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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3화)
八. 국가의 요인이 크는 곳은 대개 감춰진 곳(3)


“자, 이걸로 끝내자.”
정수현이 미소 지으며 삭풍검을 거꾸로 쥐었다.
동시에 휘몰아치는 폭풍. 바람이 실제로 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맞은편에 서 있던 사의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칼이 떠올랐다. 바라보고 있던 천화도 소상영도 깜짝 놀라 정수현의 모습을 지켜본다.
공기조차 빨아들일 정도로 응축되는 내기. 검이 떨린다. 쇳덩이가 덜덜덜 떨리면서 뭐라 형용하기 곤란하게 울고 있었다.
저렇게 쌓인 검기를 마치 공성추와 비견할 수 있을 거대한 힘을, 정수현은 검에다 담고 씩 웃었다. 사의가 창백해진 얼굴로 양손을 펼쳤다. 삭풍검이 광란에 빠진 용의 그것처럼 춤춘다. 사의가 검에 맞서 쌍장을 내뻗는다.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이 검에 휘말려 포말처럼 변해 사라지고 한층 더 기세를 올리며 삭풍검이 휘날렸다.
사의가 이를 악물었다가 힘껏 발을 굴린다.
순간적인 전술의 변화.
삭풍검에 실린 검기가 목젖을 찌르려는 직후, 잔상을 남기며 사의가 뒤로 물러섰다.
한 순간의 공방. 최후의 살벌한 기세가 살갗을 조금 찢고 피를 불렀다. 정수현은 삭풍검의 검극에 매달린 핏물을 바라보다가 허 하고 탄식했다.
“굉장한데 너.”
“그, 그만 두죠. 충분하잖아요?”
사의가 창백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일단 기세를 올리던 대련이 끝나자 본래의 소심한 성격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연히 그만 둘 생각이야. 그리고 일단 미안해. 마지막 일격은 죽이려고 사용한 거였어. 너무 기세를 탔나 봐.”
“그, 그런가요?”
“응, 그런데 피하네.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온다니까. 하, 여긴 무슨 괴물들만 모여 있나.”
그렇게 말하는 이도 괴물이라는 사실을, 그만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수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가 익살맞은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상영과 천화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정수현에게 독고삭은 무시되었다. 독고삭은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을 수 있는 이는 아쉽게 여기에 없었다. 즉 뭐라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들을 가치도 별로 없었다. 독고삭이 매일 같이 하는 말이 ‘그래 무시해라, 나는야 그림자. 영원한 방관자. 같이 주점에 가도 나만 물이 안 나와.’ 같은 자기 비하 발언일 뿐이었으니까.
“정말이지, 난 확신했다.”
정수현이 단언했다.
“여기의 누구에게라도 져도 불만은 없다고. 나이가 많아서 형이라고 불리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 쟁쟁한 실력이라면 그렇게 굳이 부르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황금패주가 안 되어도 좋아. 응, 이 정도면 만족해!”
황금향의 후계자 중 두 명과 싸워 본 정수현은 시원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소상영이 기가 막혀 비꼬았다.
“그렇게 현 형이라고 불러 달래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에요? 마지막에 들어온 저자가 우리와 같은 또래니만큼 댁…… 아니, 현 형은 우리들의 대형이라고요.”
천화도 얼른 거들었다.
“맞아요. 현 형이 내 형이라면 만족할 수 있어요.”
둘의 시선을 받은 사의가 경직된 어조로 몸을 붉히면서 말했다.
“저, 저도 동의해요.”
“그래? 자식들, 이거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데. 음, 좋아. 그럼 정식으로 인사할까?”
“인사라뇨?”
“예전엔 왜 그냥 이름만 교환하고 그랬잖아. 출신 같은 거나, 특기, 좋아하는 것 같은 걸 이야기하지도 않았었고. 의형제의 연을 맺는 건 아직 좀 이른 것 같지만 서로를 더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뭐, 나쁘진 않군요. 어차피 꽤나 오랫동안 여기 묶여 있어야 할 테고 관계가 소원하면 좀 찝찝하니까요. 일이 끝나면 달리 돌아가야 할 곳에 가야겠지만, 그러기 이전까지는 형제라고 불러도 되겠죠.”
“어?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이야.”
“제가 이런 말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소상영이 팔짱을 끼고 아니꼽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보통 그렇잖아. 왜 딱 봐도 명문 세가의 자식이고 장래에 군부의 최고 자리를 가질 테다라는 게 드러나는데. 안 그러냐?”
천화가 쿡 하고 웃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우리 같은 이들과는 다르죠.”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악의 섞인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싫다 이거예요?”
“아니, 좋아.”
정수현이 사의와 천화, 그리고 소상영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그럼 이제부터 황금향의 결성이다! 술도 없고 나무도 없지만 의형제의 결성엔 문제없지.”
아, 이게 무림인인가.
아니, 무림으로 나가려는 이들의 자세인가.
천화는 이 호쾌한 결말에 대단히 감동했다. 천화가 바랐던 이상이 여기 있었다.
다소 얼떨떨해 하다가 쑥스러운 듯 쭈뼛거리는 사의.
그리고 내키지는 않는 듯하지만 먼저 나와서 옛 서적에서나 나올법한 바른 자세로 포권해 보이는 소상영 그리고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정수현.
오래전 세상의 혼란을 걱정하며 나이와 실력 따위를 다 버리고서 의로서 맺어진 도원결의(桃園結義). 도원결의를 이루었던 유관장 삼인과는 숫자도 맞지 않는 다섯 명이고 특징도 다르지만 기개만큼은 그들 못지않았다.
그렇게 느꼈다.
이들 사이에서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천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아뇨.”
세상을 모르는 천화는 책을 통해서 바깥을 배웠다.
궁희들이 책만큼 낭만적인 곳은 아니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왔지만 그래도 조금만이라도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여겼다.
“천화입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소개를 한 천화는 바람직한 모습의 세 명을 보고서…….
“어?”
소상영이 가볍게 눈빛으로 핀잔을 줬다.
“아무리 예식 없이 한다 해도 여긴 의형제의 결약을 맺는 자리야. 뭐하고 있어?”
“우린 넷이 아니잖아.”
“뭐?”
“황금향의 후계자는 다섯 명이고, 저기 저쪽에…….”
천화는 존재감도 흐린데다 어둡기까지 해서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가련한 소년을 가리켰다.
소년은 바닥에 삼라만상의 도리를 꿰는 도식을 헛되이 흘려보내면서 그림자 사람이라는 특이한 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의형제를 맺으려던 이들은 침묵했다.
묘하게 작은 독고삭의 목소리가 이 적나라한 침묵 속에서 똑똑히 들려왔다.
“내 인생이 다 그렇지… 이해해, 당연하지. 그게 내 인생인걸. 어쩔 수 없어, 후회하고 울부짖어도 안 된다고. 내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니까. 후후후후후후후후…….”
그리고 남은 것은 모두가 눈가에 물기를 적시며 잊어서 미안하다라고 말할 차례였다. 그렇게 다섯 명은 대업이 끝날 때까지로 기한을 잡고 의형제의 결의를 맺었다.
배반하지 않고 자기 속을 차리지 않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으며, 역사에 떳떳하게 이름을 남길 것이며, 생의 끝에서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웃을 수 있기를.
각각 한 명씩이 포부를 밝히고서 포권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른들이 다수, 이제 황금향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서 이들을 좀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게 가르쳐야 할 이들이었다.



九. 그리고 오 년 후(1)


그리고 오 년이 지났다.
지상 최강의 무인이라는 관지충의 옆에서 천화가 걷고 있었다.
황금향의 황금패주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일 년에 한 차례씩 대련을 거쳤고 그때마다 승자는 바뀌었다.
그리고 오 년째, 즉 계획의 시작을 알리기 전에 치렀던 비무의 승자는 천화가 되었다. 황금향의 일원은 만장일치로 찬성했고 승자가 된 천화는 비무의 마지막에 나타난 대장군을 따라 황상을 배알하러 가는 중이었다.
공식적으로 만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상, 이 거대한 나라의 황제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난 능력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에서 역대 최고의 황제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였다.
대장군은 권위를 빌어서 모두를 물렸다. 덕분에 걸어가는 동안 만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넓은 땅에 암살을 걱정하여 암살자가 숨어들어 올 나무조차 없이 넓은 이곳에.
“이상한가?”
“놀랍다는 말이 맞겠죠.”
천화는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넓은 곳에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요.”
“그게 바로 권력이다.”
무림에서야 황룡무왕이라 불리며 무림인들의 기세를 죽인 무인. 황제의 대장군이자 온갖 괴소문을 현실로 만들어 버린 지상 최강의 무사였다.
황금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일전에 황금향과 같은 계획으로 인해 육성된 자.
그때는 황궁이 무척이나 어지러웠고 당금의 황제 또한 하루 이상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워 사활을 걸고 키워 낸 존재라고 했다.
덕분에 대장군도 천화와 마찬가지의 내공심법을 가지고 있고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있으며, 군략에 능하고 암살 따위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육성한 자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것. 그러나 완성된 이 자는 그 돈이 아깝지 않은 자였다.
천화는 선배라고도 할 수 있는 관지충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천화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그리고 관지충은 사십 대가 약간 안 되었거나 이제 그 문턱에 걸쳐 있는 나이일 것이다. 같은 과정으로 단련을 받았으면 언젠가는 천화도 저 나이가 되면 관지충처럼 될지도 모른다.
어엿한 청년이 된 천화지만 아직 크는 중이라서 관지충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겨우 두 살 많은 모씨는 벌써부터 수염이 나기 시작하고 앞머리가 뒤로 밀려나고 있지만 천화에겐 염소수염 같은 것도 나지 않아서 앳된 모습이 더욱 돋보였다. 엄마를 닮았기 때문인지 얼굴도 곱상하고 고운 편으로 어떻게 잘 꾸며 보면 여자로 보일 만도 했다.
물론 천화에겐 좋은 일이 아니었다. 천화는 관지충의 얼굴을 보면서 남몰래 한숨 쉬었다.
무공의 수위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위엄만큼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황상을 영접해도 되겠습니까?”
“된다.”
그걸로 대답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망할 수염아! 라는 말은 마음속에 묻기로 하고 천화는 웃는 낯으로 다시 물었다.
“걱정이 되는군요, 하하. 하하, 하하하.”
“십수 년간 걸쳐 완성된 계획이니까 황상께서도 관심 깊게 지켜보고 계신다. 게다가.”
“게다가?”
관지충은 힐끗 천화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가 보면 알겠지.”
가 보다니 어딜? 고개를 갸웃하던 천화는 어느덧 도착한 궁궐을 바라보고 잠시 주저했다.
자금성, 이 나라의 중추. 심장이라고 해도 좋을 곳. 그곳에서는 어림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어림군의 수장이 대장군임을 알면서도 명패를 요구했다. 대장군도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같은 소리는 하지도 않고 명패를 내밀었다. 대장군부 소속의 장군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패찰이었다.
어림군은 그대로 양옆으로 갈라졌고 창을 머리 위로 들었다. 좌우에 선 이들이 창을 내뻗자 창대가 서로 엉겨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무로 된 봉 위에 얇고 가늘게 편 강선을 돌돌 말아서 탄력과 단단함 양쪽을 추구한 이 창은 이름도 단순하게 제국창. 사용하는 칼이 당태도라는 단순한 이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훌륭하다고 사용하는 방법조차 훌륭하진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국창은 어림군의 병기로 외부에서 만들어 사용했다간 반역자 취급 받는다. 무림인들 중에도 이 무기를 쓰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제국창을 사용할 허락을 받은 것은 산동(山東)의 악가(岳家)뿐이었다.
어림군의 절도 있는 모습과 그들이 암암리에 내뿜는 내력에 살짝 질려하며 천화가 대장군의 뒤를 따라 걸었다.
대궐 안쪽으로 들어서서 또 엄청나게 긴 거리를 소리도 없이 걸어야 했다. 머리꼭대기를 찌를 것처럼 노려보는 시선, 즉 지붕 아래 암야에서 대기하고 있는 암살원의 시선이 따갑다.
저들이 그 황제를 암살하려다 그 실력에 반해 이곳을 지키게 된 묵영월야일 터였다.
이곳은 정말 황제가 기거할 수 있을 곳이었다.
무림인들은 황궁을 존중하고 황상을 존경하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별개의 것으로, 일부 치기 어린 이들은 극강의 무림인이 작정하면 황제도 한 순간에 목이 따인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들어와서 보면 알게 될 터였다.
이곳이 바로 황궁이라고.
이 넓은 대륙에서 가장 다쳐서는 곤란할 이가 머무는 곳이라고.
철옹성(鐵甕城)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붙여야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