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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6. 우물을 파다


“식수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음.”
집사 케인이 보고했다.
한은 개개인과 마차에 챙기는 식수를 며칠 분량만 준비하도록 했다.
여정에 방해가 될 것이라서였다.
케인은 한이 아공간에 식수를 담아 두었다고 여겼는지 군말없이 따랐다.
“우물을 파야겠군. 마차를 빨리 몰아서 공병대에 합류하게.”
“이 지역은 샘이 거의 없고 우물을 파기도 어렵습니다.”
강우량과 지하수는 충분하지만, 암반 지대가 많아 단기간에 우물을 파기 힘들었다.
“괜찮네.”
케인은 안 괜찮았지만 지금껏 한이 보여 준 모습이 있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공병대에 합류한 한은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힌덴과 용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갔다.
왕의 병사들은 후미를 지키고 있어서 한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자원 확인.’
한은 자원 지도를 불렀다.
미니맵에서도 주요 자원이 표시되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살피려고 3차원 지도를 불렀다.
약간의 검색 시간이 흐르고 지도가 뜨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지도와 연동되면서 자원 정보가 표시되었다.
한은 우물 예정지를 고른 뒤 지도를 일부 지역으로 국한시켰다.
‘미네랄이 풍부한 천연암반수이군. 석회가 적고 화강암이 많은 지역이라 따로 거를 필요는 없겠어.’
한은 장비창에서 해머와 끌을 불렀다.
‘자원 채취. 대상은…….’
한은 대량의 자원을 광역으로 한꺼번에 채취가 가능했다.
자원 채취 기술로 범위를 좁게 한정시켜서 우물을 파려는 것이었다.
“이, 이건?”
“마법?”
기사 힌덴이 뽑아 온 10명의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한 자작이 허공에서 팔을 움직여 해머와 끌을 잡은 뒤 땅바닥에 대고 가볍게 치는 시늉을 하자 바닥에 구멍이 뻥 뚫렸다.
놀랄 일은 더 있었다.
한은 장비를 바꾸고, 파낸 화강암과 들고 온 목재를 이용해 뚝딱뚝딱 우물을 지었다.
처음 올라온 흙탕물은 한이 몇 번 물을 쓸어 담아 우물 주위에 흘려보내자 수정처럼 맑아졌다.
한은 두레박으로 손수 퍼 올려 물을 마시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우물이다. 목이 마르면 마셔도 좋다. 깨끗하고 건강에도 좋은 물이야.”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목격하고 주저하는 용병들 사이로 기사 힌덴이 척 나서서 두레박을 받아 들었다.
“맛있군요.”
용병들도 물을 나눠 마시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최고입니다.”
“물맛이 끝내 줘요!”
그동안 돼지 오줌보에 보관된 물을 마시던 용병들은 갓 퍼 올린 신선한 물에 솔직한 찬사를 보냈다.
“하나 더 파지.”
한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말을 달렸다.
한이 새로 판 것은 우물이 아니었다.
넓은 연못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을 뚫었다.
한은 바닥의 커다란 구멍을 격자 모양으로 촘촘히 주조한 합금판으로 덮고 고정시켰다.
한이 연못에서 빠져나오자 솟아오른 물줄기가 느리게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작은 호수가 생길 참이었다.
한은 이를 흡족하게 바라보고 호숫가에 방금 채취한 집채만 한 화강암을 세웠다.
“흐… 하안 자자… 자작령?”
벨로타 어를 익힌 힌덴이 떠듬떠듬 읽어 내렸다.
한이 화강암에 새기는 것은 길 안내문이었다.
한 자작령과 근처 왕국들 방향을 화살표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한은 그 옆에 동서남북 방위 표시도 했다.
“오아시스는 야자 나무가 제격이지만 지금은 생략하지.”
한은 자생력 강한 몇 가지 식물의 씨앗과 바위 사막을 지나며 채집한 관목의 씨앗을 조금 뿌리는 것으로 기념 식수를 대신했다.
“놀랍습니다. 자작님은 마법사셨군요. 그것도 대마법사 말입니다. 아, 혹시 아티팩트(마법이 걸린 물품)를 쓰셨습니까?”
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으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물을 두고 굳이 호수를 만드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 정도 아티팩트라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을 텐데요.”
“우물은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쓰고, 이건 주변의 짐승들이 쓸 수 있지. 짐승도 인간도 서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으니까. 나중에 이 주변에 정착촌이라도 생기면 유용할 테고.”
“몬스터들이 물을 찾아 접근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호수를 길에서 멀리 만든 것이네. 우물에는 성물을 붙여 약한 몬스터를 쫓을 테고.”
한은 호수 가까이 천막을 치도록 했다.
사람들은 식수를 보충하거나 가축들의 목을 축였다.
용병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를 뒤늦게 전해 듣고 아차 싶었던 마법사들은 한이 움직일 때 동행하고 싶어 했으나, ‘가전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한의 말에 물러섰다.
마법사들끼리 기업 비밀을 서로 캐묻지 않는 게 기본적인 예의였다.
한이 마법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장인으로서 관련된 대단위 마법을 쓸 수 있는 용품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걸 비밀에 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 달의 여정이 걸려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카르텐 왕국에서 정착지로 추천한 장소였다.
과거 인간들이 공지(空地)에 진출하고자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십 년 전, 두 제국이 손잡고 개척을 시도했다. 기사와 마법사들을 동원해 어렵사리 나왔다.
인간들이 세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작은 장원 정도로 흙이 깔려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는 땅이었다.
그 사이에 우물이 막히지만 않았다면, 지리 정보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식수 보급이 가능해서 정착 시도에 유리한 장소였다.
인간이 떠난 뒤 불청객이 찾아 들었다. 방치된 우물은 황야에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불러 모았다.
정찰대가 둘러보고 와서 보고했다.
“오크와 트롤이 각기 30, 5마리 규모입니다. 다행히 부족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라 결집력이 약해 일반 오크보다는 약할 것입니다.”
오크는 부족을 중시하고 트롤은 부족 개념이 없이 따로 놀았다.
왕의 병사들을 끌고 온 채플린 경이 나섰다.
“용병들로는 무리일 테니 저희가 소탕하겠습니다.”
왕이 내준 병사들은 약하지 않았다. 공지에 떠돌아다니는 몬스터 정도는 쉽게 처리할 정도로 훈련된 수준 높은 병사들이었다.
떠돌이 몬스터들이 출몰할 때마다 사고 없이 해치웠다.
한은 롤랑과 힌덴이 수긍하자 대세에 따랐다.
“용병들이 경험이 부족하니 후방 지원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쓰십시오.”
한은 인벤토리에서 연고를 꺼냈다.
“약입니까?”
“흰약은 지혈제고 노란약은 항생제라 상처에 바르면 부패를 막아 줍니다. 갈색은 진통제이고… 이것은 소독약입니다.”
“오, 좋은 약들이군요.”
아무거나 대충 발라놓고 좋아할 기세였다.
기사마저 무식한데 더 무식한 병사들이 약효와 순서를 외울 리 없었다.
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약을 모두 큰 통에 담아 주걱으로 휘저었다.
걸쭉한 암갈색의 연고가 탄생했다.

―띠링!

종합 상처약 (연고)
―약효 : F급
―용법 : 상처에 바른다. 응급 외용제
―요약 : D급 소독약, 지혈제, 항생제, 진통제를 섞었다.
약효는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약병의 이름을 읽기 귀찮아 하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편리할 것이다.

“이건 무슨 약입니까?”
“상처에 바르는 약입니다. 먹어도 탈은 없습니다만 약효도 없고 맛이 매우 쓰니까 그냥 바르십시오.”
“오!”
기사와 병사들은 좋아했다.
한이 밀가루를 주며 같은 말을 해도 위약 효과를 볼 정도였다.
치료약은 고가였다.
신관의 치료는 어마어마한 고가여서 평민 일색인 병사들은 꿈도 못 꿨다.
신관과 마법사가 만드는 치료 물약은 갑절은 더 고가였다.
이름있는 치료사와 의원은 도도했다.
병사들의 처지로는 돌팔이들이 파는 약효는커녕 부작용만 잔뜩 있는 엉터리 약을 쓰고 탈이 났다.
한이 헤더 남작을 통해 사들였으리라 추측되는 연고는, 적어도 효과가 있는 물건일 테니 마음 놓고 기뻐했다.
‘인심 좋은 자작.’
‘곧 빈털터리가 될 테지.’
‘그래도 실력 있는 장인이니 살아서 돌아가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기사와 병사들은 한 자작을 무사히 호위해서 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다짐했다.
한은 탁자에 수북하게 가죽 목걸이를 쌓아 놓았다.
“이걸 전원 목에 거십시오, 롤랑 경. 용병들에게도 나눠 주십시오.”
“이 목걸이들은 부적인가요? 마르크 님의 문양이군요.”
12대신이자 전쟁신인 마르크의 문장이 돋을새김된 동전 크기의 나무 부조가 가죽 끈에 달린 목걸이였다.
“약간이나마 전투에서 가호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오! 마르크 신관의 축복이 걸려 있다면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은 싱긋 웃었다.
신관이 신성력으로 축복의 힘을 거는 수호부는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희미해졌다.
한이 병사들과 용병들에게 내어준 것은 수호부가 아니라, 도성에서 출발할 때 마르크의 대신관을 활용해 만든 성물(聖物)이었다.
성물은 파괴되지 않는 한 반영구적이었다.
몬스터의 무리가 컸지만 사기충천한 병사들은 큰 부상 없이 소탕했다.
몬스터와 짐승들이 어지럽힌 자리라 오염이 심했다.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긴 하지만 바람을 타고 냄새가 베이스캠프 쪽으로 전달되니 공병대를 투입해서 대충 정리를 시켰다. 간단히 잡목을 쌓아준 뒤, 지저분한 흔적들을 모아 불로 태우게 했다.
한은 몬스터들이 쓰던 우물을 보수했다. 깊이가 얕은 우물이라 짐승들이 와서 목을 축일 용도로 샘처럼 고이게 만들어 놨다. 샘 옆에 짐승들의 모습을 조각한 화강암 비를 세워 놓았다. 문자를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그림 설명서였다.
식수로 쓸 우물은 길가에 따로 팠다.

한은 길에서 가까운 곳에 거점을 지정했다.
“베이스캠프는 이곳을 기준으로 한다.”
한은 고용인들과 기사들, 통이장을 불러 모아 베이스캠프 설계도를 보여 주었다.
“여기에 요새를 세운다. 임시 정착촌을 보호할 간이 요새이지. 이 줄은 식수와 간이 하수 시설을 뜻한다. 여기는 주거 지역, 여기는 병영, 여기는 물자 보급 창고다.”
한이 임시 정착촌이라고는 말했지만, 사람들은 여기가 거점 마을이 될 거라고 여겼다.
일단 여기서 정착을 시도하다 보면 한 자작도 멀리 북으로 진출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접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주거지를 보고 요새의 크기를 판단했다.
“요새가 크군요. 이 빈터는 무엇입니까?”
“상업 지구… 시장이오.”
사람들은 침묵했다.
창고도 그렇고 시장 치고는 지나치게 컸지만, 요새 안의 빈터는 쓰임새가 다양했으므로 이견은 없었다.
요새를 세우다가 물자 부족을 절감하게 되면 자작이 알아서 멈추리라고 여겼다.
“오늘은 다들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내일부터 장정들은 주거 지역부터 시작해서 길 내기와 땅 고르기에 들어간다. 당분간 요새 건설에 총력을 기울인다. 부녀자와 아이들은 보조 업무를 담당한다.”
한은 반장들에게 공병대 조편성을 지시하고 회의를 마쳤다.
천막에서 나온 한은 힌덴의 호위를 받아 말을 타고 달렸다.
쿵!
쿠궁!
난데없는 굉음에 천막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왔다.
한이 달리다가 멈출 때마다 그 장소에 목재와 석재가 잔뜩 쌓이고 있었다.
목재는 헤더 남작을 통해 구입했고, 석재는 오는 길에 적당히 눈치 보며 쓱쓱 잘라 둔 양질의 화강암들이었다.
한은 설계도에 맞춰 자재가 필요한 장소에 로프 같은 부자재와 작업 도구들을 방수천막에 싸서 부려 놓았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 문제만 없다면 바람직한 일이지.’
한의 물자 대공세에, 설계도를 보고 허황되다 여겼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용병들을 통제하던 롤랑마저 평소의 진중한 태도를 잊고 입을 벌릴 정도였다.
한을 따라다니는 힌덴은 정신이 없었다.
‘그냥 계획일 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만들 셈이었어. 이 영주.’
한이 출발 전에 미리 고용인들―집사, 시녀장, 두 기사―을 불러 놓고 몇 장의 설계도를 보여 주긴 했지만, 간략한 설명을 대충 들어 넘겼었는데 그걸 실행에 옮길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설마 그때 본 설계도대로 전부 만들 작정인 건가?’
힌덴은 오싹할 지경이었다.
동시에 이 미친듯이 배포만 큰 영주가 갑자기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설픈 물렁이인 줄 알았는데…….’
힌덴은 큭큭거리며 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야 섬길 만한 주인을 찾았는지도 모르지.’
정신없이 설계도를 따라 달리던 한은 어디선가 다가오는 뜨거운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으음…….’
띠링 울리는 효과음이 아련했다.
‘머지않아 기사를 얻는 건가?’
주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기사는 천군만마보다 든든한 존재였다.
그래도 지척에서 부리부리한 눈길을 받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