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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4화)
九. 그리고 오 년 후(2)


천화는 황제의 앞에 섰다.
관지충은 구석(九錫)을 받은 덕분에 오체복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일 뿐.
당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구석이 대장군에게 주어진 걸로만 봐도 황제가 대장군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고 대답하는 대장군의 옆에는 천화가 오체복지를 했다. 황제의 용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황제란 곧 천자.
천자란 하늘에서 일어나는 상서로운 조짐을 읽을 지상 대리인이 그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었다.
“그래, 잘 왔도다. 그대, 황금향의 향주여. 고개를 들도록 하라.”
그래서 황제가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 또한 짐(朕).
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라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니지만, 만인지상의 자리에 위치한 자의 위엄이 있었다. 괜히 천자가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를 이끌고, 또한 지탱해온 거인의 흔적이었다. 무인도 아닌데다 황제내경을 통한 건강단련만 약간 수련한 자.
황제는 대장군과 비슷한 나이로 이제 사십 대가 되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어째서일까 생각해 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살이 좀 통통하게 붙었고 눈 밑에 주름이 있었으니까. 수염도 많이 자라 있었는데 너무 잘 다듬어 놓아서 그런지 마치 가짜 수염을 붙여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금향의 향주 황금패주가 황상을 뵈옵니다.”
“그래 잘 왔노라. 짐이 공무에 바빠 잘 들를 수 없었으나 이렇듯 장성한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구나.”
“이 모든 힘은 황제 폐하의 목적에 따라 행사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부족한 몸이지만 최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나이다.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나이다.”
황제는 웃었다. 아니, 최소한 웃은 듯했다.
“그러기를 바라노라. 그보다 짐의 대장군이여.”
“하명하소서.”
“과연 황금향은 짐의 목적에 부합되게 길러졌는고?”
“동급의 연령대에서 따지자면 천하에 적은 없을지 아뢰오.”
“동급의 나이에서 강해지는 건 바라지 않았던 줄 안다만, 과연 황금향의 향주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꼬?”
“황금향의 향주인 황금패주는 지금 수준으로도 강호 무림 최강의 무인이라는 강호팔강에 준할 줄 아뢰오. 황금향에서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 아니고서야 경험도 부족함이 없을 줄 아뢰오.”
“강호팔강은 어느 정도인고?”
“무림삼성이 손바닥이라 한다면 강호팔강은 손가락인 줄 아뢰오.”
“그렇다면 대장군이여. 그대는 인정하는가? 그대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이 소년을?”
“감히 뜻을 전해도 되겠나이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군은 어깨를 떨치고 몸을 똑바로 폈다. 그 굳건한 몸에서 드러난 이 위엄은 과연 대장군이라는 감탄을 유발했다.
“소신은 다섯 차례나 그들의 대련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황금패주로 향하는 대련의 말미에서 매번 후계자가 바뀌는 관경도 볼 수 있었나이다. 다섯 명이 다섯 차례 최고의 지위를 바꿔서 쟁취한 것은 실력이 실로 용호상박이었기 때문일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며, 이들 중에서 최후에,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 황금패주는 황궁이 길러 낼 수 있는 최고의 무인인 줄 아뢰오.”
“과연 그 말이 옳도다. 그렇다면 짐의 대장군이여.”
“하명하소서.”
“그대의 말을 짐은 믿고 있도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하게 들었다 하나 본 것만 못할 때도 있는 법. 하물며 짐의 생각이 그대로 전해져 완성된 무인의 무위를 직접 보고 싶기도 하다. 일이 바빠 찾을 수 없었기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짐의 요구를 들어주겠는고?”
“소인이 상대하오리까?”
“그렇게 하면 불만이 없으리라 여겨지노라.”
천화는 깜짝 놀랐다.
어느덧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으니 감히 황상 앞에서 칼을 들고 싸우게 생겼다. 게다가 최강의 무인이라 불리는 황룡무왕과…….
흥미가 안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벽이 너무 높다. 천화는 그를 너무나도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그 무인으로서의 근엄한 면이 덧보이는 수려하면서도 담백한 외모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의 무위를 갖춘 자. 관지충은 천화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어전 앞에서 칼부림이라니, 형가(荊軻)가 따로 없지 않은가.
주저하는 천화와는 반대로 관지충이 황제를 향해 슬쩍 목례를 올리고는 이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 돌아서는 깊은 눈동자로 천화를 말없이 응시했다.
천화는 허리의 금고검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조금은 불안했다. 관지충은 웃음기 하나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천화를 바라보다가 이내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인의 삼 초를 버텨 내거나 혹은 상처를 입힌다면 황상께서 선물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실지?”
관지충의 말에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하다. 짐이 선물을 하사하겠노라. 그러므로 황금향의 향주여, 그 진정한 실력을 보여 다오.”
이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늦었다.
황제가 직접 명령하고 관지충이 그 명령에 따를 생각으로 허리춤의 장군검을 들어 올리니 천화 또한 뽑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관지충은 제안을 하면서 삼 초를 버텨 내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경우 선물을 내리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이긴다는 건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니 그렇다 치고 잘 막아 내거나 예상치 못한 일격을 조금이라도 상처만 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쉬운 일이 황룡무왕을 만날 때는 천혜의 난관이 되어 버린다.
‘질 생각은 없어.’
이번은 기회다.
황룡무왕은 아마도 예로 들었던 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제안을 던졌을 것이다. 관지충은 제자, 아니 후계자나 다름없을 천화를 보면서 그 또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대를 이뤄 주는 것이 이렇듯 많은 은혜를 입은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해.’
천화가 금고검을 완전히 뽑아들고 묘한 기수식을 취했다.
일격을 한 번 막아 내 보려는 심산에서였다. 혹 관지충의 일격이 너무도 물렁하게 들어오는 경우엔 후발선제의 묘리를 이용한 반격을 준비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의도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그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관지충은, 오히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장군검을 뽑아 드는 정석을 던졌다.
대량 양산품이지만 황궁에 납품되는 물건이라 그 질은 매우 뛰어나다. 이것 역시 황궁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황궁이 허락하지 않은 대장간에서 제작할 경우엔 경을 치르게 된다.
제국창과는 달리 일반적인 검이며, 일반적으로 고스란히 쓰이는 물건이었으나 특기할 거라면 검막 아래의 손잡이가 무척 길었다. 일반 검보다 약 두 배 가까이 길었는데 그 이유가 손잡이의 안쪽에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비수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단검을 따로 들고 다니기 뭣하다는 이유에서 단검보다는 좀 작고 비슷한 효용을 보이는 비수가 담겨 있었다.
“간다.”
황룡무왕.
그 소문 무성한 지상 최강의 무인.
무림에 단 세 번 출두했지만 세수가 이 갑자를 넘어선 무림삼성과 비슷한 위치에 놓이는 황궁무학의 집결체.
“눈 감지 마라.”
가벼운 동작으로, 그러나 보는 이의 눈에는 그 동작 하나조차에도 극심한 묘리가 섞여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으로 검을 들어 올리고 횡으로 내리긋는다.
천화는 저도 모르게 욕설이 나올 뻔했다. 욕설 같은 건 거의 몰랐던 그는 황금향에서 대형을 만나면서 가벼운 욕이 입에 붙어버렸는데,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아니, 저 미친 짓은 뭐야?’ 정도가 될 터였다.
겨우 삼재검법(三才劍法)의 일초식, 태산압정(泰山壓頂)인데 막으면 죽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천화는 얼추 막아 볼까 싶어 움직이던 팔을 급히 회수한 후 검의 궤도를 벗어났다.
뭐라 이루 말할 수 없을 바람 찢겨나가는 소리가 검이 내리쳐진 후 얼마 안 있어 울려 퍼졌다.
이건 무슨 폭포 소리 같았다. 등용문(登龍門)이 바로 이런 곳일까. 급류를 타고 올라가는 용이 내는 소리가 저 모양이지 싶다.
“이 무슨…….”
최소 사 갑자. 사 갑자에 이르는 내공은 검기도, 그렇다고 강기도 아닌, 검과 표리일체가 되어서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도 호풍환우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소란이 일었다.
천화는 꺾이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는 황룡무왕.
전력을 쏟아 붓는다 해도 상처 하나 날까 말까 한 수준.
‘그렇다면.’
천화는 황금향에서처럼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을 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변이 다 뒤집어지고 깨부숴지는 무공을 써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라는 것을 이제 막 깨닫는다.
“간다!”
천화는 양손으로 금고검을 쥐고 필사의 돌격을 하며 검에 기를 잔뜩 실어 냈다. 온몸에 황금빛의 서기가 도는 한 순간. 천정사상대법으로 개조된 초인의 육체가 신호를 전달 받고 즉각 움직인다.
속도도 힘도 그리고 특기도.
실로 황금빛 벼락과 같은 기세로 닥쳐 들어간 천화는 황룡무왕의 검을 전력으로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쇠와 쇠가 맞부딪쳤는데 지진, 혹은 산사태가 일어난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낸다. 천화는 순식간에 백열화한 공간 속에서 겨우 상대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그 섬광이 걷히고 났을 때는 평범한 장군검으로 막아 낸 상태였다.
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역시.”
상대는 강하다.
“정말로.”
상대는 천화가 이상향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무인이었다.
“강하구나.”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한 이상적인 무인. 어떤 사태에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 자리가 만들어 주는 매력이 몹시 훌륭한 장년의 남자였다.
“약하다.”
천화는 검으로 막아 낸 직후, 경직 상태가 풀리기도 전에 들고 있던 장군검을 밀어붙여 자신을 저쪽으로 날려 보내는 상황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라기엔 일렀다. 천화는 아직 전력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여러 가지 무공들.
여러 가지 비보들.
그리고 네 명이나 되는 매우 뛰어난 실력의 의형제들에게 이렇게 졌다고 말하면 그 얼마나 아쉬운 일일까.
“하아아아아!
천화가 전력을 다해 내공을 뽑아냈다.
단전 안에 깃든 환우일기담이 전력을 다하면, 몸 밖에서 아지랑이와 힘께 황금빛의 빛이 서리게 된다.
들고 있는 사람까지도 마치 그 몸 전체가 황금색으로 도색이 되는 듯하다.
“으오오오오오오! 부서져!”
좀처럼 고함지르지 않는 천화의 외침.
황룡무왕은 황금색으로 달아오른 검과 새로운 무공의 그것을 보고는 잠시 침음했다.
“그런가. 그렇군. 그랬던가…….”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던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황룡무왕은 그 공격을 막아 냈다. 검속에 들어 있는 비수를 꺼내어서, 두 개의 검으로 막아 냈다.
너무나도 쉽게, 간단하다는 듯이.
사실 그렇게 간단히 받아 낸 건 아니지만 워낙 인상이 굳은 인상인데다 실력 또한 뛰어나니 대수롭잖은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그걸 막았다고?”
천화의 자신작 중 하나였는데 그게 막혀 버렸다.
천화는 기가 질렸다. 황금향에서 그렇게 상대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도 괄시하는 경우가 있다. 구 할이 바보라고 해도 남은 일 할이 우수한 재능을 갖출 확률은 얼마나 되던가. 언젠가의 천화는 이게 자신의 마음가짐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이야 성격이 그 모양이지, 하고 넘기지만 그래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길 때도 있는 듯하다.
“굉장하군.”
황룡무왕은 적잖이 감탄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천화는 상대가 놀리는 건 아니겠지만 그의 부하들은 오해를 많이 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룡무왕은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흔적을 쓰다듬었다. 그야말로 생채기만 난 정도였다. 그러나 황룡무왕은 내기의 패배를 인정했다.
“호오, 나의 대장군이여. 이게 무슨 일인고?”
“상대의 기예가 예상보다 뛰어났던 탓이라 아뢰오.”
“그 기예에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고?”
“물론 그러하오리다.”
황제가 옥좌를 떨치고 일어났다. 곤룡포,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 반짝이는 옷을 입은 중년의 황제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 불리한 내기에 참여한 그대에게 감탄을 금할 수 없노라.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성이 무엇인고?”
“하늘 천 자제 꽃 화를 써서 천화라고 말하옵니다. 그리고 흑옥루 출생이옵니다.”
“흑옥루라고?”
“네, 요희라는 성명을 쓰는 이가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황제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곧 안색을 회복하긴 했지만.
“허, 허허, 허허허허허. 그랬었군. 요희의 자식이었던가.”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성이 없겠군.”
“그러하옵니다만…….”
“좋아, 그런 거였군. 나의 대장군이여. 그대는 너무 짓궂군. 다 알면서도 그렇게 시치미를 뗀 것이었던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 아뢰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민 손으로 박수까지 쳤다.
“좋아. 천화여, 황금향의 향주여. 내 승자인 그대에게 선물을 하사하겠노라.”
“네, 넵? 망극하옵니다.”
조금의 기대와 조금의 당황, 조금의 그리움이 섞여든다.
선물이라니 그게 뭘까? 황제에게 선물을 하사받는다니,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대에게 국성인 주(周) 씨를 내리겠노라. 사양치 말고 받도록 하라!”
천화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뭐라고요? 아,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너무도 당혹스런 사태에 천화가 황제 앞에서 반문하고 말았다. 그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눈치조차 채지 못할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