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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9. 첫 번째 도시, 서울
―띠링!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최고급 기생목 수레
요약 : 엘프의 숲에서 자생하는 기생목으로 만들어져 가볍고 탄력적이면서도 내구도는 최상이다. 품질과 편의성을 최대로 살린 디자인을 적용했다.
바퀴에 쓰인 재질은 기생목의 잎이라 고무 타이어와 유사한 효과를 주지만 오래 쓰지는 못한다.
한은 최고급 수레와 손수레를 만들어서 기존의 수레와 교체했다.
낡고 무겁고 덜컹거리는 예전 수레는 분해해서 재료를 추출했다.
‘엘프 숲의 기생목은 질겨서 좋지.’
오랜 세월 엘프들의 모진 탄압에 버티며 근근이 생존해 온 기생목은 채취와 가공이 어렵다 뿐이지 재료로서는 최상이었다.
바퀴는 한 달 정도 버티는 기생목의 넓은 잎으로 만들어서 풍선처럼 바람을 불어 넣었다.
가다가 찢어지면 땜질하면서 가면 되었다.
영지민들은 새 수레를 보급받고 놀랐다.
“이렇게 가벼울 수가!”
“금방 부서지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당장 편하니 좋군. 내 짐도 아니고 영주의 짐이잖은가?”
“예끼, 이사람. 영주님 짐도 있지만, 우리 식량과 물도 있네. 그리고 자네 애들이 전에 길 가다 쓰러졌을 때 수레에 실려간 일은 기억 안 나나?”
“쳇, 그래 봤자 다 영주 저 좋다고 하는 짓이지. 피터 자네도 잠깐 잘해 준다고 홀랑 넘어가지 말게. 귀족들은 죄다 그놈이 그놈일세. 구관이 명관이란 말도 못 들어봤나? 이 영주 보아 하니 얼마 안 가 알거지가 되어서 우리를 죽지 못할 만큼 쥐어짤 게 틀림없어.”
“다 굶어 죽던 우리를 살려 놓은 분이 누구신가?”
“그래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네. 돼지도 잡기 전에 배불리 먹인다네. 우릴 이런 사지로 끌고 오려고…….”
이렇게 의심하는 자도 있고.
“손에 착 달라붙는 걸?”
“내가 먼저 간다!”
“어어, 이봐! 기다려!”
철없이 추월하며 속도 경쟁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집집마다 손수레를 한 대씩 보급해서 등짐을 없앴다.
손수레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들만큼 가벼우면서 무게 중심과 균형이 잘 맞았다.
마차는 모두 해체하고 짐을 한의 인벤토리로 옮겼다.
나귀와 말, 소에 수레를 매단 후 일행은 이동을 시작했다.
한이 만든 수레는 끌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나무 바퀴로 만들었던 기존의 수레는 울퉁불퉁한 길을 걸을 때 충격을 고스란히 수레와 사람에게 전달했다.
타이어가 달린 새 수레는 충격을 훨씬 경감시켰고, 마찰력을 줄여 이동 속도를 올려 주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오리발 베이스캠프보다 5배 거리이지만, 우리는 한 달 안에 도착할 것이다.”
영주의 호언장담이 실로 이해가 갔다.
한은 오리발 베이스캠프에 머물면서부터 식단에 신선한 채소와 엘프의 숲에 있는 호수와 강에서 잡은 물고기들을 더했다.
균형 잡힌 식단, 체조와 운동 및 휴식으로 다져진 체력은 영지민들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었다.
“여러분은 원래 오리발 베이스캠프까지만 저희를 호송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자작님과 영지민들을 정착지까지 호위할 임무가 있습니다.”
왕의 병사들이 우호적으로 예정 외의 일정에 따라와 주었다.
전란기를 거쳤으며 전운이 걷히지 않은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기사와 병사들에게 전쟁신 마르크의 성물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들은 이따금 헤매다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리하며 일행을 지켰다.
두 기사와 용병 3백으로는 시간이 지체되거나 다칠 염려가 있었는데, 철통같은 방어를 해 주었으니 한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행렬은 순조롭게 첫 정착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지나간 곳은 가늘고 긴 오솔길, 우물과 호수가 드문드문 남았다.
언덕에 올랐다.
멀리 넓고 긴 강을 따라 황무지가 펼쳐졌다.
정찰대의 보고대로 황량하지만 평화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연두빛 풀을 본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풀과 흙이 있어서 토끼와 모래쥐가 굴을 파고 살며 그것을 잡아먹는 뱀과 여우, 새가 보였다.
몬스터는 없었다.
세계수의 기운이 약간이나마 서려 있는 강물이 흘러서 몬스터들이 기피했다.
또한 엘프들이 이따금 정찰을 나와 청소를 하고 가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이 엘프와 우호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엘프들은 인간이 앞마당에 얼쩡거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앞마당이 어지간한 제국 정도의 면적이더라도.
다각다각.
채플린 경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이 근처에서 엘프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엘프의 숲에서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카테르니아 대륙으로 불려오기 전에 엘프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저희 세계는 엘프와 인간의 관계가 중립적이거든요. 덕분에 여기에서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채플린 경은 한이 보여 주는 엘프 족장의 편지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디에 성을 세우시겠습니까?”
“배산임수.”
“네?”
“풍수지리에서 강을 끼고 산을 등지면 좋다고 합니다.”
“호오, 과연. 방어와 생활 양면으로 유리하겠군요.”
적당한 자리를 찾아낸 한은 식수로 쓸 우물을 몇 기 파는 것으로 첫 삽을 떴다.
고대 요정의 고리, 다른 말로 ‘엘프의 고리’라 불리는 엘프의 이동 마법진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였다.
인간은 멀지만 민첩한 엘프들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리발 베이스캠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사를 시작할 지역 주변에 천막을 치도록 했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도착 기념으로 하루 쉬기로 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영지민들은 간단한 식사가 아니라, 요리사들이 나눠 준 푸짐한 성찬을 받고 환호했다.
행정관 토리오가 기록하기 위해 물었다.
“도시의 이름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서울.”
“발음이 약간 까다롭지만 그런만큼 우아하게 들리는군요. 강의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강.”
“자작님의 이름을 따서 지으셨군요.”
비록 모델이 된 대한민국의 한강을 너댓 줄기 합친 강폭을 가진 강이었지만, 한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채플린 경에게 입지 조건이 ‘배산임수’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지형만 보고 고르지는 않았다.
도시 경영 서적을 탐독하며 척박한 두 영지를 키웠던 경험을 총동원해서 계획 도시의 입지를 골랐다.
‘무엇보다 강이 옆이고, 지하 자원도 주변에 있고, 농지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주변에 산과 언덕도 적당히 있어서 바람이 거칠지 않고, 도시를 확장하기도 용이하고…….’
한은 주변 지역 자원 지도를 들여다보며 도시 설계 수정을 마쳤다.
한은 회의용 큰 천막에 공병대장 바론과 작업반장들을 불렀다.
“도시 건설 계획이다.”
한은 원탁에 설계도를 몇 장 꺼냈다.
전체 설계와 세부 설계였다.
두 기사와 집사, 시녀장, 행정관은 출발 전에 한 번 봤던 설계도들이었다.
“번호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지.”
“자재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바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주가 아공간을 활용하는 모습은 많이 봐서 익숙하고, 또한 이토록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완성된 설계를 뽑을 때는 자원 상황까지 모두 감안한 상태라고 추측되지만, 그래도 혹시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3차 설계도까지는 자원이 된다. 그 이후는 주위에서 추가로 조달해야지.”
바론과 작업반장들은 수긍했다.
자원을 주위에서 조달한다는 게 말처럼 쉽게 될 일은 아니지만, 2차까지 해 두면 최소한의 방어와 식량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엘프들과 일찍 만났고, 또 도시 근처에 엘프의 고리가 있어서 목재 조달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지.’
안 그랬다면 도시를 엘프의 숲 가까이 잡고도 한이 혼자서 엘프의 숲까지 다녀야 할 일이 늘어났을 것이다.
한과 작업반장들은 각자의 작업 영역을 나누고 텐트를 나왔다.
“모두 주목!”
반장들이 나무로 된 넓은 게시판을 50호마다 띄워 둔 작은 광장에 세우더니, 포고문을 붙였다.
첫 번째 작업.
1. 주거 지역을 다진다.
2. 농지를 개간한다.
3. 목책을 세운다.
영주의 공고문이었다.
쉬운 표음문자 덕분에 문맹률이 5% 이하로 떨어졌다.
영지민들은 더듬거리며 읽거나 재빨리 읽고서 옆 사람에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오리발 베이스캠프 때와 똑같이 조를 편성하고 작업에 들어간다.”
영지민들은 오리발 베이스캠프에서 익숙해졌기 때문에 별 설명 없이 알아서 작업조를 따라갔다.
한이 자재를 쌓아 두고 표시해 둔 장소에서 정해진 작업을 하면 되므로 어려울 일이 없었다.
“일단 주거 지역을 다지고 천막을 옮긴 다음에는, 농지 개간을 최우선으로 한다. 현재 우리는 파종 시기가 늦어졌다. 다행히 나에게는 엘프의 축복을 받은 씨앗과 농업의 여신 데메소다 님의 성물이 있다. 그러니 걱정 없이 개간에 총력을 기울이면 된다.”
한과 영지민들이 출발한 것은 3월 중순.
오리발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이 5월 말, 영지에 도착한 것이 6월 중순이었다.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쓰는 역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들 제멋대로라서 한은 지구에서 쓰는 달력을 만들었다.
음양력을 둘 다 썼다.
양력이 단순하고 편하지만, 농사짓기에는 음력 달력이 정확했다.
한은 12간지와 절기가 그려져 있는 시골 달력을 떠올리며, 음양력을 혼합 기재해서 달력을 배포했다.
나무 조각을 죽간처럼 엮어 만든 목간에 한이 직접 뽑아 만든 유성 잉크로 표시한 달력이었다.
한이 인쇄술과 대량 제작술이 없었다면 만들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냥 막연히 따뜻한 계절, 씨뿌리기 좋은 날씨 정도로 날짜를 셈하던 평민과 노예들은 한이 나눠 준 달력을 아무런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한을 따라온 마법사들이 기존의 역법 체계와 달라 혼란을 겪었다.
“월화수목금토일이라니…….”
신관과 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달력은 천체 운행과 신들의 권좌를 섞어 만들었다. 각 신전과 마법 계파마다 각자 권위를 위해 조금씩 달력을 달리 썼다.
일년 365일, 12개월, 한 주를 칠 일로 나눈 한의 역법은 그들에게 세련미와 지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몹시 거칠고 난폭하게 느껴졌다.
반면 평민과 노예들은 한의 달력을 크게 반겼다.
쉽고, 단순하고, 편하면서 일 년 시기에 딱 맞아떨어졌다.
커다란 양력 숫자 아래 작게 써진 음력 숫자와 절기 표시는 농부들에게 몹시 유용했다.
한은 천체 관측을 통해 황도를 읽고 역법을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것을 썼다.
다행히 달의 변화 역시 비슷했다.
‘만약 판타지 세계라고 달이 두 개라거나 크기와 거리가 달랐다면 큰일이었지.’
그랬다가는 환경이나 기후 조건도 지구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도 지구처럼 3, 4월에 씨뿌리기를 시작하는데, 6월 중순은 많이 늦은 감이 있었다.
“우리 내년이면 식량이 다 떨어져서 꼼짝없이 굶는 게 아냐?”
“설마. 그전에 몬스터들이 내려와서 다 때려 부수는 게 빠르겠지.”
영지민들은 무시무시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도 한이 시키는 일을 걱실걱실했다.
당장 배부르고 몸이 편한데다 아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고, 믿고 싶지 않은 막막한 미래에 대한 현실도피이기도 했다.
농지로 지정된 곳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작업조가 모였다.
“우선 쟁기로 밭을 간다.”
군마를 제외하고 소와 말, 나귀 같은 동원할 수 있는 큰 가축들은 모조리 끌려 나왔다.
농부들은 한과 반장들이 시범을 보이는 대로 소와 말을 힘겹게 몰아서 쟁기질을 시작했다.
영지민들은 한이 내어 준 쟁기가 무쇠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투박하게 만든 강철이었다.
‘무쇠로는 이 거친 땅을 개간하기 힘들지.’
대륙에서 강철은 이름난 대장장이가 조금씩 만들 수 있었다.
귀한 보물로 다뤄지는 강철이었기에, 기사들도 무쇠처럼 보이는 쟁기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가난한 소작농과 농노들은 소와 말로 쟁기질을 해 본 경험도 드물었기에, 그저 우마가 힘이 세서 밭이 잘 갈린다고 여겼다.
소들은 못생기고 난폭해서 고삐를 잘못 쥐면 영지민들을 들이받으려 했다.
‘한우는 정말 위대한 소였군.’
한우는 잘생기고 영리한데다 유순하며 주인을 잘 따르고 힘세고 인내심이 높았다.
가축으로서 장점은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
‘여유가 되는 대로 브리딩(품종 개량)을 빨리 진행해야겠어.’
당나귀가 영지민의 발을 밟고 똥을 뿌지직 싸질러 놓고는 거기에 철퍼덕 주저앉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한은 생각했다.
농번기(농사로 바쁜 기간)에는 손대지 못하지만, 농한기가 되면 즉시 가축 종자 개량을 시도해야겠다고.
한은 닭장의 닭과 오리들을 돌아보았다.
“브리딩! 대상은 1번부터 24번까지 닭장과 오리장! 너희의 개량 우선 목표는 ‘육질, 성장 속도, 질병에 면역 강화, 알 생산량 증가’다!”
“꼬꼬꼬…….”
“꾸엑꾸엑…….”
한은 우마가 일으키는 자잘한 사건사고들로 쌓인 스트레스를 가금류에게 브리딩 스킬을 시전하는 것으로 풀었다.
“언어 현황 조사를 하겠네.”
한은 롤랑의 호위를 받으며 노예 출신인 반장들을 불러 협조를 구했다.
한은 노예들과 1대1 면담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카테르니아어와 다른 언어를 쓰는 노예들과 만났다.
언어권이 다른 노예들은 생활에 큰 불편함을 겪었다.
비슷한 처지의 노예들과 섞여 있는데다 따로 교육을 받을 리도 없으므로 ‘고맙습니다’나 ‘도와주세요’ 정도로 단순한 말조차 익히기 힘들었다.
작업 지시를 못 알아들으니, 노예 감독관의 채찍이 날아오고 욕설과 고함이 오갔다.
조사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고대 마도 시대에는 카텐과 테른이라는 두 거대한 제국이 있었는데, 대부분 이들의 후손이라 주로 여기서 유래한 카테르니아어와 테르나어 두 가지를 썼다.
주변국들의 언어도 문법과 어원이 비슷해서, 지배국이 자주 바뀐 지방 출신들은 이중 언어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한은 노예들의 언어 현황을 조사하다 특기할 점을 발견했다.
로이
언어 정보 요약 : 딜라일라 공국 출신. 딜라일어를 쓴다. 글라시오 제국과 공동 작전 수행 경험으로 테르나어를 약간 배웠다.
에밀
언어 정보 요약 : 딜라일라 공국 출신. 딜라일어를 쓴다. 글라시오 제국과 공동 작전 수행 경험으로 테르나어를 약간 배웠다.
둘 다 근육을 일부러 약간 둔하게 만들고 예기를 감추고 있었지만 훤칠한 뼈대는 감출 수 없었다.
‘제법 고급 인력들이군. 지능은 별로 안 높아 보이는데 개인 정보는 구체적으로 뜨지 않는 걸로 보아 나에게 반감이 크거나 혹은 소속이 정해져 있어. 충정이 투철하군. 어쩌다 이런 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지? 이러면 이자들끼리 입을 맞춰 거짓 정보를 내놓았을 가능성도 있어.’
처음에는 자료 조사 차원에서 몇 명만 대표적으로 만날 셈이었는데, 아예 공국 출신 노예들을 다 만나 보았다.
‘딜라일어는 초보적이거나 엉터리 수준, 테르나어가 수준급이다. 그렇다면 테르나어가 주가 되면서 딜라일어를 접할 수 있는 인접 지역. 노예로 잡힌 때부터 신분을 감추고 있었군.’
의심을 사지 않도록 언어 조사라는 명목이 있으므로, 다른 노예들도 골고루 다 만나야 했다.
만나 보니 확실해졌다.
‘이렇게 짜 맞춘 듯이 똑같은 정보들이 있을 수 있나?’
한은 웃음을 흘릴 뻔했다.
‘수상쩍은 건 수상쩍은 거고.’
한은 일단 처음 계획대로 단어장을 만들었다.
얇게 배어 낸 목간에 간단한 일상 회화와 작업 용어들을 두 가지 언어의 발음을 벨로타어로 기록한 단어장이었다.
말하자면, 하와이어와 영어를 한국어로 기록하듯이, ‘알로하―헬로우’ 식이었다.
‘어차피 실무 회화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몇 가지만 익혀 두면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크게 없게 된다.’
한은 노예들에게 언어권마다 다른 회화집을 나눠 주도록 지시했다.
통장인 샘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가끔은 아랫사람들의 말도 들으십시오.”
“음?”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불만인 자들이 많습니다.”
겉보기로나 실질적으로나 노동을 더 많이 한달 뿐 노예와 평민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영주가 언어가 다르다거나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감싸주며 편의를 챙겨 주는 식이니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험지를 따라왔다는 불평불만에 가득 찬 자들은 더욱 그랬고, 평범한 일반인들도 자신들이 노예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억울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걸 잊었군.”
한은 아차 싶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 그럼 지금부터…….”
“노예 감독관을 폐지한다.”
“예에?”
“노예들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해방이 되면 내 소중한 영지민이 될 사람들인 것은 마찬가지. 그만큼 믿고 대우해 줘야지.”
샘이 얼빠진 얼굴로 되묻든 말든 한은 용병들 중에서 뽑던 노예 감독관을 해체했다.
“노예들의 관리는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서 뽑은 이장과 반장들이 있지 않나? 그들이 잘해 낼 걸세. 간단한 처벌권도 주었으니.”
한은 한가롭게 말했다.
‘영지민들이 이제 제법 배부르고 몸도 많이 나아졌나 보군.’
한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못 먹고 살다 배에 기름이 끼면 별 생각을 다 하는 법이었다.
넘치는 에너지를 시비 거는 일에 소모하려고도 들었다.
그만큼 딴 데 정신 팔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고용인들과 병사, 용병 및 평민들은 바짝 긴장했다.
한이 전격적으로 단행한 노예 감독관 해체로 노예들이 큰 문제나 무력시위를 벌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이 장담한 대로 노예들은 잠잠했다. 노예 감독관이 있기 전보다 더 지시를 잘 따르고 사소한 말썽조차 줄어들었다.
젊고 혈기 넘치는 전쟁 노예들이었다. 이는 누군가 뒤에서 체계적으로 노예들을 장악하고 있음을 뜻했다.
한은 로브 아래에서 싱긋 웃었다.
아논의 기사들은 당황했다.
“무슨 의도일까요?”
“의도는 무슨. 영주가 속없는 호인이고 멍청이라서지.”
노예 감독관 철폐를 시행한 영주의 의도를 몰라 눈에 띄지 않게 잠잠히 있었다. 노예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자체 단속했다.
아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지었다.
“당분간은 자네들의 계획을 미뤄야겠군. 생각보다 녹록찮은 영주야.”
“왕의 병사들만 떠난다면 저희의 무력은……!”
“모르겠어?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에 늑대의 아가리에서 재갈을 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노회한 어른의 눈길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단 말이지.”
아논의 기사들은 속절없이 당했다는 기분에 울분에 찼지만 별수가 없었다. 영주가 떠보기로 나왔다면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만큼 대단한 자신감이 어디서 근거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작자인데…….”
한은 당장 젊은 병사 출신의 노예 2천이 날뛰면 이들을 진압할 무력이 부재했다.
한의 여유는 그들보다 훨씬 강한 자들을 상대하면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다.
그들은 한이 「드래곤 쇼크」에서 온갖 랭커들과 강한 NPC들, 귀족들에게 시달린 끝에 어떤 무력시위에도 위축되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허풍에 불과하더라도 여유를 내보이며 대놓고 떠보면 어떤 강한 자들이라도 잠깐이나마 머뭇거리게 마련이었다.
아논 패거리는 한이 아공간에 무언가 비장의 무기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당분간 납작 엎드려서 관망하기로 했다.
아논들의 추측과 달리 한의 사정은 썩 좋지 않았다.
왕의 기사 채플린 경이 우거지상으로 찾아왔다.
“궁정 마법사가 목책이 세워지면 당장 떠나야 한다고 요구해 왔습니다. 목책이 완성되면 요새나 마찬가지라나요?”
한이 요구했던 1인용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 따라왔던 궁정 마법사 티요른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불만을 늘어놓던 자였다.
채플린 경은 궁정 마법사 티요른보다 직위나 뒷배로 보아 훨씬 낮은 처지에 있어서 그를 거역할 처지가 아니었다.
천재 소리를 듣던 궁정 마법사라고 하지만, 서른일곱의 나이에 얼마 전 5서클에 갓 오른 티요른은 이동 마법으로 스스로 돌아갈 실력이 되지 않았다.
왕궁 보고에서 전해 내려오던 마법진 설치용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별수 없지요.”
채플린 경이 최대한 티요른을 어르고 달래서 서울까지 따라왔다.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엘프의 숲에 다녀와야겠군.’
병력을 수급할 방법은 없지만 무력을 빌릴 수는 있었다.
‘호가호위해야겠어.’
허풍으로 성질 급한 젊은 병사들을 억누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