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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2화)
八. 국가의 요인이 크는 곳은 대개 감춰진 곳(2)


예전에 만났을 때는 고목마인(枯木魔人)의 신공을 익히고 있던 중이라고 말했다. 천화와 마찬가지로 옛 사대마인 중 한 명인 고목마인. 그쪽은 진짜로 마인 같은 짓을 골라 해서 사대마인 중에서 평판이 몹시 나빴지만, 흑미륵신공은 정말로 감탄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흑미륵신공은 서역에서 건너온 신공이다.
수행하는 과정이 저 천축국에서 유래된 좌법(坐法)에서 유래된 터라 몹시 어렵다. 깨달음을 통해 우주와의 합일을 노리는 수행에서 파생된 터라 예식도 까다롭고 과정도 괴롭기까지 하다. 호흡법(呼吸息)부터 인체의 기둥이 되는 척추를 세우는 자세, 사고신경의 제어, 심지어는 감식(減食)과 절곡(絶穀)까지 수행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통제된 상황에서야 비로소 흑미륵신공을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도검에 상처입지 않고 어떤 공격에도 상성의 우위를 가진다. 고목신공의 근간이 되던 수행의 끝은 무림의 위대한 전설과 마찬가지로 소우주인 내가 대우주, 즉 자연과 하나로 통일되는 신아일치경(神我一致境). 꿈만 같은 경지였다.
옛 시대, 사대마인이 활동할 시절 가장 강력한 고수는 고목마인이었고 그의 악행에 치를 떠는 이들도 그 수행법이 사라진 것에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걸 익힌 것도 감탄할 일인데 이젠 묵영월야라니.
그 경지가 너무나도 높아서 백 번 태어나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암살 기법은 황궁의 무력 집단에게 골고루 전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황궁에서 암살술을 익힌다는 건 어지간한 일이 아닌 한 없을 터였다. 금위반이 요인 암살을 한다고 해도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건 아니다. 황궁의 방식이란 그런 게 아니니까.
천화가 암살에 대비하여 마련된 흑옥루 출신이면서도 그에 대한 대처방법만 배웠지, 암살 자체를 배우지 않은 것처럼.
듣자니 암살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항목의 수련법으로 수련해야 되고, 덧붙여 소모품이 되어야 하므로 수명을 깎아 버려도 괜찮은 악독한 방법을 병행한다고 한다.
그런 걸, 독고삭이 익히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정수현이 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무튼 다들 이 년 전과 달라진 게 너무 없어. 저 독고삭마저도 이 년 전과 상황이 똑같아.”
정수현이 씩 웃었다.
“전례에 비추어 또 한 판 붙어 봐야지?”
“그게 황금향의 기본 수칙이라도 되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그렇다고 정하면 되지.”
“이번에도 저와 할 건가요, 현 형?”
이 년 전에 정수현과 비무를 치러 본 적이 있는 천화가 물었다. 정수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상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네요.”
“장군이도 아냐.”
장군이라는 말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판단한 소상영이 이를 갈아댈 때 천화가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그럼 독고삭과?”
“아니, 저 불쌍한 모습 좀 봐. 붙어 볼 맛이 나겠어?”
“그럼요?”
“마지막으로 오는 다섯째와 붙는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데 태연하게 다섯째라고 부르는 건 당연히 안 될 말이지만 이제 반박하기도 지쳤으니 그걸로 됐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안 보이네요, 다섯 번째 후계자는.”
천화가 곰곰이 생각했다.
흑옥루.
어림군.
황궁무고.
금위반.
황궁내의 무력을 대표하는 집단. 여기에 다섯 번째 집단이 있기는 할까? 천화는 이야기상의 다섯 번째가 나타날 때까지 의심했다. 어쩌면 그 녀석은 가공의 존재일지도 모르고 황궁의 명령을 대리한다는 식으로 해서 황금향의 주인 자리를 가질지도 몰라.
상상이 날개를 달고 점점 커지는 한 순간, 대문 쪽에서 가여울 정도로 떠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 내궁(內宮)의 금과옥조(金科玉條)에서 온 사의(謝意)라고 합니다! 황금향에 소속되었으니 여러 선배님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벌벌 떨면서 말하는 것이 숫기도 없어 보이고 심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목소리마저 가늘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저게 다섯 번째인가?”
정수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실망했다는 듯 말했다.
천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소상영은 실망도 어처구니없어 하지도 않았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탓일까 몸의 절반 정도를 대문 뒤로 숨어 가린 이가 벌벌 떨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궁 소속이라잖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환관(宦官)이라고요!”
“그런데?”
천화가 혀를 찼다.
“환관 쪽에서 황금향에 선을 댔다는 말이군!”
그제야 정수현도 의미를 깨달았다.
환관, 황제의 곁을 지키고 궁중에서 벼슬을 하거나 유력자들의 일을 돕기도 하는 이들. 고환을 절제하여 성기능은 가지되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여 법과 도덕을 지키게 하며 목숨을 걸고 바른 진언을 하여 황제를 구해 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을 말했다.
당연히 무력적인 면으로는 아니, 지위도 그렇게 높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일반인에게는 그러고서도 벼슬을 해야 하냐며 괄시마저 받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쪽에서 황금향의 후계자를 보냈다니 어처구니 없어 할 만도 했다.
“흐음, 흥미가 생기는데. 이봐, 여기로 와 봐.”
벌벌 떨면서 가기 싫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세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다섯 걸음에 등까지 돌리고 열 걸음에 멈칫하며, 열다섯 걸음에 주저앉아버리는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정수현이 말했다.
“이름이 뭐지? 나이는?”
“사, 사사사사사사의라고 합니다.”
“그게 다 이름이야?”
“아, 아, 아니. 사의라고 합니다.”
“그렇군. 아아아니사의라.”
“사, 사의입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사의가 덜덜 떨면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돈하고 간신히 제대로 답했다.
“사의라고 합니다. 내궁의 감찰부서인 중 하나인 금과옥조에서 왔습니다.”
소심함이 눈에 보이는데도 마음을 다잡고 말하는 것을 보며 정수현이 대견하다는 듯 눈에 주름을 잡았다.
“그래, 사의. 나이는?”
“열다섯입니다.”
“너네랑 동갑이네?”
소상영이 마땅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천화는 신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소개부터 하지. 나는 정수현. 이쪽은 천화, 성은 없어. 그리고 이쪽은…….”
겁먹은 눈빛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상대의 얼굴을 익혀 둔 사의는 그림자와 동화된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독고삭마저 바라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황금향의 후계자지. 잘 부탁해. 사의.”
“네, 네, 네네, 넵!”
“왜 그렇게 겁이 많아?”
정수현이 피식 웃더니 사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큰 키가 아닌데다 체격마저 작아서 본래 나이보다 한두 살 정도 어려보이는 사의는 머리를 쓰다듬자 풀린 웃음을 지었다.
“기분 좋냐?”
“으, 으응. 아, 아, 아, 아닙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돼.”
“네, 네. 좋습니다.”
“좋았어. 그럼 대련이다.”
“……네?”
대답은 긴 침묵 후에 나왔다.
정수현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오기 전에 나는 이 년 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다섯째와 대련하겠다고 했거든.”
사실이었기에 확인을 바라는 사의를 향해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대로 정수현이 이를 드러내 전의로 불타는 웃음을 지으며 등의 무기에 손을 댔다.
다섯 걸음 안의 상대와 맞서 싸울 때 사용하는 삭풍검.
스르릉.
살을 에는 듯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판 붙자. 너도 나름대로 황금향에서 제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온 거지?”
“그, 그렇습니다만 아니, 그래도 이건…….”
“오, 아니라는 말은 안 하잖아. 그럼 한 번 붙어 보자!”
정수현의 막무가내 주장에 사의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찌 도움을 달라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주목하는 장군복의 소년이 하나, 그림자가 난지, 내가 그림잔지 모르는 이가 하나, 그리고 환관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소년이 하나. 즉 다들 도움이 안 되는 이들 뿐이었다.
“끄응. 알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원망은 가지면 안 됩니다.”
“오! 좋은 말하잖아. 역시 너도 황금향에 올 만한 담량은 있었군. 그럼 한 번 붙자.”
소심하게 떨면서도 자기 할 말은 하는 사의를 보고 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지만 실력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천화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황금향의 후계자들과 첫 조우.
거기서 가벼운 충격을 받고 이 년간 흑옥루에서 엄청난 수련을 해 왔다. 예전의 자신은 일격에 상쇄할 정도의 발전, 하지만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내궁의 사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황궁무고의 정수현, 잘 부탁한다고.”
정수현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유명한 오보 중 하나, 삭풍검.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검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검막 쪽에 폭이 좁다가 다시 넓어지는 기형검. 어떻게 쓸지 감을 못 잡겠지만 휙휙 돌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의는 대단히 소심한 모습에 주저하면서 품에서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얇게 발라진 가죽 장갑. 붉게 옻칠을 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붉었던 것인지 새빨간 장갑, 그 손등 쪽은 비늘이 돋아 있어 평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것 또한 신병이기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는 황궁이니까.
중원에서 기보로 여겨지는 것들을 모을 수 있는 재주가 넘쳐나는 곳이다.
“저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과연 소상영도 예사롭지 않은 듯 그렇게 말했다.
“붉은색, 붉은색에 푸른 비늘. 뭐였더라, 저게?”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하고 있었다. 천화도 몰랐다. 역시 세상이 넓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보물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모르는 것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때였다. 사의가 기를 끌어 모으며 준비를 알렸다. 입고 있던 환관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소리를 냈다. 운기를 하자마자 공기가 움직일 정도의 내공. 그 화후는 분명 감탄할만한 수준일 것이다.
“내가 나설 걸 그랬나.”
천화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상영이 쿡하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너도 곱상한 얼굴을 하고 향 냄새를 풍기고 다니지만 역시 사내 녀석이구나.”
“즐겁잖아, 이 년간의 기다림 끝에 동류의 사람을 만났으니까.”
“즐거워?”
“응, 난 또래와 어울릴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렇게 투닥거리는 것도 즐거워. 게다가 무공을 익혔잖아. 무공으로 서로의 기량을 겨루고 마지막에 미소 지으면서 서로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거, 그거 내 오랜 꿈이었어.”
즉,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다고 천화는 말했다.
소상영은 다소 멀게 느껴지는 시선으로 천화를 바라보고는 폭발적으로 웃었다.
“아하하하하! 무공의 수위는 모르겠지만, 너 마음씀씀이 만으로는 최고가 되겠는걸?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바보 같다고 해야 하나.”
“그거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또 들어.”
소상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하는 두 명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삭풍검에 내력을 싣고 수평으로 찔러 넣는 정수현의 앞에는 장법이 주류인 듯 펼친 손바닥에 내력을 싣고 달려드는 사의가 보였다.
순약한 인상에 여자처럼 호리호리한 몸, 게다가 새된 목소리. 사의는 어쩌면 환관일지도 몰랐다.
환관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건 비열함, 자기보신, 암군을 만드는 악역 등등. 하지만 그런 환관이 있기에 역사에 다양성이 더해지고 왕의 위엄이 살아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자식을 번성시킬 기회조차도 스스로 저버리고 황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환관. 그 환관이 머무는 곳에서 후계자로 꼽힌 사의는 일단 싸움이 시작되자 잔상이 남을 정도로 장을 휘둘러 댔다.
검과 맞부딪쳐도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검을 든 정수현이 놀라 검을 회수할 정도였다.
제 아무리 신병이기를 둘렀다고는 하나 삭풍검 또한 보검류. 게다가 검에 실린 내력은 검기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검기에 손이 무사할 리는 없겠지만 장갑의 효용인지 아니면 특이한 내공심법 때문인지 삭풍검이 손바닥과 마주치는 상황이 되면 삭풍검의 자락이 찌르르 하고 흔들리더니 궤도를 빗겨간다.
“아……!”
환관들이 어째서 이런 공사에 후계자를 투입한 걸까.
그런 의혹을 잊게 만들어 주는 솜씨에 천화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높였다.
서로가 절정의 기량을 보이는 건 아직 이르다.
이 년 전에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극강의 솜씨를 일부만 보였을 뿐, 모든 것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리고 한층 더 성숙하고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후계자들도 전력을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솜씨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