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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솨아아아아…….
한은 빛의 고리가 잦아들자 눈을 떴다.
피톤치드 향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깊은 숲이었다.
엘프의 숲 한가운데에서 신비한 음률이 새어 나왔다.
세계수가 심장 박동처럼 흘리는 아름다운 음이었다.
이 세계수의 고동 소리는 엘프들조차 듣지 못했다.
한은 잔잔히 웃음 지었다. 세계수가 아득하게 보내는 인사를 알아들은 것이다.
“숲의 일족들께서 저를 여기까지 초대하신 이유를 알겠군요.”
수심이 가득했던 엘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종족이 다르다고 편견을 갖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족 같은 생각이다. 우리는 인간의 교활한 특성을 이해하되,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님 또한 알아야 한다.”
족장은 아들 일리얀의 말을 철없는 소리로 일축했다.
‘상당히 특이한 엘프다. 불같은 성정, 엘프 답지 않은 유연한 사고방식. 오히려 인간과 비슷하지 않은가?’
한은 흥미를 느꼈지만 거부하는 이에게 억지로 다가서는 취미는 없었다.
“저는 세계수의 느낌과 의지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족인 저의 말이니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오. 그대의 말은 충분히 신뢰가 가오. 그대가 들고 있는 피리의 새싹이 그토록 생생하게 피어 있으니. 우리 엘프들조차 뿌리내리지 않은 세계수의 가지에서 싹을 틔우는 건 불가능하지.”
“여러분은 세계수에 문제가 생겨서 저를 부르셨을 겁니다. 맥박이 희미하고 약해져 있군요. 세계수가 많이 지쳐 있어요.”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한에 대한 호의가 순식간에 증폭되었다.
인간들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 때문에 드러내지 못했던 호감이었다.
“맞소이다. 20년 전부터 세계수가 잎마름병을 앓기 시작했소. 시들시들한 잎은 어떤 조치를 취해도 낫지 않더군.”
“저는 치료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 숲에 들어서면서 세계수가 제 손에 들린 가지와 대화를 나눴는지 저를 부르는 소리가 강해졌군요.”
“오오…….”
“저를 세계수로 데려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브를 둘러쓴 인간인 한을 쉽게 믿고 데려가기란 어려울 텐데 족장은 쉽게 결단을 내렸다.
“확실히 그대가 숲에 들어선 후 세계수의 떨림이 더욱 강해지고 반가워하고 있소. 그대는 우리 숲의 일족과 세계수가 함께 기다리던 손님이구려.”
일리얀은 울컥한 얼굴로 족장과 한을 따랐다.
만에 하나 한이 수상쩍은 행동을 하면 즉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예상대로군.’
세계수에 도착한 한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자원 지도를 살피니 세계수가 마른 이유가 확실해졌다.
‘엘프들이란…….’
빛이 나는 하얗고 매끄러운 몸통과 가지, 은백색의 청명한 음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잎사귀들.
세계수 이그드라실이었다.
세계수는 잎사귀를 떨면서 한을 환영했다.
오랫동안 호소할 이를 찾지 못해서 답답했다가 겨우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으니 기뻐서 가지를 휘두른 데도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
“오오오!”
치료도 하기 전에 엘프들의 호감도가 사정없이 올라갔다.
“잎마름병의 원인은 과도한 비료와 축복에 있습니다.”
“예?”
한은 또박또박 일러 주었다.
“세계수는 오래전에 수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숲의 일족들께서 지나치게 과한 영양을 주며 돌보셨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아마 처음에 세계수의 잎이 조금 마르고 새싹이 덜 트기 시작하자, 병이 나지 않았나 걱정하는 바람에 더욱 비료와 축복을 쏟아부었겠지요? 그게 세계수를 억지로 깨워 놓고 있습니다.”
‘잠 못 자게 하는 극악한 고문이지.’
비슷한 사연을 「드래곤 쇼크」에서 겪었다.
“세계수가 잠을……!”
엘프들은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었다.
숲의 일족이자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그들이 세계수에 대해 그만큼 무지한 바람에 본의 아니게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수는 잠을 자고 싶어 합니다. 치료 방법은 간단합니다. 세계수의 주위에서 넘치는 비료를 걷어 내고 생장을 위한 축복 또한 풀어 두면 됩니다. 세계수는 한계에 몰려 있어서 금세 잠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당분간 새싹은 거의 트지 않겠지만, 수면기가 지나고 나면 더욱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스스스스스…….
한의 말을 뒷받침하려는지 세계수가 격하게 가지를 떨었다.
제발 잠 좀 자게 내버려 두라는 외침이었다.
엘프들은 창백해져서 굳어 버렸다.
“잠시 흙 좀 쓰겠습니다.”
한은 양해를 구하고 모종삽을 꺼내 세계수 뿌리 근처의 검은 흙을 한 삽 떴다.
주위에 있던 엘프들이 움찔거렸다.
한은 팔을 휘휘 휘두르더니 누르스름한 황토를 꺼냈다.
“비료를 빼낸 흙입니다. 이걸로 엘프 여러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주위의 흙을 제가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부탁드리겠소.”
엘프 족장이 침중한 어투로 자괴감을 느끼며 말했다.
한은 엘프들이 세계수를 위해 만든 최상의 비료를 빼내며 즐거워했다.
세계수의 낙엽들로 이루어진 특별한 비료에는 엘프들의 축복까지 걸려 있었다.
‘순수한 종족은 이래서 좋아. 그들을 도우면서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거든.’
한이 비료를 정화하고, 엘프 장로들이 세계수에 걸어둔 큰 축복들을 풀어 주었다.
가는 나뭇가지가 한의 발치에 뚝 떨어졌다.
한이 그것을 받아 들자, 세계수는 순식간에 가지를 축 늘어트리고 잎을 다물었다.
한이 말한 대로 잠에 푹 빠져든 모습이었다.
한은 도로롱도로롱거리는 세계수의 코고는 소리를 듣고 ‘어지간히 피곤했군.’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세계수는 축 쳐졌지만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락해 보였다.
세계수의 잎사귀들이 은빛의 눈처럼 하나둘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억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아 놓은 잎들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이 잎들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어차피 이대로 놓으면 다시 세계수에 흡수되니 저희가 치워야 합니다. 은인께서 쓰시지요.”
한은 세계수의 낙엽들을 희희낙락 그러모았다.
“낙엽은 저희가 따로 모아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리로…….”
한은 엘프들을 따라 장로의 집으로 갔다.
한은 엘프들이 감사의 표시로 원하는 바를 묻자 교역과 물물교환을 청했다.
“저는 인간의 장인입니다. 상거래를 하는 상인이기도 합니다.”
엘프 장로는 신중하게 답했다.
“우리는 숲의 은혜로 살아가는 엘프, 숲에서 나는 모든 것으로 필요한 물건을 충당하고 있소. 인간족의 상인과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작 인간은 부족의 은인이니 필요한 물건은 아낌없이 제공해 드리겠소.”
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상대와 자신에게 서로 필요한 일을 찾아내는 특기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도 기생목이 많이 자라고 있군요. 저에게는 나무를 다치지 않게 기생목을 제거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엘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엘프가 나무를 사랑한다지만 숲이 벌재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엘프목을 고사시키는 기생목들은 엘프들도 일정량 걷어냈다.
엘프의 숲은 비옥해서 기생목들도 끈질겼다.
“반가운 일이군. 기생목은 우리 숲의 오랜 골치라오. 그렇다면 기생목을 없애 주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시오?”
“떼어 낸 기생목 자체가 제가 받는 대가입니다. 여러분의 숲에 들여보내 주시고 기생목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주시면 되지요.”
“정말 이런 걸로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고 숲에 초대해 주신 것으로 마음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처분할 것. 자작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작 인간의 몫이오. 더 바라는 것을 말하시오.”
“기생목이나 잡목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한 님은 다른 나무들도 벌목이 가능하십니다.”
엘프들이 권하자 한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은 지도를 꺼내 펼쳤다.
“저는 이 공지를 영지로 받았습니다. 현재 제 영지민들은 이곳에 임시 요새를 세우고 머물러 있으며, 제 첫 도시는 이 지점이 될 것입니다.”
한은 오리발 베이스캠프에서 북으로 훨씬 올라간 지점을 가리켰다.
엘프의 숲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숲에서부터 흘러내린 큰 강이 있어서 사막화가 덜 되어 있고 잡풀이 자라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여러분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웃에 거처를 삼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엘프들은 영토 욕심이 없었다.
다만 부족과 숲에 해를 끼치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방어하기도 했다.
엘프들이 숲 주위를 정찰 다니며 몬스터와 인간을 경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작 인간이 우리의 이웃이 된다면 환영이오. 마침 그 부근에도 고대 요정의 고리가 있으니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구려. 하지만 이 지역은 세계수의 힘도 닿기 힘들 정도로 척박한 지대라 어려울 것이오. 고대의 종말을 불러온 마도 전쟁의 탓에 세계수는 간신히 우리의 숲을 보존하는 데에 그쳤소.”
공지의 사막화는 어마어마한 마법 전쟁의 결과였다.
원래는 세계수 주변이라 풍성하고 기름진 농지였는데, 지기(地氣)를 잃고 고열, 고압에 지표가 녹아 압축되어 단단하게 뭉친 바위와 자갈이 되어 버렸다.
고대 마법은 살상력과 위력이 대단하지만 자연의 힘을 극도로 억누르는 부작용이 있어서, 공지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그나마 오랜 세월이 지나 잡초와 관목이라도 일부 뿌리내렸다. 땅이 서서히 회복되는 조짐이었다.
“저에게 농사 짓는 기술이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서 얘긴데, 이 숲에서 초목의 씨앗과 약초를 채취하고 싶습니다. 제가 채집하면 식물의 회복 속도도 몇 배 빨라져 얼마 안 가 원상복구되니 허락을 바랍니다.”
“그 정도는 우리 일족도 원래 하는 일이오. 꼭 필요한 만큼만 얻는 우리 일족과 달리 인간은 저장을 하려고 많이 모으는 것 또한 알고 있소.”
“제가 손이 커서 다량으로 합니다. 곧 복구될 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한은 신신당부했다.
한은 마을의 엘프들과 우호도가 높아서 지역 정보가 자세히 뜨니 지도만 봐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길 안내를 맡은 엘프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를 좋은 얼굴로 엘프들이 가꾼 약초밭으로 안내한 엘프들은 한이 왜 미안한 얼굴로 양해를 구했는지 순식간에 증발하는 약초 무더기를 보며 알게 되었다.
원래 창백한 엘프들은 더 창백해졌지만 한을 믿기에 막지 않았다.
한은 엘프들과 동행하며 자세한 정보를 얻으며 불필요한 오해가 애초에 싹 틔울 여지를 없앴다.
한은 거침없이 괭이를 휘둘러 지나가는 구역의 모든 기생목들을 깔끔하게 수거했다.
“꾸준히 와서 기생목을 걷어 가겠습니다.”
기생목 역시 회복이 빠르겠지만, 어린 기생목일 때는 가늘고 약해서 나무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한은 엘프들이 바리바리 날라 준 세계수의 낙엽을 감사히 받아 들고 요정의 고리를 통해 오리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 * *

딩동댕동∼
새벽부터 공터에서 실로폰 소리가 울렸다. 천막에서 사람들이 졸려서 눈을 비비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공터로 모였다.
광장에는 징과 커다란 쇠막대기를 엮어 늘어뜨린 대형 실로폰이 있었다. 실로폰은 무지개 색으로 칠해진 위에 1부터 8까지 숫자와 CDEFGABC에 대응하는 벨로타 알파벳이 쓰여 있었다. 겉모습은 어린이 실로폰의 조악한 확장판이었다. 그래도 음정은 정확했다.
한이 영지민들에게 음계 교육을 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 절대음감을 훈련시키고자 만든 정밀한 실로폰이었다. 녹슬지 않고 더위와 추위에도 음에 변화가 거의 없는 고급품이었다.
징과 실로폰은 용도에 따라 신호를 구별해 썼다. ‘도미솔도’로 올라가는 실로폰 음은 기상 신호였다. 이장 이하 줄반장들은 날이 밝으면 번갈아가며 각 공터로 가서 실로폰 옆에 끈으로 묶여 있는 쇠채를 들고 ‘도미솔도’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처음에 실로폰 연주를 어려워했다. 그러나 이장 이하 줄반장들은 필사적이었기에 한이 나눠 준 악보를 보고 실로폰의 숫자를 외워 빠른 시일 안에 정해진 음악 신호를 모두 익혔다.
“건강 체조, 시작! 하나, 둘, 셋, 넷…….”
오리발 베이스캠프의 아침은 건강 체조로 시작했다.
한이 바드 둘과 상의해서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
한은 소왕국 카르텐의 수도에서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바드에게서 노래란 노래는 모두 청해 듣고 심각성을 깨달았다.
음유시인들이 흥얼거리는 서사시 외에 변변한 노래가 없는 카테르니아 대륙의 인간들이었다.
자장가 역시 빨리 잠이 안 들어서 어른을 고생시키는 아이들을 향한 원망과 일찍 안 자면 몬스터가 물어 간다는 둥 협박이 주가 되는 무시무시한 내용 일색이었다.
‘알파벳 노래만 줄창 불러대는 이유가 있었어.’
한은 음악에 소질이 보이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매일 수차례 울려 퍼지는 실로폰 소리를 듣고 알파벳 노래를 부르며 개발된 재능이었다.
한은 아이들에게 인벤토리에 저장되어 있던 싱싱한 마를 쥐어주며 동요를 가르쳤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맛동방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공부하러 갑니다. 공부가 뭐지?”
동요라고는 하지만 어른들에게 전파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에이, 비이!”
“삼촌!”
에이와 비이는 삼촌에게 달려갔다.
땀을 흘리며 활짝 웃고 있는 삼촌 알프가 두 조카를 양팔에 번쩍 들어 올렸다.
“또 삼촌이 이겼어요!”
“모두가 함께 이겼지.”
알프는 겸손하게 말했다. 축구 시합에서 승리한 까닭은 그가 잘 리드했기 때문임을 팀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연습공을 닦고 있던 그렉이 ‘크흑!’하고 울분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렉이 줄반장을 맡고 있을 때는 시합에서 내리 졌다.
개발[犬足]인 그렉이 줄반장의 위세를 업고 공격수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평판과 실력이 나쁜 일부 통반장이 교체가 되었는데, 그렉 역시 잘려 나가고 에이와 비이의 삼촌이 줄반장이 되었다.
덕분에 에이와 비이는 더 이상 그렉의 자식인 론과 캐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살판이 났다.
알프는 우승 상품을 들고 같은 팀원들에게 갔다. 알프는 상품을 노예들에게도 똑같이 배분했다.
영주는 토너먼트 방식의 축구 시합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팀원을 짤 때, 평민조와 노예조를 섞게 했다.
짧게 주어진 연습 기간에는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었으나, 노예 팀원들의 체력이 월등하니, 시합의 승리를 위해 그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많아졌다.
연습 시합으로 승패를 겪으면서, 또 본시합에서 편을 갈라 응원하면서 노예, 평민 가릴 것 없이 서로 응원, 격려하게 되었다.
일부 노예는 언어가 달라 노예들이 통역해 주지 않으면 말이 잘 안 통해 불편함도 있었지만, 몸으로 부딪치는 운동 경기의 특성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갓 보급되어 기본적인 룰만 알려 준 축구 시합이었다.
작전이고 지시고 없이 골키퍼까지 포함해서 무작정 공을 향해 달리는 개 떼 축구였다.
기약 없는 노예 생활로 무기력해 있던 일부 노예들은 경기에서 활약하면서 팀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으로 잊고 있었던 자유민 시절의 자신감을 조금 되찾았다.
평민과 노예 사이의 거리감과 적대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축구 시합을 마치면 장기 자랑 시간이 열렸다.
이 역시 영주의 후원으로 푸짐한 상품이 걸렸다.
주로 마, 고구마, 당근 같은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채소들이어서, 건량에 질린 주민들이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얼마 전 배운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 곁눈질로 배운 무희들의 춤과 광대들의 재주 같은, 서툴지만 사람들이 그 실수를 보며 폭소를 자아내는 정감 있는 재주꾼들이 대거 등장해 도토리 키 재는 실력을 겨루었다. 고만고만한 음치들이 꽥꽥거리면 야유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웃음을 잃었던 주민들은 이제 가족과 동료를 보며 자연스럽게 웃음 짓고 인사를 나누는 여유를 찾았다.
일종의 축제 기간이었다. 대륙에서 열리는 축제는 잔혹한 내용이 포함되는 카니발이 대부분이었는데, 즐겁고 경쾌하면서도 건전해서 뒤끝이 상쾌한 축제였다.
영주는 이동하기 전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땅을 개간이라도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 건지 걱정도 되었지만, 한이 무슨 지시를 내리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새 주인님이 망하더라도 끝까지 따라가겠다.’
집사 케인과 시녀장 안나는 결심을 했다.

* * *

소왕국 카르텐의 왕궁.
궁의 심처에서 왕비 멜린다가 어린 왕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보고를 들었다.
“글라시오 제국에서는 누비오드 제국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역시 왕비님의 혜안이 옳았습니다. 누비오드가 글라시오가 지원하는 변경의 소도시를 침범해 도발하자, 글라시오는 누비오드 측의 도시를 먹는 것으로 대응하고 긴장 상태가 유지되더군요.”
멜린다 왕비는 나른하게 내리뜬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외부의 우환이 사라졌으니 내부 정리를 할 때가 된 게지.”
“그렇다면 안전벨트가 사라지는 것입니까?”
두 강대한 제국의 사이에 끼어 있는 소국들과 도시들이 오랫동안 완충 지대 역할을 해 왔다. 이따금 도발적인 침범을 당하기도 하면서.
이들을 안전벨트라고 불렀다.
“그렇지는 않아. 노른자위만 점거하면 대충 화해하는 형식으로 용무는 끝날 테지.”
멜린다가 흥미를 잃은 얼굴로 하품을 했다.
“그보다는 우리 왕국의 일을 알려 줘요. 카니오 경.”
젊은 백작 카니오는 왕비를 향한 흠모의 빛을 숨기지 않았다.
“지시하신 대로 저번 오시오 상단의 실책을 줄라스 상단이 주워서 해결하도록 손을 썼습니다.”
줄라스 상단은 카닌 백작이 뒷배였다. 카닌 백작은 현 왕의 후견인이자 장인이었다.
줄라스 상단도 왕국의 큰 상단이었는데 오시오 상단보다 훨씬 우아한 방식을 취했기에 겉으로 드러난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복안이 있으시겠지만, 테트라스 공작 일파를 왕비 전하께서 직접 건드리는 것은 그들을 자극하지 않을까요?”
“미끼를 던져 큰 사냥을 할 작정이오. 사냥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아직 준비가 미흡하지. 다만 큰 살점을 뜯어낸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오.”
“어지간한 미끼에는 현혹되지 않을 자들입니다. 미끼라 하시면…….”
“우리와 연관이 없어서 의심을 사지 않으며 삼켜도 뒤탈이 없이 그들을 덤벼들게 만들 미끼가 있지. 성녀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지 않았소?”
“과연! 그렇군요.”
카니오 백작과 멜린다 왕비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 * *

마계(魔界).
어둠이 깔린 음산한 제1마왕의 마왕성에 8마왕이 논의를 위해 모여 있었다.
“마왕인 우리가 고작 이런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다니!”
“논의할 게 뭐 있나? 마신께서 금지하신 일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처형해야지.”
얼마 전 취임한 제9마왕 테라톨은 젊고 혈기가 넘쳐서 큰 사고를 쳤다.
마신(魔神)이 마왕(魔王)들에게 중간계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그것을 어긴 것이다.
“문제는 테라톨 녀석이 우리가 전부 덤벼도 간신히 잡아만 놓을 정도로 강하다는 점이다. 갓 태어나 생명력도 넘치니 도무지 그 녀석을 처형할 수 없어.”
마왕들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마족들의 수장인 마왕으로서 자신들의 약함을 일깨워 주는 존재란 결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을 우리 손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 작자… 아니, 그분이 강림하시지 않겠나?”
우거지상이 죽상으로 바뀌었다.
마족과 몬스터들을 다스리는 12대신 하이데스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처벌은 즐기면서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모인 이유는 뭔가? 설마, 방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은…….”
“어쩔 수 없어.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봐!”
“그렇긴 하지만, 정말로 봉인을 깨야 하는가?”
마왕들은 일제히 얼굴이 썩은 표정이 되었다.
그들이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한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봐들,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그 봉인이라는 것도 그… 가 스스로 눈을 감지 않았다면 먹혀들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 는 이미 눈을 떠서 이런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일세.”
마왕들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도 그… 에게 구걸하기는 싫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비아냥거리거나 자존심을 구기며 밑바닥까지 굴리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지 않은가? 그… 는 어차피 자의식이 없는 존재일세. 생각해 보면 그저 우리가 쓸 수 있는 도구와도 같은 존재야. 몇 백 년 동안 마신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마왕들은 억지로 쓰린 마음을 달래 가며 동의했다.
8명의 마왕은 마계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마계의 중심은 거대한 동공이었다.
단 하나의 거대한 문만 떠 있을 뿐이었다.
마왕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문 앞에 도열했다.
“계십니까?”
제1마왕 리튬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흠흠, 아직 주무시는지요?”
“혹시 들리신다면, 이번에 제9마왕 테라톨이 마신의 명을 어기고 중간계에 개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9마왕을 처형해야 하는데 힘을 보태 주십사…….”
“…….”
8명의 마왕들은 한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적 속에 제9마왕 테라톨의 권좌가 비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8명의 마왕이 힘을 합쳐도 당해내지 못하는 젊고 팔팔한 마왕 테라톨이 기척도 없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그,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계속 조용히 주무시… 잠을 방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마왕들은 식은땀을 감추며 재빨리 각자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제9마왕의 자리가 비었으니 한동안 마계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문과 정적만이 남아 있는 곳.
마계에 다스릴 권역이 따로 주어지지 않은 그저 ‘마왕’이라고 불리는 태초의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