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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띠링!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엘프 부족 ‘은의 가지’ 부족장이 맹약을 청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저를 이렇게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역시 인간들이 숲의 일족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은 엘프들이 보낼 정찰병의 지휘자가 누가 될지 정확하게 짐작했다.
발끈하며 나선 일리얀이 그 일을 자청했다.
일리얀은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아예 옆에서 감시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날 한이 돌아와서 엘프 부족과의 맹약을 발표하자, 영지민들은 강맹한 엘프 전사들에 대한 두려움, 몬스터보다는 낫지 않나 하는 안도감, 호기심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맹약을 발표한 다음날부터 과연 성 주위에 멀리서 빠르게 지나가는 엘프들이 힐끗힐끗 보였다.
목책이 완성되었다.
왕의 병사들이 마법사들과 함께 떠난 뒤에는 엘프들이 이따금 나타나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족장은 일리얀과 정찰대에게 자작의 성 주위에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퇴치에 협력하고 자작령 안에서는 인간의 법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한이 용병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며 약하고 덜 위협적인 몬스터는 놔두라고 따로 요청할 정도였다.
엘프 전사들을 지휘해 순식간에 몬스터를 격퇴하는 일리얀의 모습은 거대한 숲과 세계수를 수호하는 부족장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었다.
‘이런 점은 역시 엘프답다.’
말만 요란하거나 턱없이 오만한 귀족 자제가 많은 인간과 달리 실속이 있었다.
한을 조사하기 위해 따라왔던 견습 마법사들은 별 소득 없이 떠났다. 그들은 자력으로 돌아갈 능력이 없었으므로, 왕의 병사들이 물러나는 시점이 안전하게 귀환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들은 이세계에서 온 한 자작이 별 볼일 없다고 축소해서 보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궁정 마법사 티요른이 주축이 되어 선동하긴 했지만, 한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쳐 제대로 조사를 못했다는 스승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티요른은 보고서에 한에 대한 험담을 최대한 부풀려 넣었다. 한이 의도적으로 마탑에 악의를 가지고 티요른을 푸대접하고 연구 조사를 방해했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감히 주제 모르고 설쳤겠다.’
티요른에게 한 자작은 몰락 귀족이나 망명 귀족보다 못한 끈 떨어진 귀족이었다. 한의 영지민들에 대한 배려는 순진무구하고 철없는 귀족 나으리의 위선이었다. 그는 한에게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을 느꼈던 귀족 자제들과의 악연을 마음껏 투사했다.
‘리드 백작가의 호테이 녀석도 그랬지. 처음에는 온갖 가증을 다 떨면서 혼자 착한 척하더니 결국 본성을 드러내더군.’
리드 백작가의 호테이는 티요른보다 1년 선배였다. 그는 티요른보다 앞서 나가는 진짜 천재 마법사였는데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귀족가 자제답게 교양 넘치고 잘생긴 외모에 성품까지 훌륭해서 모두의 추앙을 받았다. 평민으로 태어나 알콜 중독인 부모에게 폭행당하는 게 일상인 유년 시절을 보낸 티요른과는 천지 차이였다.
호테이는 직속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티요른을 감싸 주었고 동기들과 트러블이 일어날 때마다 중재해 주었는데, 반년이 지난 뒤부터 냉랭해졌다. 결국 호테이의 추종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 뒤 티요른의 인간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원인은 티요른의 모난 성격 탓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 변호를 위해 더욱 방어적이고 공격적으로 돌변해 시야가 편협해지게 마련인지라 원래 퍽퍽한 인성의 소유자였던 비뚤어진 어린아이 티요른은 속으로 호테이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궁정 마법사일지라도 공지로 보내질 만큼 말석에 속하는 티요른은 벌써 6서클을 거의 마스터 해간다는 잘나가는 백작가의 자제이자 천재 마법사인 호테이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귀족 출신에 재정 운영이 방만하고, 남들에게 귀족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자기 방어 따위는 조금도 몰라 보이는 순진한 한 자작은 마침 좋게 걸려든 먹잇감이었다.
티요른은 마법사들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지어내면서 덧붙였다. 티요른은 뒤탈 없을 만만한 타인을 음해하는 데에 노련했다. 진실 9할에 1할의 거짓을 섞이면 어떤 비방보다 더욱 강력한 독약이 되었다. 티요른은 스스로에 대해 아낌없이 면죄부를 베풀었다.
‘그런 형편없는 녀석은 그래도 싸! 오히려 이 정도로 너그러운 건 부족하지.’
티요른은 한을 누군가 나서서 단죄해야 마땅할 형편없는 인간으로 못 박았다.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는 자기 세뇌였다. 익숙한 자기 세뇌는 항상 잘 먹혀들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젖어 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편견 없는 학문의 탐구자의 자세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마법사로서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티요른을 거둔 마법사는 티요른이 30대가 되면 6서클을 넘고 어쩌면 7서클까지 바라볼지도 모른다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30대 후반인 이제야 궁중마법사로서 끌어 모은 재산을 쏟아부어 연구 재료를 마련해서 겨우 6서클을 힘겹게 넘겼다.
티요른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불운한 인간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속이 뱀처럼 차갑고 간교해서 믿을 수 없는 인간들만 넘쳐 났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컸던 자신이 가진 게 없고 모질게 커서 남들보다 크게 손해를 보고 뒤쳐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을 해치며 스스로 재능과 가능성을 닫고 점점 더 불행을 키워 나가는 줄은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그렇게 했다. 한때나마 그를 염려하던 스승이나 주위 사람들이 해 주는 충고를 번번이 왜곡해서 악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귀를 닫았다. 썩어 빠진 세상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기에 급급했다. 여태 티요른에게 애정과 신뢰를 경험할 기회가 다가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거부하고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것은 티요른 자신의 선택이었다.
* * *
―띠링! 밭 갈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지정한 구역의 밭 갈기가 5일 만에 완료되었다.
한은 지도를 살폈다. 경작을 한 구역이 한 자작령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한이 직접 자원 채취나 가공 등의 편법으로 땅을 간다면 빠르겠지만, 영지민들에게 맡긴 이유가 있었다.
한의 ‘영토’로 인정되려면 소유권을 인정받아야 했다. 빈 영토가 있다고 소유권이 바로 생기지는 않았다. 한의 게임 시스템이 자작령에 속한 농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이나 한에게 속한 영지민들이 직접 일일이 밭을 갈아야 했다.
길이나 거주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반 터 닦기 같은 작업은 전적으로 부역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밭에는 조밀하게 설계된 수로가 깔려 있었다.
한은 공병대에게 수로를 한강과 잇게 지시했다.
공병대는 돌아가며 모심기를 했다. 한이 짜놓은 모판에서 일정한 구획을 따라 곡물과 채소를 심었다.
밭에는 이랑을 만들었다. 찰진 흙으로 두둑을 쌓고 고랑을 팠다.
농법이 미약한 카테르니아의 농민들은 아직 밭이랑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지 못했다.
영지민들은 쓸데없이 일만 늘리는 영주에게 반감도 가졌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농사를 진행하자 치솟았던 불평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당장 푸른 잎사귀들이 벌판에 가득해지자 눈에 보이는 작물들에 안심이 되었다.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는 안정감 덕분이기도 했고, 영지 내 불안을 책동하던 아논 들이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에게는 진흙 경단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과수원을 조성하게 했다.
그들은 삼인일조로 다녔다. 한 명은 손수레를 끌고, 한 명은 모종삽으로 땅을 팠으며, 한 명은 진흙 경단을 구멍에 넣었다.
한이 지시한 대로 시야에 표시되는 화살표를 따라 진흙 경단을 넣고 흙을 가볍게 덮으면, 천천히 싹이 올라와 손바닥 반 정도 크기로 나무가 자랐다.
아이들은 신기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
과일 나무만 심은 것은 아니었다. 산과 언덕을 지게를 지고 오가며 삼림을 만들게 했다.
영지민들은 영주가 기생목으로 만들어 주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나무 지게가 얼마나 많은 짐을 편하게 들 수 있도록 만드는지 알고 놀랐다.
‘역시 길이 없는 지형에서는 지게가 최고야.’
산악이 많고 군사 안보를 위해 길을 좁고 불편하게 만든 조선시대에는 지게가 최고의 운송 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은 지게를 지고 줄줄이 산으로 향하는 영지민들과 더불어 늘어나는 영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1. 법령 공포
검은 하늘의 한 귀퉁이가 희뿌옇게 물들었다.
산봉우리에서 해가 채 비치기 전이었다.
음유시인 밀레드는 마른 풀을 엮어 만든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꼽을 뗐다.
잡초도 귀한 공지에서 손가락 한 마디 굵기의 마른 풀 침대는 영주인 한 자작에 버금가는 호사였다.
“하아암, 오늘도 새벽인가?”
음유시인 하미오는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연을 몇 차례나 하는 건지.”
“뿐인가? 왕후장상들 앞에 불려다니고, 여행을 할 때도 영주성에서 묵으며 오찬을 함께하던 내가 평민과 노예들 앞에서 매일매일 혹사당하다니, 친구들이 알면 다들 어이없어 할 걸?”
두 음유시인은 비슷한 처지였다.
귀족가에서 태어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컸다.
먹고 살 걱정 없이 귀족가에서 음악에 취미를 붙여 이름난 음유시인들을 초청해 사사받았다.
둘 다 재능이 뛰어난데다 체계적으로 훈련받았다.
귀족들의 취향과 체면 살리기에 도움이 되어 귀족 사회에서 인기 있는 음유시인으로 초빙되어 다녔다.
귀족가 자제답게 호신술도 배웠고 교양도 많이 쌓았다.
나름대로 여러 곳을 유랑 다녔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유람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이 한 자작의 여로에 일종의 로망을 품고, 은근히 궁정을 출입하는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온실 속의 화초 취급을 받는 것을 타파하고자 냉큼 따라왔다.
말리던 주위 사람들의 한탄대로 물정을 모르는 이들이라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신나고 알찬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지.”
우득우득 몸을 풀었다.
둘 다 체력에 자신 있어서 여정에 따라왔기 망정이었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행장을 차렸다.
얇고 통풍이 잘 되는 옷에 찬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한 망토, 따가운 햇볕을 가려 주는 챙 넓은 모자, 작은 하프, 그리고 북과 북채였다.
연일 혹사당하면서도 두 사람은 일을 그만두거나 줄여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국경을 지난 이후, 귀족으로서 제대로 된 대우는 받지 못했다.
영주는 성실하고 친절하게 그들을 우대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뛰어난 음유시인이라서였다.
한 자작은 매번 확실한 보상을 치르면서 그만큼 부려먹었다.
아쉬울 게 없는 음유시인들에게 보상은 재물이 아니었다.
“정말 신기해. 어떻게 하면 이런 쉽고 단순하면서도 경쾌하고 즐거운 곡이 나오는 거지?”
“자작은 자신이 지은 곡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유명한 곡을 몇 곡 베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채보나 독보 자체가 상당한 수준이야. 음계라던가 화음 같은 새로운 지식을 보면 우리보다 체계적이고 훨씬 앞서 나가고 있어.”
한은 그들에게 꿈도 꾼 적 없었던 다채로운 경험과 음악적 풍요로움을 선사했다.
카테르니아 대륙의 음악은 매우 단조로웠다.
귀족층이 즐기거나 신전에서 암송되는 장황한 서사시에는 장중하고 반복되는 운율을 붙였다.
평민들이 술집에서 불러 제끼는 고함에 가까운 음탕하거나 천박한 라임, 간단한 하프 연주와 풀피리, 군대의 고적, 조악한 북 정도가 고작이었다.
두 음유시인의 옆구리에 매달린 북은 한이 만들어 준 북이었다.
이 세계의 북과 달리 공명통이 있어서 탁하지 않고 맑으면서도 굉장한 울림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땅과 하늘을 울리는 북이었다.
“노동요라는 것까지 있다니, 자작의 세계는 완전히 일상에 음악이 뿌리 박혀 있는, 우리들 음유시인에게 있어서는 꿈속에서나 그리는 이상향이 아니겠어?”
그들은 처음 예상으로는 영웅을 따라 험난하고 거친 모험을 즐기며, 장렬하고 비극적인 최후로 나아가는 영웅 서사시를 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영주는 이들에게 모든 곡을 청해 듣고 음보를 요청하더니―이들은 카테르니아 문자와 음보를 익혔다―얼마 안 있어 새로운 악보와 가사를 쥐어 주었다.
이들이 배웠던 음보의 난잡한 표기와 달리, 다섯줄의 줄 위에 콩나물이 유려하게 그려진 악보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조화로웠다.
카테르니아는 유명 음악가마다 이론 체계가 다르고 경험에 의존하는 폭이 커서 다양한 표기가 난립했다. 한은 완성도 있게 맞아떨어지는 악보의 세계를 접하게 해 주었다.
한 자작의 도움을 받아 악보를 처음 연주해 보았을 때의 충격은 만만찮았다.
악보 읽기가 서툰 처음에는 한이 상기된 얼굴로 노래를 부르면, 듣고 따라 부르며 시작했다.
한 자작은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지만, 청음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못 부르지도 않았다.
그들은 강한 충격 속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한이 주문하는 용도별 리메이크 신곡들을 앞 다투어 내놓았다.
한의 악보는 대륙 사람들에겐 생소한 방식이라 이들의 조율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한 후로, 한의 요구에 따라 노동요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아침저녁으로 울려 퍼지는 절로 흥이 나는 신묘한 가락 덕분에, 영지민들은 어느새 일을 하면서 ‘옹헤야!’, ‘얼씨구, 좋다!’라는 추임새를 입 맞춰 넣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일할 때 노래를 듣거나, 심지어 후렴구라는 곡의 일부분을 따라 부르면 더 힘만 빠질 거라는 걱정과 달리, 오히려 노동요는 어째서 노동요라는 명칭을 받았는지 잘 알려 주었다.
물론 한이 알려 준 민요처럼 복잡한 바이브레이션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단촐해진 민요였지만, 실생활에 어울리는 민요의 의미에는 걸 맞는 리메이크 곡들이었다.
“나는 두렵기까지 할 정도네. 자작의 음악 세계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나는 기대되는 걸? 특히 요전번에 자작이 약속한 바 있잖은가?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프만이 귀족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악기라고 신봉하는 무리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하겠지? 으하하!”
두 사람은 기대감에 발을 빨리하며 새로 축조중인 저수지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한은 밭과 과수원에 모종이 다 심어지자 장정들에게 저수지 공사를 지시했다.
강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밭의 촘촘한 수로를 지나, 건너편에 하나의 호수로 모이는 구조였다.
저수지에 고인 물길은 또 달리 물길을 빼서 강으로 돌려보냈다.
밭과 저수지는 각각 격자창과 수문이 달려 있어서 물높이를 쉽게 통제했다.
“강이 바로 근처인데 뭐하려고 저수지까지 파는지 도통 모르겠군.”
저수지를 다 파내자 한은 바닥에 성물을 몇 가지 묻고 진흙 경단을 우수수 뿌렸다.
이번 씨앗은 엘프의 숲에서 채취해 온 늪과 호수와 강의 물풀들이었다.
진흙도 호수 밑바닥에서 퍼 올려서 조류가 듬뿍 함유되어 있었다.
성의 옆을 지나는 강물에는 세계수의 기운이 약간 서려 있었지만, 공지(空地)에서 제대로 수중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했다.
공지에 흐르는 강물에는 물풀이나 물고기가 거의 없었다.
저수지에 물을 채우고 물풀이 자랐다.
물풀과 조류가 서서히 번성하기를 기다려 며칠 지난 뒤부터, 한은 매일 엘프의 숲에서 떠온 물고기 알을 풀었다.
엘프의 숲은 워낙 풍요로워서 물고기가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한이 퍼가는 무지막지한 알에도 전혀 타격이 없었다.
알들은 거의 부화하지 못하고 일부 부화한 치어들의 영양 간식이 되었다.
부화한 치어들 중에서 살아남는 성어들은 저수지에 적응력이 뛰어날 것이다.
장정들이 저수지와 성 안의 길 닦기 공사에 여념이 없는 동안, 부녀와 아이들은 목초지를 조성했다.
그들은 매일 우마가 끄는 수레에 실려 너른 평지와 언덕에 3인1조 손수레 부대로 다니며 진흙 경단을 뿌렸다.
개간하지 않은 땅이었다.
초지가 자라 성숙해지면 목초지로서 한의 영토에 편입될 터였다.
한은 생존력 강한 잡목과 잡풀을 개량해서 목초에 가깝게 만들고, 일반 목초와 섞어 뿌리게 했다.
뱀이 기피하는 풀도 일부 섞여 있었다.
군데군데 바람막이용 관목과 묘목도 심게 했다.
한은 공지의 풀과 관목을 꾸준히 연구했다.
―띠링! 지정하신 지역에서 관목들의 씨를 받으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수확기 전입니다. 씨를 미리 받으면(최대 1/3) 수확기에 수확량이 잔여량의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예. 최대량으로.’
2대 연속은 못 받고 가을에 수확량도 줄지만, 한은 임금을 가불하는 근로자처럼 씨를 땡겨 받을 수 있었다.
한은 그렇게 받은 씨를 연구하고 개량해서 엘프의 축복을 받아 뿌렸다.
잡초와 잡목에 불과하지만, 영지의 토양에 뿌리내릴 다른 식물들을 지켜 주는 역할을 맡겼다.
‘볼품없어 보이는 풀과 앉은뱅이 나무들이 토질을 꾸준히 개선하고 있었으니까.’
강 주변도 마도 전쟁 직후에는 공지 전체와 똑같은 사막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세계수의 힘이 담긴데다 엘프의 숲에서 흘러나와 풍성한 조류가 포함된 강물이 흐르면서 주위 토질이 다른 곳보다 빠르게 개선되었다.
거기에 잡초와 관목이 자생하면서 사막화를 막았다.
다행히 바늘처럼 가느다란 잡초들은, 원래 선조의 모습은 넓은 잎이었는지 조금 개량을 하니 잔디처럼 넓어졌다. 식용으로는 무리지만 목초로는 쓸 수 있었다.
“얘들아, 점심 시간이다.”
영주가 집집마다 나눠 준 작은 탁자 넓이의 흑판에 백묵으로 낙서를 하던 데이지와 클라라가 어머니가 떠 놓은 물동이에 손을 씻었다.
“언니, 나 쉬야.”
데이지는 클라라를 요강으로 쓰는 나무통에 데려갔다.
분뇨 통에 모인 똥오줌은 부모가 매일 몇 번씩 공동 수거 통에 버렸다.
경사진 언덕을 깎아 만든 낮은 벼랑에 대어져 있는 분뇨 통들은 수레와 통으로 짜여 있었다.
분뇨 차였다.
매일 장정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분뇨 차 당번을 맡았다.
분뇨 차가 차면 하루 종일 대기하는 당번들이 이를 버리는 장소로 끌고 갔다.
성 밖에 영주가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에 오물을 버렸다.
이것은 오리발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시행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위생 관념이 형편없는 대륙인들이라지만, 똥오줌으로 가득한 분뇨 차를 끌고 퍼 나르는 일이 달갑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영주 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서서히 분뇨 차의 장점을 몸으로 체험했다.
집과 거리가 놀랄 만큼 깨끗해진 것이다.
그전에는 그냥 아침마다 분뇨 통의 내용물을 창밖에 내다 버렸다. 좀 신경 쓰는 사람들은 집에서 떨어진 근처 숲에 들어가서 버리며 살았다.
덕분에 거리와 집 앞은 똥오줌이 썩는 악취로 가득했다. 집과 옷과 사람에게도 악취가 배었다. 그게 일상이 되어서 잘 몰랐다.
온몸에 똥오줌을 묻히고 다니며 질척한 길바닥에서 똥오줌을 밟고 다니는 일이 없어졌다.
쾌적한 집과 거리를 경험해 본 이들은 매우 빠르게 분뇨 차 시스템에 적응했다.
“빨리 가자. 배고파.”
10살인 데이지는 7살인 클라라의 팔을 잡고 배식을 하는 광장으로 뛰었다.
아직 식사는 배급을 유지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시녀장 안나의 엄격한 지도를 사사받은 요리사들이 각각 반마다 나뉘어 치프로 투입되었다는 것이었다.
신임 치프들은 각 반에서 순번별로 돌아가며 여자들을 동원해 급식을 준비했다.
단순하지만 끝내 주게 맛있었던 요리들이 다시 불안정해졌지만, 그래도 안나처럼 엄격한 치프들의 감독 때문에 차차 나아졌다.
식사를 마치고 아직 모여 있는 영지민들에게 반장들이 영주의 명을 하달했다.
“한 자작령의 법을 공포한다. 크게 여섯 가지 종류의 법이며, 세부 사항은 언제든지 행정처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긴장해서 듣다가 이어지는 설명에 웅성거렸다.
한이 반포한 법은 쉽고 단순하면서 상시 열람이 가능했다.
한은 카테르니아 대륙의 관습법과 대륙 각국의 법전을 비교해서 현재 자작령의 상황에 적절한 민법 및 형법 위주로 법률을 제정했다.
고용인들과 귀족가에서 물 좀 먹었던 이들의 반대가 컸다.
“마치 들소의 고삐를 풀어 준 것처럼 평민들이 날뛰게 될 겁니다.”
“행정관의 일만 늘어나게 됩니다.”
한은 그들을 어렵게 설득했다.
“법전을 관리하는 것은 행정관뿐 아니라, 통반장들이 될 것이오.”
고용인들은 놀랐다.
“그렇게 많은 법률 책을 사 두셨습니까?”
한은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책은 모두 한이 직접 제작하고 인쇄했다. 아직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한이 이 사항을 치밀하게 계획했고 거금을 투자했다고 여기고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 영주님이 하는 일이니 일단 지켜보자.’
한의 신임도가 올랐기 때문에 영주의 강경한 의지가 통했다.
카테르니아 대륙의 위정자들은 피지배층이 법에 쉽게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피지배층을 옭아매려면 법이 어렵고 두려워야 지배하기 편했다.
귀족들에게 법이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단전횡하며 평민들에게 채우는 재갈이면 족했다. 평민들이 글줄 읽는답시고 법률을 알려고 시도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문자 교육이 불법인 경우도 있었다. 노예가 문자 교육이 불법인 경우는 훨씬 많았다.
그나마 전쟁 노예가 급증하면서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했지만 어차피 대륙인의 태반이 문맹이니 별 걱정은 없었다.
한은 그런 대륙의 일반적인 상식을 뿌리부터 뒤엎었다.
그러나 이는 놀랄 일이 워낙 많은 한의 자작령에서는 잠시 이슈가 되었을 뿐, 금세 다른 일들에 떠밀려 범상한 사건의 하나로 묻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