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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식사 대열을 마쳤습니다.”
5명의 이장과 1명의 통장이 말을 타고 달려와 보고했다.
한은 오는 동안 그들에게 틈틈이 말타기를 훈련시켰다. 연락병으로 뽑은 민첩한 이들과 함께.
큰 기대는 안 했으나 6명의 이장, 통장들은 남들 다 자는 밤늦은 시간까지 결사적으로 승마 기술을 익혔다.
갑자기 떨어진 어마어마한 직책을 잃기 싫어서였다.
이장들을 힐끔거리며 언제든지 자신이 치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통반장들도 훈련에 도움을 줬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영주가 못 박은 이상, 공권력의 서열 구조에 나도 우리 동네에서는 한가락한다는 사내들이 야심을 불태웠다.
전란으로 식량이 부족한 다른 영지에서는 줘도 안 가질, 별 볼일 없는 평민들이었다.
힘세고 건장하다 나선들 도토리 키 재기였다.
고만고만한 자들끼리 그러니 더욱 경쟁심이 촉발되었다.
‘동네 게으름뱅이 먹보였던 멍청이 찰리가 반장인데, 기회만 오면 나라고 왜 못할쏘냐!’
‘아놔, 어릴 때 나에게 안 처 맞으려고 굽실거리던 지미 녀석이 줄반장이라고 까부는 걸 보니 열불 터지는군.’
평생의 야심이라 봤자 마름이 되거나 손바닥만 한 땅을 가진 자영농이 되는 게 고작일 평민들의 성장 잠재력이 눈뜨는 순간이었다.
‘천재적인 분이시다.’
집사 케인은 한의 영지민 관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편, 요리사들이 내건 솥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자, 음식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며 사람들을 기대로 설레게 만들었다.
안나가 솥의 국물 맛을 보았다.
“제법 괜찮군.”
깐깐한 안나로부터 칭찬이 떨어지자 요리사들이 안심했다.
안나는 마지못한 듯 말했지만 실제로 꽤 흡족해했다.
영지민 중에서 뽑은 식사 담당들은 처음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요리는 많은 경험과 교육이 필요했다. 맛있는 음식과 다양한 재료를 맛 본 적 있어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줄도 알았다.
고향에서 가혹하게 수탈당하며 끽해야 오트밀과 희멀건 스튜, 검은 빵이 고작이었던 식단이었다. 흔한 허브 몇 가지를 써 본 사람들은 훌륭한 축에 속했다. 조미료는커녕 소금도 변변히 못 먹었으니, 그저 솥에다 물과 식량을 때려 넣고 푹푹 삶는 게 고작이었다.
보다 못한 안나가 아예 처음부터 솥마다 재료와 소금의 정량을 정해 주었지만, 단시일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안나와 샐리는 암담했지만 참았다. 영주의 음식은 직접 챙기고, 영지민들은 배만 부르면 만족 했으니까.
그런데 요리사들이 조리를 거듭할수록 실력이 빠르게 늘었다. 뱉지 못해 먹는다는 수준의 정체가 불분명한 걸쭉한 암죽이 점차 형체와 맑은 국물을 드러내더니, 지금 와서는 제법 예전 영주성의 하인과 가솔들이 먹던 수준까지 향상되었다.
안나는 샐리와 함께 나눠 맡은 빵과 고기 스튜를 맛보았다. 느낌 탓인지 자신과 샐리의 요리 실력도 월등히 향상된 것 같았다.
“최근의 낙은 식사 시간이라니까.”
기사들과 용병들이 희희낙락하는 걸 보면 느낌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은 탑쉐프, 요리 스킬도 마스터했다.
영주인 한의 지배하에 있거나 고용된 사람들은 그 영향을 받아 요리 실력의 상승도가 평소의 몇 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서너 번 조리에 동참하면 열 몇 번쯤 실습한 경험치를 쌓았다.
종류가 몇 안 되는 단순하고 쉬운 요리를 정확한 지시에 따라 수십 번 반복하면 숙달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식사로 배를 채워서 잠깐이지만 행복한 기분을 즐기는 영지민들 사이로, 한이 집사 케인과 기사 힌덴을 데리고 누비면서 반장들을 찾았다.
허허벌판에 정렬되어 있으니 구획별로 맞춰 다니면 되었다.
“노숙을 해야 하니 앞으로 천막을 쓴다. 천막의 사용법을 알려 줄 테니, 반장들은 줄반장들을 통해 호당 하나씩 보급하고 내 마차 앞에 모이도록. 1인 가정은 5명씩 모아서 한 천막을 쓴다.”
한은 인벤토리를 열어 6인용 천막 슬롯에서 오는 길에 만들어 뒀던 천막을 꺼내 부려 놓았다.
한이 아공간을 쓰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고, 국경을 넘었으니 양초뿐 아니라 다른 물건들도 저장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려져도 별 상관없었다.
아직까지 예산을 아끼지 않는 통 큰 영주의 인심에 혀를 내두르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자신들이 더 편하고 안전해졌으니 반발은 없었다.
사람들은 한이 헤더 상단을 통해 자금을 구했거나, 오는 길에 보급을 많이 받았으리라 추측했다.
막상 한이 쓴 비용은 얼마 안 되었다.
한은 잡목과 잡풀, 잡철광, 잡암석 등을 사들여 재료를 추출하고 직접 천막천과 뼈대를 만들어 조립했다.
자원 채취도 손수하면 빠르고 효율적이었지만 눈길을 끌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이군.’
한은 천막을 보며 그리움을 느꼈다.
이런 천막은 「드래곤 쇼크」에서 영지를 불하받은 초기에 이주민들을 데리고 가면서 만들었다.
대패질까지 하나하나 손수 했던―제조창을 통해 한꺼번에 대량으로 했지만―가벼우면서 튼튼한 천막 덕분에 안단테와 포르테의 이주민들은 낙오자 없이 영지에 무사히 도착했었다.
지역의 차이로 재료는 조금씩 달랐지만 주요 기능은 거의 비슷했다.
척박하고 황량한 자작령의 바위 사막에 대비를 해서 옵션을 더 많이 준 개량 천막이었다.
‘좀 무거워지긴 했지만, 원래 가진 짐보따리가 거의 없었으니 가지고 다닐 만하겠지.’
휴대성이 약간 떨어지는 대신 방풍과 보온 효과를 올렸다.
겉보기로는 칙칙한 휴대용 천막이었지만 가혹한 사막의 환경에 대비해서 가공 기술은 상당히 복잡했다.
“반장이 모두 모였습니다.”
통장 레드윅이 보고했다.
“좋아. 이 천막은 조립과 휴대가 가능하다. 천막을 설치하려면 보조 한 명의 도움을 받아…….”
한은 통장 이하 반장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함께 따라하기를 기다리며 자세하게 가르쳤다.
“조립과 해체에 넉넉히 30분씩 걸리니 감안하도록.”
한은 노예측 반장들을 돌아보았다.
“노예들의 사슬을 이 시간부로 모두 푼다.”
“예? 그러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전쟁 노예들은 발목에 느슨하게 쇠사슬을 묶어 두었는데, 풀어 준다면 통제가 어려울 게 뻔했다. 감시 인원이 훨씬 늘어나야 했다. 사고 우려도 많아졌다.
한은 반박 의견을 듣고도 결정을 밀어붙였다.
“이제부터 우리가 갈 곳은 인간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장소이다. 이런 길 없는 길을 통과하려면 쇠사슬로 묶어 두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또한 이는 노예들만의 일이 아니다. 이런 험지에서 우리들 전부가 무사하려면 모두 서로를 지키고 도와야 한다. 나는 영지민을 한 명도 잃고 싶지 않다.”
일반 평민들도 기회만 있으면 달아날 판국에 전쟁 노예들이 틈을 노리고 말썽을 일으키리라는 걱정을 일축했다.
“탈출 시도에 따른 처벌 수위는 평민의 갑절로 한다. 단, 영지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 늦어도 10년 이내에 전원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정은 큰 반발이 없었다.
전쟁 노예들은 주인에게 공을 세우거나 근면하게 일을 해서 해방이 되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빈번한 전쟁으로 대륙에서는 흔한 광경이기도 했다.
반장들은 각각 구역으로 돌아가 줄반장들에게 천막 사용법과 영주의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노예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쇠사슬을 풀어 홀가분해져서 반겼다. 일부는 오히려 다른 음모가 있지 않나 의심했다. 전쟁 통에 워낙 호되게 당해서였다.
“우리 영주님은 한없이 사람 좋고 물렁한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빈틈이 없으니 참 묘한 분이군요.”
기사 힌덴이 말하자 집사 케인은 조용히 웃음 지었다.
“내 주인 운은 나쁘지 않은 모양일세. 간적들에게 암살을 당하시긴 했지만 전 주인 멜라민 백작도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셨지.”
“하긴. 이런 상관이라면 섣부른 동정심의 대가로 전 재산을 다 털어먹고 도망가더라도 그 옆에서 함께 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 되니 말입니다.”

천막을 세운 뒤, 한은 작업 지시를 했다.
곡괭이와 망치, 쇠스랑을 나눠 주며 길 표시를 내라 했다.
“반장들이 공병대를 조직하도록.”
한은 직접 곡괭이를 들어 바닥을 찍었다. 자갈들 사이에 묻힌 곡괭이가 지표를 뒤집으며 빠져 나왔다.
“이렇게 바닥을 조금 다지면 된다. 완벽한 길을 만들 필요는 없고, 그저 오솔길 비슷한 길이 있는 흔적을 남기면 돼. 앞으로 이동할 때에도 길을 만들 사람들이 병사 일부와 함께 선두에 선다. 부역은 장정들 기준으로 피로하지 않을 만큼 돌아가며 한다. 중요한 것은 길이 있다는 흔적만 만드는 것이다.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도록.”
이해하기 힘든 영주의 지시였지만, 일단 지시대로 따랐다.
한은 오솔길을 다니며 품에서 작은 나무 팻말들을 꺼내 일정 거리마다 하나씩 꽂아 두었다.
그런 한의 모습을 왕의 병사들이 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마법사들도 수군거렸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끌려온 데다 이런 취급을 받느라 정신적 타격이 커서 혼란이 생긴 건 아닐지…….”
한은 묵묵히 길에 표지를 꽂는 작업을 계속 했다.
생산직 마이스터인 한이라도 모든 게 만능은 아니었다.
영지를 관리하려면 기반 시설이 있어야 했는데, 한이 명령한다고 다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도로를 내려면 우선 영지민들이 흙길을 만들어야 했다. 영지민들이 만든 작은 길은 사람들이 꾸준히 다녀서 쓰지 않으면 금방 지워지고 사라졌다. 한이 꽂는 표지판은, 그 길이 1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보존되도록 해 주는 보조 도구였다.
‘건축도 그렇지만 토목은 거대한 공사라 당장은 어렵지.’
그렇다고 그대로 지나치면 나중에 다시 길을 내는 작업을 해야 하니, 미리 가면서 해 두는 것이었다.
한은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일하느라 몸살 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토목 작업은 부가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남녀노소가 뒤섞여 가는 행렬은 사람마다 전진 속도가 달랐다.
배부르고 힘이 남아도는 사내들은 거친 행동을 보이기 쉬웠는데, 단순무식하게 힘을 빼주는 괭이질을 하면 신기할 정도로 잠잠해졌다. 적당한 노동이 신체와 정서에 적당한 만족감을 줬던 것이다. 또한…….

―한스(29세)의 토목 건축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토마스(33세)가 토목 건축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

‘예습 복습은 중요하지.’
가는 길에 예습을 시키고 도착하면 복습을 할 예정이었다.

* * *

네일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빈민가에서 겨울을 난 부랑아 소년이었다.
혹독한 겨울에 구걸과 소매치기로 간신히 2살 어린 동생 네드를 데리고 살아남았다.
올해 겨우 15살이 되었지만 어디에서도 고용해 주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내몰려 사지로 보내진다는 영웅의 행렬에 끼게 되었다.
네일과 네드는 성격 급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있어서 네드 형제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는 줄반장 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천막을 설치했다.
길이는 어른의 허리 길이, 굵은 통나무 크기였던 천막은 펼쳐서 조립해 보니 상당히 컸다. 어른들도 허리만 조금 구부리면 천막 안에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와아……!”
네일과 함께 천막으로 들어선 네드는 감탄했다. 바깥의 흉흉한 바람이 얇은 천막 안에서는 거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깨끗한 천막은 지붕의 천이 얇아서 햇볕이 온화하게 통과했다. 환하고 따뜻한 온기가 있는, 예전 고향 마을의 집이 부럽지 않은 그런 넓은 천막이었다.
“형, 이상한 그림이 있어.”
천막 벽에는 구불구불한 검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글자야.”
“글자와 숫자 같구나. 이건 1, 2, 3 이란다.”
숫자를 조금 읽을 줄 아는 줄반장 뮬 아저씨가 알려 주었다.
다음날 영주가 하달하겠지만, 천막에 그려진 무늬는 문자와 숫자들이었다.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가장 실용적이라고 한이 판단한 표음문자인 벨로타어였다.
영주는 벨로타 문자와 상인들이 많이 쓰는 간략한 로히스 숫자를 천막 안쪽에 그려 놓았다.
그리고 통장 이하 줄반장들은 영주의 지시에 식사 시간마다 문자와 숫자를 음율을 붙여 순서대로 암송해야 했다.
“자, 따라하도록. 아베세데 으에프줴…….”
“아베세데 으에프줴…….”
평생 땅만 파고 살아온 반장들은 머리에 쥐가 나는 걸 느끼면서 울상이 되어 영주를 따라 암기를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네일의 동생 네드가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아베세데 으에프줴∼ 아베세데 으에프줴∼ 형, 이 다음이 뭐지?”
“아슈이쥐까 엘르엠느엔느.”
“헤헤, 맨날 잊는다.”
줄반장들은 식사 후 휴식 시간에 사람들 앞에서 문자송과 숫자송을 불러야 했다. 음유시인들이 돌아다니며 보조해 주었다. 지겹게 듣게 되는 노래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무심코 흥얼거리는 유행가가 되었다.
얼마 안 지나서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문자를 서툴게 쓱싹거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흔하게 보였다.
영주인 한의 문화적 영향력은 강력했지만, 영지의 기반이 거의 없고, 영지민들이 워낙 일자무식인데다 척박한 재능으로 인해 문자의 습득은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힘이라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기사와 고용인들과 왕의 군대를 이끄는 채플린 경을 모아 놓고 한은 발표했다.
탁자 위에 지도가 펼쳐졌다.
“왕국에서 권유한 자작령의 첫 거점은 이곳이오. 하지만 그곳에는 임시 거점을 세우고 우리는 이 지점에 첫 도시를 열 것이오.”
한은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서 쭉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훨씬 북쪽을 가리켰다.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고용인들은 한의 기습 발표에 놀라기는 했지만 익숙해졌는지 그러려니 했다. 행정관 토리오는 울상이면서도 습관대로 회의록을 기록했다.
국왕이 보내 준 기사 채플린은 그다지 이견을 비추지 않았다. 군사작전을 펼 때도 현장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되곤 했다. 영지 내에서 거점 도시를 고르는 재량은 한의 몫이었다.
가장 크게 반발한 이들은 마법사들이었다. 특히 한이 요구한 일인용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 따라온 궁정 마법사가 적개심까지 내비칠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 궁정 마법사는 견습 마법사 2인 앞에서 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신뢰도가 형편없는 작자로군!”
궁정 마법사 티요른은 30대에 5서클에 이를 정도로 천재적이지만, 꽉 막힌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그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모호하거나 유동적인 것들에 질색했다.
5서클의 궁정 마법사 티요른은 숱이 적고 곱슬곱슬한 회색 머리카락만큼 고집이 센 인물이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5살에 우연히 마나 친화력이 마법사에게 발견되어 귀족가의 후원으로 마탑에 들어가 키워져 순조롭게 출세한 케이스였다.
그렇지만 그가 거점 도시를 바꾸는데 반대한 이유가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티요른은 마탑의 스승의 당부와 후원자인 귀족가를 통해 들어온 한 가지 의뢰를 받았다. 공지에서 마도 시대의 유물을 조사해 달라는.
거창한 의뢰는 아니었다. 왕국에서 권해 줬던 첫 거점지는 탐사를 위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준비가 없이 간단히 조사하기 편했다.
공지에 마도 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거의 정설이었다. 대륙의 인간들이 오랜 세월 헛된 꿈을 품고 공지를 조사해 본 결과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저 기왕 가는 김에 기존에 조사가 이루어지던 지역을 한 번 더 훑어달라는 간단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 부탁을 어기면 궁정 마법사 티요른의 위상이 흔들리고 명예에 흠집이 갔다. 깐깐한 남자 티요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굴욕이었다.
“임시 거점지에서 한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마탑에서 저에게 미리 연락을 했습니다. 티요른 경의 조사에 협조해 달라고요. 연구하시는데 지장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일정이나 내 의견 따위는 처음부터 존중할 의향이 없었잖소? 알아서 하시오.”
티요른은 한의 설명과 기사 채플린의 설득에 마지못해 내뱉었다. 그의 내면은 굴강(屈强)했으나, 평민에서 남작으로 성장하는 동안 익숙해진 처세를 위한 태도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했다. 마법사라기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운 그의 스승이 융통성 없는 티요른을 다그쳐서 그나마 궁정 생활에 상관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만들어 낸 성과였다. 티요른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두루뭉술한 태도가 몸에 밴 것이지만, 타인에게 유달리 엄격한 인간이 대개 그렇듯, 자신의 결점에는 관대했다.
‘네놈이 마탑과 척을 지고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자!’
티요른은 이를 갈았다.
사실 티요른 개인의 입장에서 성격이 맞지 않았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본다면 일정이 지체된다는 불편함과 공지에 깊숙이 다녀와야 한다는 두려움을 제외하곤 없었다. 더구나 거점지로 유리하다는 추천이었을 뿐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긴 여정에는 변수가 많이 따르는 게 당연하며 카테르니아 대륙의 사정이 현대 사회처럼 일정에 엄격하지도 않았다.
그것도 실질적으로 몬스터와 일선에서 싸워야 하는 채플린 경마저 한에게 동조하는데, 편하게 수레에 실려 가는 마법사들이 군말을 댈 일은 아니었다.
티요른은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대신 대인 관계의 논리력이나 추론력은 성격적인 결함 덕분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주위 환경에서 받아 온 압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서, 짓밟아도 뒤탈 없는 타인에게 쌓인 불만을 몰아서 해소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궁정 출입을 시작하고 마탑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뒤에는, 성격이 지나치게 밝거나 주위에서 사랑받는 총명한 어린 후배들을 나대서 거슬린다며 뒷공작으로 짓밟기도 했다. 물론 소리 소문 없이 꺾여 나간 새싹들은 모두 뒷배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티요른은 한을 무능하고 신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티요른은 일단 누구를 찍으면 절대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심지어 견습 마법사들에게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공지를 다녀와서 그의 의견은 마탑에 보고 될 예정인데, 혹여 철없는 어린 마법사들이 엉뚱한 보고를 해서 관심을 끄는 일은 없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