
“씽씽이는 영지민으로서 익힐 기본 장비입니다. 군사용으로는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있으니 두 분은 저를 따라 제 관저의 정원으로… 가벼운 차림으로 오시오.”
“군사용 말씀이십니까?”
씽씽이보다 더한 것을 보여 준다는 한의 말에 두 기사가 눈을 빛냈다.
“그렇소. 자전거라고 하오. 씽씽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이오. 다만 자전거를 타려면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오.”
자전거와 킥보드는 판타지 세계라는 설정인 「드래곤 쇼크」에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건 존재했다.
특별한 이벤트 아이템이었다.
드래곤 쇼크의 대주주 한 명이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였다. 그는 세계 제1의 산악 자전거 메이커를 합병할 정도로 산악 자전거에 대한 애정이 지대했다.
드래곤 쇼크의 대주주들은 각자 원하는 아이템을 한 가지씩 드래곤 쇼크 내에 구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가 택한 것이 자전거였다. 킥보드는 자전거의 사은품으로 딸려 왔다.
근현대적 물품이라 해도, 막상 자전거가 드래곤 쇼크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드래곤 쇼크에는 자전거보다 훨씬 유용하고 편리한 이동 수단들이 넘쳐 났다. 굳이 이동 속도가 느리고 힘들여 움직이면서 경로도 제한되는데다, 몇 안 되는 제작자를 찾아 사야 하며 자꾸 수리하고 타이어를 갈아 끼워야 하는 자전거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한은 자전거 제작 퀘스트 때문에 어마어마한 적자를 봐야 했다. 생산직 퀘스트가 대개 그러하듯이, 한이 원해서 받은 퀘스트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 호기심을 느끼고 자전거를 사들인 귀족가의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부상을 입어 추궁당하다 벌금을 무는 해프닝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히, 드래곤 쇼크에 자전거를 도입한 원흉인 대주주가 유저 메이커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대량 주문을 발주해 적자는 면했다.
그런 자전거라도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운송 혁명이었다.
한은 두 기사에게 신비감과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손가락을 입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최소한 두 분이 제대로 다루게 될 때까지는 군사 기밀이니 조용히 오시오. 최대한 가벼운 차림이어야 하오.”
기사들은 훈련을 교관들에게 맡기고 한을 따라나섰다.
한은 관저의 정원에서 연습용으로 평범한 자전거를 두 대 꺼내놓고 기다렸다. 군사를 통제할 기사들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정원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시켰다.
한은 사르릉사르릉 다가오는 두 기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오랬더니 사슬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한의 시선이 닿자 힌덴과 롤랑은 당당하게 항변했다.
“저희는 이게 가벼운 차림입니다.”
“경들이 처음 말 타기를 배울 때는…….”
“이 차림이었습니다.”
눈을 부라리며 주장하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목검을 장난감으로 쥐고 놀았고, 걷자마자 조랑말에 앉혀졌다. 그들이 말을 탈 무렵엔 사슬갑옷을 껴입고 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자전거 훈련을 하려면 넘어지지 않도록 내가 뒤에서 잡아 줘야 하오. 그런데 내 힘이 약하니 가볍게 입어 달라는 말이었소.”
두 기사의 덩치와 판금갑옷까지 더하면 무게가 실로 감당불가였다. 사슬 갑옷만 입는다 쳐도 자전거를 잡다 넘어질 때, 기사들이 다칠 일보다 한이 혹시 깔릴 일이 걱정이었다.
힌덴과 롤랑은 군말 없이 사슬갑옷을 벗었다. 두 기사는 단단한 가죽갑옷 차림으로 자전거 옆에 섰다.
“…….”
“속옷입니다.”
“…….”
카테르니아 대륙인들은 별다른 속옷을 입지 않았다. 멋쟁이 여성만 가슴에 띠를 두르거나 치마 아래 코르셋을 껴입는 정도였다.
한은 기필코 영지 내에 런닝셔츠와 트렁크를 보급시켜 불학무식한 기사들에게 속옷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심어 주겠노라 결심했다.
힌덴과 롤랑이 처음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는 평범한 자전거를 탔다. 병사들이 대회를 앞두고 킥보드를 연습하는 시간에, 고요한 뒤뜰에서 한이 뒤에서 잡아 밀어 주며 배웠다.
기사들이 몇 번 넘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균형 감각이 탁월한 기사들이 금세 요령을 익혔다. 일견 돈독해 보이면서 민망한 감이 있기도 한 군신(君臣)의 화기애애한 광경은 금방 끝이 났다.
한은 약간 실망하며 준비해 두었던 산악 자전거 두 대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두 기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한눈에 봐도 산악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와 포스부터 달랐다.
아직 의장용 마감을 하기 전이라 검게 밑칠만 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거칠면서 흉흉해 보이는 위엄을 풍겼다.
세월에 따라 개량을 거듭한 산악용 자전거는 가상현실 게임이 출시될 때쯤 더욱 현격한 개발이 이루어져서, 보조 장비와 연습만 충분하다면 기울기가 있는 암벽도 오르내릴 정도였다.
“연습용은 일반 자전거였소. 군용은 따로 준비했소. 산악 자전거라 하오. 평지뿐 아니라 산의 비탈길도 오르내릴 수 있지.”
한은 기사들을 감동시킬 회심의 장비를 선보였다.
“여기는 군용칼이 담긴 검집이오. 이렇게 비틀어서 빼면 되오. 그리고 이 부위를 누르면 맥가이버칼이 나오지. 이것들은 만들 장비가 없어서 일일이 수제로 가공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두 분의 것만 준비했소.”
기사들은 맥가이버칼에 달린 작은 손도끼와 병따개를 확인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악 자전거 훈련법이오.”
한은 롤랑과 힌덴에게 산악 자전거 훈련 교본을 만들어 주었다.
한이 드래곤 쇼크의 서점에서 사들인 훈련 교본의 원전은 베개만큼 두꺼웠으나, 한은 그걸 요약집으로 만들었다. 한의 서지 창고에 책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꺼내 쓰려면 일일이 필사를 거쳐야 했으므로 자연히 얇아졌다.
‘손이 아프긴 해도 아직 타자기를 도입하기엔 이르지.’
사나운 전마(戰馬)를 타고 한 몸처럼 거침없이 모는 힌덴과 롤랑은 산악 자전거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두 기사는 한동안 병사들의 훈련이나 한의 호위마저 등한시할 정도로 산악 자전거에 푹 빠져들었다.
힌덴과 롤랑은 한이 범접할 수 없는 험준하고 머나먼 산꼭대기로 올라가 며칠 죽치고 산 끝에, 한이 교본에서 생략했던 각종 익스트림 게임 기법을 창안해 내는 쾌거를 올렸다.
그들은 무한 질주의 꿈을 안고 하산했다. 그들의 야망을 가로막은 것은 한 자작이었다.
「도로 교통 법규」
“저희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기사입니다.”
“교통법 위반 시 벌점이 쌓이면 자전거 면허가 취소되오.”
힌덴과 롤랑은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며 한이 내민 두 권의 책자를 펼쳐 보았다.
한이 내민 책에 따르면, 자전거를 몰기 위해서는 영지에서 인정하는 자전거 면허가 필요했다. 일반 자전거는 2종, 산악 자전거는 1종 면허였다.
자전거 운전면허를 따려면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을 거쳐야 했다. 감독관은 한이었다.
필기시험은 두세 번 떨어진 기사들이었지만 실기는 단번에 붙었다.
기사들은 산악 자전거에 보조 안장을 달고 한을 태웠다. 성 내의 도로를 다니며 길목마다 대기 중인 병사들의 깃발 신호에 따라 착실하게 교통법을 준수하면서 도로 주행 시험을 마쳤다.
전마(戰馬)로 내달리는 기사들에게 산악 자전거 운전 시험은 꼭 필요했다. 최소한의 교통법규를 주입시키지 않으면 심각한 교통사고가 속출할 터였다.
‘어차피 지구에서도 자전거 사고는 자동차 사고와 동급으로 취급되니까.’
한은 필기시험에 떨어지며 보였던 기사들의 원망 어린 눈망울을 외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바쁜지라 앞으로 자전거 면허 시험 감독관은 케…….”
“처음엔 저희가 하고, 그 뒤엔 저희가 감독관을 뽑겠습니다.”
집사 케인에게 부탁하려는 한을 저지하고 힌덴과 롤랑이 강하게 요청했다.
‘운전면허를 어렵게 붙으면 다들 그만큼 신중하게 자전거를 타겠지.’
한은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힌덴과 롤랑은 즉시 병사들의 자전거 훈련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에 옮겼다.
용병들의 형편없는 자질로 미루어 훈련이 한참은 걸릴 거라 여겼는데, 롤랑의 스파르타식 특훈이 빛을 발해 기간을 단축시켰다.
1차 훈련을 마치고 자질이 엿보이는 자들을 선발해 산악 자전거병으로 뽑았다.
한은 병사용으로 약간의 무구 거치대가 있는 산악 자전거를 만들어 용병들에게 배우도록 지시했다.
기생목과 크라바트 합금 체인, 기생목잎―크라바트 타이어가 쓰인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만드느라 한이 가지고 있던 금속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힌덴과 롤랑의 것은 특별히 멋들어지게 장식되고 좀 더 튼튼하며 유선형으로 잘 빠진 장수급 산악 자전거였다. 일반 병사용 자전거는 검은색과 녹색, 황토색의 국방색 얼룩무늬였다. 힌덴과 롤랑의 자전거는 하얀 몸체에 금박과 은박으로 아낌없이 장식하고, 잘잘하지만 보석까지 박아 둔 뒤 강화 코팅 처리를 했다. 백마, 아니, 백자전거를 탄 기사들이었다.
한이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한은 감탄하며 읊조렸다.
“큐빅 스티커를 이열종대로 붙여 놓은 신형 핸드폰만큼이나 블링블링하군.”
기사용 자전거의 휠에 원형으로 16개씩 박아둔 것은 아낌없이 쓴 굵은 다이아였다.
브릴리언트 커팅이 개발되지 않은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의 가치는 잡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덕분에 원석을 손에 넣기도 쉽지 않았으나, 헤더 남작에게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의뢰해 놨으니 도성에 가면 제법 많은 원석이 입수될 예정이었다.
한은 카르텐의 도성에서 출발 전, 며칠 동안 궁벽하고 외진 귀족가의 초청을 다니면서 광산을 찾았다. 그것을 헤더 남작에게 알려 사들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