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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5화)
九. 그리고 오 년 후(3)
“너는 짐의 무기이자 뜻을 대리하여 황실의 명예를 획득할 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 이제부터 그대의 이름을 주 씨라고 하여 주천화라 부르리라!”
천화는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싫어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무를 수도 없다. 천화가 오체복지하며 대답했다.
“명심하겠나이다.”
“그래, 그럼 즐거웠노라. 주천화여. 가는 길을 붙잡아서 미안하구나.”
황제가 다시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았다. 다시금 황제는 그 자리로 돌아섰다.
천화와 대장군을 위해 남겨 둔 시간을 다 쓴 탓에 다시 업무를 하기 위해서였다. 천하의 주인이라는 지위에 걸맞은 업무를.
“황금향의 향주여, 수고하도록.”
오체복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화는 이 자상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이건 뭐랄까. 이 당부는 마치, 집 떠나 자신의 길을 찾는 아들에게 하듯이…….
“일어나라.”
혼란에 빠진 천화, 아니 주천화를 향해 대장군이 명령했다. 주천화가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라.”
감히 황제의 용안을 바라보는 일이 없도록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해 왔었다. 천화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 대장군을 따라가다가 감각을 극대화시켜서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옥좌에는 위엄을 풍기는 중년인이 있었다. 곤룡포를 입고 멋진 수염이 있고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쓴, 은근한 위력이 풍겨 나오는 중년의 남자.
……놀랍게도 어느 정도 자신을 닮은 것도 같았다.
주천화는 오싹한 오한이 들었다.
날씨가 추워서는 아닐 터였다.
목 뒤가 쑤셔왔다.
“아마도…… 그럴 거야.”
친어미인 요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흑옥루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여성, 제일 궁녀.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이는 이 천하에서도 단 두 명밖에 없다.
대학사.
‘그리고 황제!’
태어나서 처음 겪는 극한의 혼란스러움을 뇌에 품고 주천화가 궁궐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서자 다시금 정신이 돌아온다.
대장군이 등을 보인 채 걸음을 옮기다 걸음을 멈췄다. 주천화는 넘어질 뻔했다가 가까스로 자세를 잡고 대장군의 뒤에 섰다.
“너는 아무런 생각할 필요 없다.”
“아, 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은 잘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상을 주겠다.”
“상이라고요?”
주천화의 눈이 커졌다.
“의외인가?”
“아, 아닙니다.”
대장군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이윽고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건 대장군과는 그리 연이 없어 보일 것 같은 고풍스러운 장신구, 비녀였다.
근래의 비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의장에 그런 외양을 하고 있었다. 만들어질 때는 붙어 있었을 보석이 다 떨어져 나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양에 당(唐) 시대에, 그것도 매우 특정한 시기에 보이던 상감(象嵌)이 있던 탓이었다. 그 말인즉 저건 비녀의 본래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어떤 열쇠. 비밀에 닿게 하는 길.
“그것은……?”
“혈옥잠(血玉簪).”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름이었지만 들어 본 적이 없기에 주천화는 의문을 느꼈다. 대장군이 건넸다.
차가움이 느껴진다. 붉은색 옥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이 차갑고 건조한 느낌은 옥이 분명했다.
“그 물건에는 재밌는 비밀이 있다.”
“비밀이라면?”
“비밀이기에 여(余)의 입으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네가 이것의 비밀을 풀 수 있다면 네게 큰 도움이 되겠지.”
“아, 넵.”
“실마리는 주지. 이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의 보물이었다. 연인의 유품이었다고 한다.”
“그 연인은 당나라 사람이겠군요?”
“그래.”
대장군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평생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것에 담아 뒀다고 한다. 그것은 재화일 수도 있고 영약일수도 있고 무공일수도 있다. 아니, 영약은 아니리라.”
주천화는 당나라 시대에 이름을 알린 이를 떠올렸다. 무림의 고수는 무수히 많았지만 막상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남성이며 저 상감이 새겨질 때에 등장했던 인물. 그리고 돈과 영약과 무공 전부를 가지고 있을 자. 아니, 영약은 아니라던가?
“훗날 연이 닿는다면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못 잡겠지만 대장군이 하는 말이었다. 결코 허투일 리가 없다. 주천화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곤 혈옥잠을 품에 넣었다. 옥의 차가움이 잠깐 가슴을 떨게 했다.
十. 강호출도
황금향의 목표는 다섯 가지.
一, 무림의 현재 수준을 파악한다.
二, 황궁을 적대하는 세력을 조사한다.
三, 무림이 황궁에 가지는 생각을 파악한다.
四, 황궁에 위협이 될 만한 힘을 가진, 혹은 가지게 될 무림 방파를 혼란에 빠트린다.
五, 적대하는 세력, 무인에게 ‘그것’을 사용하여 황궁의 힘을 보여 준다.
갑자기 다섯 명의 후기지수가 나가면 누구라도 의심한다.
덕분에 빠른 이는 이 년 전에, 늦는 이도 반 년 정도 늦게 가게 되었다. 주천화는 딱 기한에 맞추어서 출발하는 바였다.
황금향,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련에 박차를 가했던 도장에는 마지막으로 나설 이가 존재한다. 저 내궁 소속의 사의. 살아온 년 수는 같지만 햇수가 틀려서 막내가 되어 버린, 희대의 소심쟁이이자 환관들의 후계자로 자랐으면서 환관은 아닌 녀석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볼까 생각했던 주천화였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 또한 무림으로 나오면 보게 될 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활약하고 있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벌써부터 미련이 생겨 얼굴만 보고 간다는 게 우스워 주천화는 쿡쿡 웃고 말았다.
주천화는 멀어져가는 자금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평생을 있어야 했을 고향, 그리고 천화의 모든 곳.
멀어져가는 모습이 익숙지 않았다.
성곽 너머의 바람을 맡아보는 건 처음인데, 그것조차도 색다른 것 같아서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걸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강호 초출의 애송이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면서도 슬픈 느낌도 든다.
“벌써 그런 감정을 느끼면 어떡하니, 아직 무림 땅은 밟지도 않았는데.”
흑희가 가볍게 타박 주었다. 주천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그런가요?”
“그래, 우리들에게 남겨진 미련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 같아서 즐겁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러면 안 돼.”
“역시 그렇겠죠. 음, 집중해야지.”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야. 아참, 그리고 왜 나만 나와 있는지 알고 있지?”
“알아요. 다들 떠나는 모습 보기 싫어서 안 나왔다는 거.”
주천화는 쓰게 고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희는 어느덧 어른의 문턱을 밟아 가는 천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주천화가 남문으로 나올 때까지 따라온 흑희가 이윽고 걸음을 멈췄다.
“자, 나도 여기까지 배웅하는 게 전부일 것 같네. 그럼 우리 아들. 잘 다녀와야 해.”
“네, 물론이죠. 엄마.”
주천화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흑희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오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건만 흑희는 바뀌지도 않았다. 예전과 같은, 그때와 똑같이 아름다운 미모. 유행하는 장신구나 차림새 정도만 살짝 바뀐 정도의 이 궁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주천화를 배웅했다.
그 웃음은 대견한 아들을 보는 것 같았지만, 아주 조금은 슬퍼 보였다.
주천화는 어느덧 혈희의 키를 넘어선 자신을 발견하고 겸연쩍게 뺨을 긁었던 적이 있었다. 혈희를 시작으로 다른 엄마들의 키를 넘어섰고 이제 천화보다 키가 큰 엄마는 딱 한 명뿐이었다. 구희, 그러나 천화는 아직 성장기였고 무림을 다녀오면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세월의 흐름은 지나치게 빠르다. 그야말로 소동을 소년으로, 그리고 청년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주천화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포옹했다.
언젠가부터 부끄러워져 하지 않았던 행위였다.
흑희 옥상아는 조금 놀란 눈짓이었다가 곧 이해하고 주천화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가는 팔에 담긴 힘이 주천화의 가슴을 살짝 아프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하지만 놓아 줘야 할 때를 알고 있기에 약하게.
흑희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진언했다.
“다녀와.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그럴 거예요, 흑희 엄마.”
“그리고 힘들면 꼭 우리들을 생각하고. 알겠지?”
“네, 믿고 있어요. 엄마들과 함께했던 세월은… 여기, 이 가슴 속에 다 들어 있는걸. 슬프고 외로울 때는 그걸 꺼내어 들여다볼 테니까.”
주천화는 씁쓰레 웃으며 흑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안 울어.”
“네네, 안 울어요. 안 우니까 그만 좀 떨어요. 안 춥잖아요?”
“여자는 가끔 몸이 차가울 때도 있는 법이야.”
흑희는 주천화의 품속에서 꼬물거리더니 어느새 흘렸던 눈물을 다 닦아 냈다.
흑희가 방긋 웃었다.
“강호, 그거 별거 아니야.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걸. 그러니까 몸 건강히 다녀와. 상처라도 나면 평생 고달프게 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네, 선물도 사 올 테니까 기대하세요.”
“그리고 연인도 잘 사귀어야 한다? 뭐 우리 같은 절세 미녀들을 보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다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겠냐만은.”
“그렇게 자신만만한 게 엄마답죠. 하하.”
주천화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응,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계속, 영원히. 그러니까.”
흑희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는 눈물을 가릴 생각도 못하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주천화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뒤돌아섰다. 흑희가 소매를 펄럭이면서 연신 손을 흔드는 것이 느껴진다.
이별.
잠깐의 여행.
그 여정의 끝에서 주천화라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지는, 본인도 잘 모르겠다. 인생사 뜻대로 되면 인생(人生)이라고 부르질 않을 테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태어난 낙원에서 나오지 못하면 그 낙원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 불행히도 주천화는 미지의 불안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했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 없이 나섰다.
그리고 결국 목표했던 자리에 올라섰다.
헤어짐은 슬픔을 부른다.
하지만 이 슬픔을 이 씁쓸한 기분을 보상 받기 위해서라도…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가지기 위해서…….
그렇기에 주천화는 잠깐이나마 천화가 되기로 했다.
“그만 울어요! 난 내 엄마가 울보 엄마라고 딱지 붙는 거 싫으니까!”
천화가 저 멀리서 소리 높여 외쳤다. 흑희가 눈물을 닦아내면서 손수건을 꺼내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아니면 흑희 엄마는 정말 울보 엄마야? 그런 거냐고!”
흑희가 버럭 외쳤다.
“안 울었어! 이놈의 나라는 황사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뿐이야! 황사철이 아니지만 내 눈은 연약해서 공기와 접촉해도 이렇게 눈물이 줄줄 흐를 뿐이란 말이야!”
“하하, 역시 엄마다운데요”
주천화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자금성이 멀어져간다.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흑옥루를 등지고, 저 미래를 향해서.
“시작해 보자.”
저 드넓은 무림을 향해서.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까지의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와 모두에게 웃어 보이며 옛날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하하하하하하!”
기나긴 장소성(長笑聲)이 울려 퍼졌다.
<『금검단향』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