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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7. 오리발 베이스캠프
한은 토목, 건축 기술을 남들보다 빠르게 익히거나 재능이 발견된 사람들을 추려 작업반장으로 삼았다.
“바론.”
“예.”
“자네가 공병대장 겸 공사 책임자를 맡게.”
바론이 눈을 빛내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막중한 책임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론(영지민)
나이 : 35
직업 : 공사 책임자. 공병 대장
요약 : 나무꾼이었던 그는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유랑하다 한 자작령의 영민이 되었다. 특기 사항으로 토목, 건축 분야에 탁월한 재능이 발견되었다.
한은 바론과 작업 반장들을 불러 설계도 복사본을 나눠 주고 설계도를 읽는 법과 기초 표시를 가르쳤다.
바론은 문자 터득은 늦었으나 신기하게도 공사와 관련된 사항은 쏙쏙 이해했다.
아무리 복잡한 설계도라도 직관적으로 청사진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나무꾼으로 나뭇단을 팔러 다니던 도시와 마을들에서 본 건축물의 모습이긴 했지만, 어차피 한이 선택한 디자인은 카테르니아의 일반적인 건물을 기초로 했으니,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은 공사의 작업 목표를 알려 주었다.
“먼저 알아 둘 것은 이곳이 우리의 임시 거주지라는 점이다. 나중에는 이곳이 경유지 겸 물자 보급을 담당할 전진 기지가 되겠지만, 지금은 보름간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고 우리의 도시로 나아갈 힘을 기를 베이스캠프가 된다.”
매일 영양제와 피로 회복제를 먹이고 있지만 아사 직전에서 탈출한 난민들을 데리고 온 한 달의 여정은, 탈진하지 않도록 약해진 자들을 수레에 태워 가더라도 여태 사고가 없는 게 기적에 가까웠다.
“이곳의 이름은 「오리발」. 우리들은 오리발에 터를 닦고 목책으로 요새를 세운다. 질문 있나?”
“「오리발」이라. 어감이 좋군요. 무슨 뜻입니까?”
기록을 하던 토리오가 물었다.
“내 고향의 언어다. 오리발이라는 뜻이지. 베이스캠프 옆에 오리발 모양의 바위 구릉이 있더군.”
“애써 지은 후에 사람들이 떠나면 도로 몬스터들이 몰려오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 마라. 방법이 있으니까.”
한은 마족의 신이자 몬스터들을 다스리는 12대신 하이데스의 성물을 요새 목책 곳곳에 걸어 둘 작정이었다.
몬스터들이 다가와도 인간의 건물이라고 적대감을 갖고 부수지 않고, 친밀감과 위엄을 느끼며 피해 가도록.
요새 안에 인간의 기척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몬스터들은 조용히 물러설 것이다.
또한 인적이 없는 요새가 1년간 허물어지지 않도록 영주의 표식을 새겨 둘 예정이었다.
“현장으로 가자.”
한은 작업반장들에게 세부 설계도를 나눠 준 뒤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작업 현장에는 조 편성된 공병대가 열 맞춰 대기 중이었다.
영지민 인구에서 장정의 절반이었다. 장정들은 2교대로 오전 오후로 나눠 투입하기로 했다.
한은 열댓 명인 반장의 수에 맞춰 작업 조들을 큰 꾸러미로 묶었다.
‘아직 작업반장들의 레벨이 낮으니 내가 직접 작업 지시를 내려야겠군. 그나마 이들이 내 작업 지시 명령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토목 건축 스킬이 늘어서 다행이지.’
“제임스, 짐, 존.”
“예.”
“너희가 주거지를 담당한다. 작업조들과 함께 위치로 간다. 위치는 일단 내가 표시해 주겠다.”
‘작업 지시. 대상은 제임스, 짐, 존과 그들의 조원들. 지점은…….’
“헛!”
“마법이다!”
한순간 동요가 일었다.
제임스, 짐, 존과 그들이 맡은 조원들의 눈앞에 간략한 작업 설명이 벨로타 문자로 떴다.
노랗고 굵은 화살표가 눈에 띄었다.
화살표를 따라 몸을 돌리자 함께 이동한 화살표는 작업자들에게 이동 방향을 알려 주었다.
또한 설계도에 맞춰 작업 장소에 색색으로 어떤 일을 할지 표시가 되었다.
삽질을 할 곳은 붉은색 줄, 다지기를 할 곳은 푸른색 줄로 표시되는 식이었다.
“이동 방향은 노란 화살표, 작업은 붉은색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작업반장들이 작업 분량을 나눠 주면 각자에게 해당하는 곳만 표시가 될 것이다.”
작업의 종류는 글자와 함께 도구를 아이콘으로 만든 간단한 그림으로 표시가 되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땅을 파고, 다지고, 한이 구워 놓은 벽돌을 쌓아 벽을 세우고, 지붕을 짜 올리고, 길을 닦고, 물길을 내고, 하수도를 파고, 목책을 세우는 일이었다.
어차피 복잡한 작업은 시켜도 못할 수준이라, 가장 기초적인 작업들만 할당했다.
한은 작업반장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각자 구역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지만 이세계의 장인인 한이 쓰는 특수한 마법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반장들이 설계 도구 사용에 능숙해지고 레벨이 오르면, 세부 설계도만 줘도 직접 읽고 작업 지시가 가능하겠지. 이들을 지휘하는 바론도 감독 능력이 향상되면 설계도만 줘도… 아직은 요원한 일인가.’
「드래곤 쇼크」를 할 때는 영지민들이 어느 정도 실무 경험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쭉정이를 던져 줘서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베태랑인 그들에게서 오히려 한이 작업 요령을 배우기도 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지. 이 세계의 전체적인 기술 전파가 그만큼 늦되거나 전쟁으로 인해 기술과 문화가 형편없이 쇠퇴했다는 뜻이니, 나와 영지민들에게는 유리한 일이다.’
이런 공지에 던져져 호랑이 굴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은 긍정적인 점들을 짚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안단테와 포르테는 심한 견제와 주위 귀족들의 통제에 가까운 간섭에 시달리며 컸다. 그런 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이지.’
“힌덴 경.”
“예.”
“주변을 둘러보고 오세. 내 기마술이 떨어지니, 자네 말에 얻어 타고 싶네.”
“알겠습니다.”
기사 힌덴은 용병 10명을 뽑아 한과 함께 정찰에 나섰다.
‘지도 그리기.’
한은 지도 작성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지도 작성 창이 떴다.
그냥 생각 없이 다녀도 지나간 곳은 대강의 지도가 저장되지만, 독서처럼 주의를 집중하면 더 세부적이고 정확한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에 자원까지 함께 표시되니 나중에 별도로 자원 탐색을 하는 시간이 줄었다.
‘저기는 기암괴석들이 많군. 지명은 한 자작령―오리발 베이스 캠프―기암괴석―587,905―257,111로 하자.’
명칭이 없는 지역은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붙였다.
한은 대개 ‘국가(소속)명―지역, 지방―특색―좌표’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좌표 숫자를 덧붙인 것은 같은 이름의 지형끼리 중복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 *
“빨리 빨리 서둘러! 이 굼벵이들아! 우리 줄이 제일 늦으면 내 체면이 뭐가 돼?”
줄반장 그렉이 신경질을 부리며 재촉했다.
“그렉 아저씨는 매일 빨리빨리래.”
“쉿, 또 꿀밤 맞을라.”
12살인 에이와 8살인 동생 비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삼촌이 천막 치는 일을 도왔다.
남자 어른들은 이틀간 공사를 한다며 한나절씩 나가 있었다.
오늘은 주거지가 다 다져졌다고 천막을 요새 안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 했다. 나머지는 삼촌이 알아서 할 테니 나가서 놀으렴. 점심때까지는 돌아와라.”
“와아!”
에이와 비이는 삼촌이 공사장에서 주워온 부스러기 나무토막을 깎아 만들어 준 장난감 칼을 들고 뛰어나갔다.
“형, 나도 용사해 보고 싶어. 마왕의 졸개 싫어. 허구한 날 론과 캐쉬만 용사하고, 불공평해!”
“론과 캐쉬는 그렉 아저씨네 애들이잖아. 오늘은 왕국군 병사를 시켜달라고 말해 볼게.”
에이는 칭얼거리는 비이를 달래며 아이들이 모이는 공터로 갔다.
에이는 거들먹거리는 론과 캐쉬에게 구걸하듯이 부탁해서 3일간 말태우기를 약속하고 동생과 왕국군이 되었다.
“밥 먹어라! 지미!”
“데이지, 얼른 와서 손 씻어!”
식사 시간이 되자 어른들이 부르는 외침과 함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에이와 비이도 삼촌에게 갔다.
물동이에 손을 담갔다 빼자 삼촌이 목에 걸린 수건을 건네주었다.
“허허, 녀석들. 손 씻기를 귀찮아 해서야.”
“쳇. 삼촌도 원래 손을 안 씻었잖아요.”
“크흠. 밥 먹으러 가자.”
시녀장 안나가 질색하며 더러운 영지민들을 씻긴 지 한 달이 넘었다.
안나는 귀족가의 시녀 중에서도 유난히 청결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세수는 하루에 한 번, 빨래와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은 해야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사막을 지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었지만, 우물이 있을 때는 달랐다.
그동안 안나의 깐깐한 청결 교육 덕분에 아이들은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었다.
안 그러면 안나의 수족 같은 요리사들이 배급하면서 나무랐기 때문이다.
변화에 적응이 빠른 애들보다 어른들이 더 씻기 귀찮아 했지만 밥 앞에 애, 어른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반장들이 나섰다.
여느 때처럼 영주의 지시 사항을 하달하고 줄반장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특이한 말을 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영주님께서 주거지가 갖춰진 기념으로 하사품을 내리셨다.”
줄반장들이 집집마다 하나씩 동그란 가죽 공을 나눠 주었다.
에이와 비이도 삼촌과 함께 정체불명의 가죽 공을 받았다.
“이거, 공이잖아?”
근처에서 빽 내지르는 환호성이 들렸다.
“나, 이거 알아. 공이야! 읍네 헨리네 패거리가 가지고 노는 거야.”
아이들은 돼지 오줌보에 공기를 불어 넣어 묶은 공으로 공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특이한 공이었다. 짙은색과 밝은색의 가죽을 오각형과 육각형으로 잘라 패치워크를 한, 축구공이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신이 났다.
공을 차며 주고받고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공터로 우르르 몰려갔다.
주거지 옆 공터에서는 작업반장들이 뚝딱뚝딱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공터에 그물망이 걸린 나무 뼈대, 즉, 축구 골대가 놓이고 근처에는 안전하게 잘 다듬어 코팅한 목재로 만든 그네와 시소, 미끄럼틀을 세웠다.
쭈뼛쭈뼛 다가간 아이들은 작업반장들이 시범을 보이며 부르자 열광적으로 뛰어갔다.
“와아아아아!”
점심 식사를 미루고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던 작업반장들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작업반장들은 한이 부려 놓은 목재와 못으로 벤치와 간소한 그늘막을 세웠다.
평행봉과 말뚝 같은 간단한 체육 시설도 설치할 계획이었다.
놀이터는 50호마다 하나씩 있는 공터에 모두 세워졌다.
“새참이다!”
고된 노동을 하는 노예들에게 작업반장들이 새참을 가져왔다.
평민과 농노들은 2교대로 일을 하지만, 노예들은 오전 오후 모두 일을 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줄어든 노동량이었다.
한은 신분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체력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평민들은 어린애나 노약자가 섞여 있었지만, 전쟁 노예들은 막노동에 쓰일 수 있을 만큼 젊고 튼튼한 편이었다.
병사나 부역을 하다가 전투에 져서 붙잡힌 자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노예들은 조별로 둘러앉아 빵과 맑은 국물을 먹었다.
개중 구석진 곳에서 뼈대가 반듯하고 체형이 잘 잡혀 있는 한 소년이 예리한 눈빛으로 새참을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아논 님.”
이웃 조에 섞여 있는 노예 티온이 다가와 물잔을 건넸다.
“말투를 조심하랬잖나?”
아논의 옆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팀이 핀잔을 주었다.
“경이라고 부르지 못하는데 우리끼리 있을 때는 이 정도는 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일반 노예병과는 약간 달랐다.
아논은 데인 공국의 백작 티어즈의 장자였는데, 숙부의 계략에 전장에서도 가장 치열한 접전지로 보내졌다.
귀족들은 포로가 되면 몸값을 내고 풀려나지만, 아논과 일행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장의 숙소까지 암살자를 보내는 숙부가 포로에 섞여 송환되는 아논을 살려둘 리 없었다.
운이 좋아 고국으로 돌아가도 집안을 장악한 숙부를 아논이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아논은 부모를 일찍 잃었다. 숙부의 독살이 의심되었지만 증거는 찾지 못했다.
다행히 아논의 부모가 키운 젊은 기사들은 아논을 충실히 보필해 주었다.
아논과 기사들은 전쟁 포로로 섞여 있다가 마물의 동란기에 혼란한 틈을 타 탈출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힘과 능력을 숨기고 굼띤 척했다.
잘 발달된 근육 때문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노예는 넘쳐 나고 매질을 당하면서도 비굴하게 굴어서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쩌다 보니 별 기술과 특징이 없는 노예들을 차출하는 데에 끌려갔다.
한 자작에게 주어진 노예들이었다.
“에밀이 불돼지 커크를 꺾고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
“처음에는 가던 중에 탈출할 길을 찾았지만, 이대로 노예들을 수중에 넣으면…….”
전쟁을 치른 젊은 병사 2천.
땅이나 파던 일반 평민과 농노들에 비하면 막강한 전력이었다.
반란을 모색하는 노예들이었다.
“신기하군.”
“예?”
“그 공 말일세. 축구공이라고 하던가?”
“제 걸 쓰십시오.”
“아닙니다. 제 걸…….”
“제 것도 있습니다.”
아논은 충정심에 불타는 기사들이 바치는 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신기하지요. 궁성에서도 이런 물건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 뜯어 보니 속에 노끈과 헝겊으로 튼튼하게 엮어 놓았더군요. 공의 무게가 치우침이 없이 고르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공을 농노들과 노예들에게까지 아낌없이 줬어. 나라면 과연 재물이 넘쳐 나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리석은 자비심입니다.”
“맹목적인 자비심만으로 영지를 몰락시키는 군주는 형편없는 군주입니다.”
기사들은 앞 다투어 한을 성토했다.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야. 흥미로운 영주라고 생각했네. 고국에서도 원래 남작이었다더군. 이런 자가 있었다니…….”
아논은 튼튼하게 세워진 목책을 손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8. 엘프
“오늘쯤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한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연락용 매를 부리십니까?”
“매는 아닐세.”
한은 롤랑과 힌덴의 호위를 번갈아 받으며 다녔다.
이날은 힌덴의 차례였다.
지도 작성을 하러 다닌다던 한은 오리발에 도착한 지 닷새째부터 이상한 행동을 했다.
특정 장소로 힌덴이나 롤랑 한 사람만 데리고 갔다.
베이스캠프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장소였기 때문에, 기사들은 마지못해 용병들을 떼어 놓았다. 기사들은 몬스터를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수의 몬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한을 지키기 힘들어서 용병들을 데리고 다녔으니 큰 반대는 없었다.
한은 그곳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피리를 간간이 불었다.
6인치 길이의 알 수 없는 매끄러운 나뭇가지로 만든 피리였다.
특이하게도 피리에는 은백색의 잎사귀와 이제 갓 돋아나는 새순이 생생하게 매달려 있었다.
장식으로 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있었다.
휘릴릴릴리…….
―띠링! 세계수(世界樹)의 가지로 만든 피리를 불었습니다. 숲의 일족과 소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들이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한은 오리발 베이스 캠프 주위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요정의 고리를 발견했다.
신비하게 반짝거리는 빛들이 모인 고리였다.
일반적인 요정의 고리와는 달랐다.
정령사들이나 요정과 인연이 닿은 이들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고대 요정의 고리였다.
고대의 요정은 지금의 엘프와 비슷하게 생겼다.
고대 요정이 엘프와 요정으로 나뉜 것이다.
엘프와 요정은 조상인 고대 요정으로부터 각각 다른 유산을 물려받았다.
엘프들은 큰 키와 아름다운 외모, 긴 수명과 높은 지능 및 마법 지식을 가졌다.
요정들은 대체로 자그마한 몸집, 짧은 수명, 실체화되지 않는 몸,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 행복감, 요정의 이동 능력인 고리,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자연 현상들을 일으키는 힘을 받았다.
요정의 고리란 요정들이 원을 지어 춤을 추면 그 안에 갇힌 이를 포함해서 요정들이 한꺼번에 숲으로 이동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 요정의 고리는 달랐다.
고대 요정들이 만들어 놓은 요정의 고리는 일종의 종족 마법으로 발동되는 마법진이었다.
따라서 고대 요정의 피를 물려받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엘프들이 이용했다.
그렇더라도 고대 유적이나 마찬가지이고, 영토 욕심이 없는 요정들답게 고대에 번성했던 지역만 드물게 남아 있었다.
‘다른 세상이니까 많이 다를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드래곤 쇼크」를 닮아서 편하군.’
고리의 빛이 강해졌다.
“힌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게.”
“예?”
“절대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마. 나는 무사할 테니. 명령하기 전까지는 검을 뽑지 말게.”
빛의 고리가 확장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솨솨솨솨사…….
황무지에서 들릴 리 없는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가득 차더니 고리 주위로 늘씬늘씬한 8명의 미인들이 나타났다.
피부가 창백하고 귀가 길고 끝이 뾰족한 숲의 일족, 엘프였다.
긴 팔에 들린 활과 단검은 호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멈춰라, 인간족!”
개중에서도 우월한 미모를 뽐내는 남자 엘프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신성한 물건은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 감히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곳까지 나왔지?”
힌덴은 긴장해서 여차하면 뛰어들 작정으로 한에게 바싹 붙었다.
“나에게 활을 겨눈 엘프는 댁이 처음이야.”
“뭐?”
“아, 아니, 그저 대화를 청하기 위함이오. 숲의 일족.”
“인간족 따위가 감히!”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인간과 엘프의 사이는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고고한 엘프들을 간교한 수법으로 노예를 삼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자행하는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이 엘프와 종족 우호도가 최상이라도 인간족에 대한 경멸과 미움이 워낙 뿌리가 깊었다.
성난 엘프떼와 대치 상황에도 한은 주눅 들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은 피리를 잘 보이도록 천천히 들어 보였다.
“그렇소. 이는 신성한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피리. 세계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면 불지 못하지.”
“틀림없이 인간족답게 사이한 술법을 썼겠지!”
엘프들은 붉으락푸르락 말을 잇지 못했다.
한은 자신에게 활을 겨눈 남자 엘프를 바라보았다.
인물 정보가 거의 뜨지 않는 것을 보면 정신 저항 능력이 강한 수준 높은 엘프였다.
8명 무리의 우두머리가 틀림없었다.
“그대는 알겠지. 내가 어떤 인물인지. 안 그런가? 공정하고 정직한 숲의 일족이여.”
남자 엘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활을 거두었다.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군.”
“일리얀 님!”
일리얀은 마지못해 툭 내뱉었다.
“우리들 숲의 일족보다 더 숲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다.”
한은 자연친화가 극상이었다.
엘프에 대한 종족 우호와 친밀도도 최상이었다.
같은 엘프끼리도 한 정도는 아닐 것이다.
적대감이 높은 카테르니아의 엘프들도 두세 명은 몽롱하게 얼굴이 풀릴 정도였으니까.
“고리를 보는 인간, 무슨 일로 우리를 불렀지?”
“우선 양해를 구하지. 내가 받은 피리는 이 세계의 나무가 아니오.”
“뭣?”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가던 엘프들의 얼굴이 굳었다.
세계수는 중간계에 오로지 하나 있을 뿐이다.
엘프들은 세계수에서 태어나 그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놀랄 필요 없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의 신의 부름을 받고 넘어왔으니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사악한 의도는 갖고 있지 않소. 내가 만난 세계수는 내가 태어난 세계의 나무라오.”
가뜩이나 불쾌감이 남아 있던 일리얀은 미심쩍은 얼굴로 한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나를 현혹하려고…….”
일리얀의 얼굴에 떠오른 의구심이 짙어지면서 활시위가 다시 당겨졌다.
“멈춰라, 일리얀!”
빛의 고리가 빙그르르 회전을 한다 싶더니, 고리 안에서 세 명의 엘프가 튀어나왔다.
“아버지.”
“족장님.”
“네 녀석은 차기 족장이라는 아이가 이리 성정이 불같아서야.”
늙지 않는 엘프이니 외모는 젊지만, 연륜의 원숙함이 묻어 있는 장년 엘프들이었다.
일리얀과 많이 닮은 엘프의 족장은 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젊은 아이들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겠소, 인간족. 숲의 일족은 손님을 환영하는 바이오.”
“괜찮습니다. 손님이라면 저를 숲으로 초대해 주시는 겁니까?”
“초대를 받아 준다면 고맙겠소.”
“아버지!”
“단, 옆의 인간족은 아직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니 초대하지 못함을 양해 바라오.”
한은 힌덴을 보며 말했다.
“힌덴,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게. 나는 엘프의 숲에 초대받았으니, 가는 길은 안전할 거야. 집사와 안나, 롤랑에게 내가 엘프의 숲에 초대받았음을 알리고, 나머지는 비밀로 하게.”
“한 님.”
“엘프는 신의를 지키는 숲의 일족. 인간과 달리 정직하고 믿을 수 있지.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기사와도 같아.”
족장이 말했다.
“걱정 마오. 인간족 기사. 우리의 손님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소.”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엘프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한은 엘프들과 함께 빛의 고리를 타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