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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0. 고대수 백두(白頭)


한은 흙을 곱게 골라 놓은 바닥에 하얗고 매끄러운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를 꽂았다.

―띠링! 세계수의 가지를 꽂으셨습니다.
―이곳에 세계수의 가지를 뿌리내리시겠습니까? 세계수의 가지를 심으면 고대수가 됩니다. (예/아니오)

“예.”
으드득 소리와 함께 가지에서 뿌리가 자라나 뻗어 갔다. 찬란한 은빛 잎도 서너 장 펼쳤다.

―고대수를 심으셨습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으시겠습니까?

“백두(白頭).”
고대수가 이름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이파리를 살랑 흔들고 잠들었다.

―고대수 백두는 수면기라서 활동이 80% 줄어듭니다.
―지력(地力)이 약해서 고대수의 효과와 영향 반경이 60% 줄어듭니다.
―고대수가 성장하거나 지력(地力)이 살아나면 그에 비례하여 효과가 회복됩니다.

화아아…….
한처럼 자연 친화가 극도로 높은 존재만이 볼 수 있는 녹색의 선명한 빛이 환을 그리며 주위로 퍼졌다.
한은 자원 지도를 확인했다.
‘땅심(地力)이 조금 올랐군. 갓 뿌리내린 가지치고는 훌륭해.’
한은 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군데군데 엘프목의 씨를 심었다.
엘프목들은 곧바로 싹을 틔우고 가지를 쭉쭉 뻗더니 어른 키 정도로 자라났다.
세계수의 자식 격인 고대수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엘프들은 마을을 만들 때 마을 중심에 세계수의 가지를 먼저 심었다.
그렇게 태어난 고대수를 수호하기 위해서 엘프목들을 심었다.
엘프목이란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다. 엘프들이 중요시하고 돌본다는 이유에서.
‘드리어드(Dryad)들은 아직 앤트(Ant) 상태이군.’
한은 자연 친화력이 높아 정령사들도 보기 힘든 나무의 정령을 볼 수 있었다.
한은 엘프목에 깃들어 있는 나무의 정령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어린 묘목이라, 정령들은 나무와 동화되어 있는 알 상태라 할 수 있는 앤트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한은 엘프목 주위에 엘프의 숲에서 채취한 씨앗을 조금씩 심었다.
세계수의 가지와 가까워서인지 금세 싹이 텄다.
화초는 연둣빛 잎사귀를 내밀었고 나무들은 무릎 길이 정도로 컸다.
‘이 정도 심어 두면 알아서 크겠지.’
비료나 농업신 데메소다의 성물은 뿌리지 않았다.
가지일지언정 세계수의 힘만으로 충분하고, 공연히 고대수 백두의 잠만 깨우게 될 테니까.
한은 인벤토리에서 나무로 틀을 짜고 고운 흙을 채운 모판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울타리 나무의 씨를 심었다.
고대수 백두의 힘을 받아 싹을 틔운 울타리 나무를 모판째 들자 잠시 성장을 멈췄다.
한은 말을 타고 달렸다.
고대수 백두 주위로 멀리 둥그렇게 공병대가 작업을 마쳐 가고 있었다. 공병대는 땅을 갈고 한이 엘프의 숲에서 받아온 거름을 시비하며 흙을 골랐다. 한은 모판에서 새싹을 덜어 내 듬성듬성 뿌리며 지나갔다.
한이 대충 던질 때마다, 모판의 싹들이 저절로 한 포기씩 나뉘며 정확한 위치에 안착했다.
농부 마이스터이자 농업 마스터리를 찍은 한의 신묘한 손놀림이었다.
새싹은 금세 자라나 어른 무릎 길이의 묘목이 되었다.
한은 나중에 적당한 여건이 되면 울타리 나무에 나무 정령들을 깃들게 할 작정이었다.
그들이 엘프를 대신해서 한 자작령의 고대수 백두를 수호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워낙 숲이 빈약해서 정령들을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이 일대를 ‘영목(靈木)의 숲’이라 이름 짓고 영주를 제외한 자들의 출입을 금한다.”
한은 세계수 주위에 원형으로 개간된 땅을 금지(禁地)로 설정했다.
한이 백두를 심은 곳은 영주성 안쪽이었다.
농지를 개간하기에도 부족한 인력을 빼돌려 원형으로 넓게 갈아 두었다.
영주성의 안쪽에 산 두세 개는 넉넉히 들어갈 넓은 땅을 오로지 백두를 위해 쓴 셈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낭비가 아니었다.
‘자연 친화력이 한없이 0에 수렴하는 땅. 데메소다 여신의 성물로 도배를 하고 최상급 비료를 깔아도 겨우 평작 수준의 소출이 난다. 하지만 백두를 심었으니 주변 농지들은 안심. 엘프의 축복을 받은 종자를 심으면 괜찮겠지.’

한은 도시를 장방형으로 설계했다.
넓고 네모난 영주성 부지의 한가운데 원형으로 ‘영목의 숲’을 조성했다.
영주성 밖은 행정청과 병무청 자리였다. 공무원들과 영지군이 머무를 곳이었다.
그 바깥은 주거지와 상업 지구였다.
목책은 주거지를 둘러싸며 지어졌다.
그 너머에 공업 지구, 군사 훈련 정비 지구와 농업 지구가 있었다.
한이 처음 보여 준 도시 전체 설계도는 지나치게 방대했다.
신임 자작의 포부가 커도 너무 컸다.
측량과 측도에 익숙해져서 설계도를 읽을 줄 알게 된 작업반장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영주성은 공간만 그려놓고, 행정 지구와 군사 지구가 올망졸망 붙어 있었다.
거기서 멀찍이 주거, 상업, 교육, 문화 지구가 있는데다 농업과 공업 지구는 더 멀었다.
도성의 주거지에서 논밭으로 가려면 노새를 끌어도 이틀은 걸릴 만한 거리였다.
‘이틀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농사를 지으란 말인가? 아니면 농부들은 요새도 없는 곳에서 알아서 초막을 짓던 텐트를 치던 농업 지구에서 붙어살란 뜻인가?’
다행히 영주도 허황된 꿈을 꾸는 와중에 현실을 직시하는지, 방대한 설계도 중에서 일부만 작업을 시도했다.
주거 지역이 넓었지만, 현재 영지민들이 거주하는 권역을 목책으로 둘러싸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개간 중인 농지는 주거지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게 다 설계도에서 쓸데없는 공간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영지민들은 생각했다.
목책도 겨우 세울 판국에 공원과 성터와 해자가 들어설 자리라며 훌쩍 띄워 둘 이유는 뭐란 말인가?
거기에다 영주는 며칠째 불필요해 보이는 작업을 시켰다.
길을 수없이 닦게 했다.
오솔길이 아니었다. 대로(大路)였다.
한은 오솔길 옆에 자재와 작업조를 배치시키고 설계도의 큰길 작업 명령을 내렸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시야에 작업 지점과 할 일, 자재 위치가 표시되니 명령대로 따랐다.
그러면서 틈틈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만을 토로했다.
“집터나 광장도 아니고, 무슨 길이 이렇게 넓지? 영주님의 속을 당최 모르겠네.”
“마차가 넉넉히 다니도록 만든다는데 6두 마차 10대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달려도 남겠어. 더구나 이건 뭐야? 자전거 도로?”
“나는 인도가 가장 이해가 안 가. 길이면 다 같은 길이지. 마차 따로, 사람 따로 다닐 이유는 뭐란 말이야?”
“아 글쎄, 내 말이.”
쉬는 시간마다 작업자들의 불평이 하늘을 찔렀다.
“도로 한가운데 화단은 또 뭐고? 심지어 인도와 도로 사이에도 가로수 길이 있단 말일세.”
“어차피 설계도 표시일 뿐. 우리는 땅만 파고 다지기만 하면 되니 그런다 치고. 제일 웃긴 것은 여기 교차로 있잖은가? 옆에 둥글둥글 따로 길을 내서 무엇에 쓰냔 말이지. 그냥 편하게 쭉쭉 앞으로 가면 될 것을, 누가 멍청하게 일부러 빙 돌아가냐고.”
“쯔쯔, 그 정도로 놀라다니 자네들 아직 멀었군. 일방통행이라고 들어나 봤나? 누가 지킬까?”
풍족한 식사로 무마하고 있지만, 영지민들의 불만은 포화 상태였다.
고된 노동은 견딘다 쳐도, 이대로 괜찮은지 불안감 때문이었다.
“공지(空地)에는 무슨 작물을 심어도 소출이 거의 안 나기로 유명하지. 농지를 넓게 개간한다지만 부족할 게 틀림없어.”
“영주님이 재물과 식량을 생각 없이 펑펑 써대니 곧 바닥이 드러날 걸게. 그렇게 되면 왔던 길을 도로 가는 수밖에.”
“하긴, 여차하면 야반도주라도 해서……. 길이 있으니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고, 도중에 우물도 넉넉하니…….”
영지민들이 불만을 억누르는 이유는 도주로가 있다는 최후의 믿음 때문이었다.
한은 영지 정보창으로 주민들의 불만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도시 설계안을 밀고 나갔다.

* * *

한은 말을 타고 한나절을 달려 엘프의 고리―고대 요정의 고리―에 용병들과 함께 나와 있었다.
용병 백 명에게 특별 상여금을 약속하고 손에 손에 괭이를 들려 주었다.
“적당히 가는 시늉만 해도 상관없으니, 이 주변에 최대한 넓은 면적으로 땅을 갈아야 한다. 기본 임금에다 작업 성과에 따라 각자 보너스가 주어지니 최선을 다하도록.”
용병 백 명은 엘프의 고리를 중심으로 넓은 땅을 열심히 팠다.
영주의 말대로 적당히 땅을 일구면 되었으니, 특별한 힘이나 농사 기술이 필요 없었다. 대충 넓게 빠르게 파는데 주력했다.
한은 인벤토리에서 진흙을 뭉쳐 만든 경단을 꺼냈다.
비료를 섞어 갠 진흙 경단에 엘프목 등의 씨앗을 넣고 고대수 백두의 주위에 잠깐 내려놓아서 그 힘도 약간 받았던 경단이었다.
한이 진흙 경단을 뿌릴 때마다 흙 속으로 심어지며 고대수 백두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 반복되었다.
좀 더 느리고 덜 자랐지만, 얼추 숲이 될 미래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이 몇 군데에 농업신 데메소다의 D급 성물을 묻자, 수풀의 성장은 훨씬 탄력을 받았다.
나무들은 손바닥 길이 정도로 자라났다.
한은 우물을 파지 않았다.
엘프의 숲은 엘프들이 특별한 비법으로 만드는 샘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손님 맞을 채비는 해 둬야지.’
한은 엘프를 자작령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한이 부르지 않아도 엘프들 스스로 고리 주변을 정찰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교류를 할 참이었다.
엘프는 엘프목이 자라는 숲에서 거의 정령과 비슷해졌다.
나무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이 가능해지니, 인간을 꺼리는 엘프들에게는 고리 주위에 숲을 만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빠른 숲의 조성을 위해 진흙 경단에 세계수 주위에서 걸러 낸 비료도 약간 첨가했다.
‘농지에도 아껴서 쓰는 비료가 아깝긴 하지만 꼭 필요한 투자다.’
“힌덴.”
“예.”
“곧 손님이 올 테니 자네가 이들을 지휘하고 있게. 나는 그들을 따라 엘프의 숲에 다녀오겠네.”
“알겠습니다.”
한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기사 힌덴을 데려왔다.
기사 롤랑은 병사나 기사단 같은 집단을 지휘하는데에 능했고, 융통성 있는 힌덴은 한이 개인 용무를 보러 다닐 때 대동하기 편했다.
“어서 오시오, 일리얀. 그리고 숲의 일족 여러분.”
힌덴은 한이 인사말을 꺼낸 뒤 입을 벙긋거려도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자 약간 놀랐지만, 미리 들어 놓은 얘기가 있어 내색하지 않았다.
한의 주위에 일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나마 상급 소드 익스퍼트인 힌덴이니 기척이라도 느끼지, 멀리 떨어져서 작업하는 용병들은 전혀 몰랐다.
“무슨 뜻인가? 인간.”
일리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의심부터 드러냈다.
‘내 엘프 친화력에 이렇게 저항하다니, 역시 특이한 엘프라니까.’
한은 싱긋 웃었다.
“이 숲은 내가 보이는 최소한의 성이요. 약속한 일도 하고, 제안할 일이 있기도 해서 말이오.”
일리얀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약속대로 한을 엘프의 숲에 데려갔다.
한은 엘프의 숲에서 기생목을 제거하고 약간의 채집 활동을 했다.
족장의 집에 초대되어 차를 대접받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저희 밭에 심을 곡식과 채소 종자에 축복을 걸어 주십시오.”
엘프 족장과 장로들은 흔쾌히 응했다.
엘프의 축복은 시전자의 능력에 좌우되었는데, 족장과 장로들은 최상이었다.
축복받은 씨앗을 보며 한은 싱글거렸다.
“그 대신이라기에 뭣하지만, 저는 약해진 나무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그대는 인간족들이 말하는 나무 박사로군.”
한은 엘프들을 따라가 병충해를 입어 약해진 묘목들을 돌보았다. 엘프목은 워낙 튼튼하지만 묘목일 때는 약한 편이었다. 다행히 전염력은 없었다.
시들해진 엘프목 묘목은 정령들의 동의를 얻어 따로 모아 보살폈는데, 병을 이겨 내고 살아남는 묘목은 거의 없었다. 한이 그 묘목들에게 강화 스킬을 쓰자, 병에 대한 저항력과 회복력이 강해지면서 시름시름 앓던 나무 정령 앤트들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과연 세계수를 낫게 한 명의다!”
엘프들은 감탄했다.
어린 엘프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러러봤다.
인간을 싫어하는 깐깐한 엘프들도 표정이 풀렸다.
이 숲의 엘프 부족은 완전한 신뢰와 우호로 돌아섰다.
반신반의하던 엘프들이 한의 말을 신용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작 인간에게 보답할 일이 있으면 부디 말해 주시오. 듣자 하니 고리 주위에 엘프목을 가득 심었다는데, 혹시 우리의 전사가 필요한게요?”
“예. 그렇다고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원래 고리 주위에 정찰병을 두시지요? 가끔 제 성 주위에서 은신을 풀고 모습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몬스터 사냥이나 인간족끼리의 전쟁에 전사를 빌리는 게 아니라, 단지 모습만 보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를 다스리는 일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위협은 당분간 저희의 용병들로도 충분히 격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갓 영지민을 이끌고 왔으며, 건장한 병사 출신이었던 영지민들을 다스릴 무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아예 우리 전사들을 빌려 가면 어떻겠소?”
“제가 숲의 일족 여러분과 우호조약을 맺었음은 이미 알음알음 퍼져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 주위에 모습을 보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력시위가 됩니다. 물론 이를 정식으로 발표하고,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소. 자작 인간이 발표할 협정에 이런 내용을 꼭 넣어 주시오. 자작 인간은 우리 은의 가지 부족과 맹약을 맺었으니, 누구도 자작 인간을 해치도록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