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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1화)
八. 국가의 요인이 크는 곳은 대개 감춰진 곳(1)
흑옥루로 찾아온 어떤 병사의 뒤를 따라가니 황금향이 보였다. 비밀단체의 이름이자 기관의 이름이기도 한 황금향.
이 년 전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이는 소상영.
안에 들어서자 제일 처음 소상영이 보였다.
“천화?”
“응, 소상영이지? 변한 게 없는 걸. 한눈에 알아보겠어.”
소상영은 젖살이 빠지고 위아래로 길어져 있었다. 다소 말라 보이기까지하는 체구, 긴 목과 하얀색 피부, 미주랑(美周郞)이 저런 외모였을까.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 그리고 입술조차도 탐스럽게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녀석 남자지? 남자 맞지?’
그 미모에 의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소상영이 말했다.
“너도 변한 건 없어, 딱 보니까 알겠는데?”
“그런가?”
“그래.”
그리고 잠깐의 침묵.
천화가 장난스럽게 포권했다.
“오랜만이야.”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대장군부, 어림군의 후계자인 소상영은 기품 넘치는 동작으로 포권을 했다.
한층 더 화려해진 외모에 그런 옷차림이지만 장군복을 입고 있었다. 연령이 어리기 때문에 그리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 보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것 같았다. 짙은 홍색의 갑옷이 무척이나 눈에 띄었는데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무지막지하게 화려한 보검이었다.
“그 칼은 뭐지?”
“음? 역시 예전과 마찬가지로 눈이 좋네. 내가 사용하는 애검이야.”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허리에 차기엔 검이 지나치게 길었다. 마치 군도(軍刀), 승마를 한 후 말 위에서 휘두르는 검을 닮아 있었다.
소상영이 아직 소년인데다 검이 길어서 매는 방법도 독특했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매는 방식이라면 바닥에 검자루가 질질 끌려 다닐 테니 그렇게 묶는 게 정상이긴 했지만, 역시 체형에 맞지 않다는 게 조금 걸린다.
“애검이라고?”
“그래, 난 이 검에 철저하게 무공을 맞췄어. 덕분에 신체가 완전히 성장하는 미래를 위해서 지금 이 불리한 신체 조건을 감수하고 있는 거지.”
“좋아 보이는 검인데? 명검이야?”
“명검이라면 명검일까. 이 나라 사람치고 이 검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걸.”
소상영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는 표정으로 검을 풀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자랑하고 싶지만 애써 억눌렀다는 느낌이었다. 가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났기 때문일까, 얼굴이 풀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소상영의 양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이 검은 자루가 무척이나 화려했다. 옛 양식으로 마감된 검집인데 분명히 배운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한 나라쯤 되던 시대의 것일까?
금이 덧대어진 것도 모자라 홍옥에 청옥, 그리고 야명주를 갈아서 음각문양을 덮어 빛을 내었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호강하는 느낌의 검.
“후후, 좋은 거 보는 줄 알아.”
검을 반쯤 뽑았다. 검 자체에서 느껴지는 청명한 기운.
이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딘가의 신검일까? 천화는 쇠 특유의 빛깔이 아니라 유리처럼 반짝이는 검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점점 더 많이 뽑혀 나오는데 검의 중간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절반 정도 뽑은 것 같은데 네 개의 보석이, 그것도 색깔이 모두 다르게 짜 맞추어져 있었다.
천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도 금고검이라 하여 결코 범상치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이게 바로 신검이었다. 천화는 이런 검을 다루는 소상영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검의 이름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조금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이, 이 검은 뭐지?”
“후후후, 이 검은 말이지.”
“내가 왔다! 이 몸의 등장이시다!”
“바로…… 시끄러!”
소상영이 가진 물건 중에서 제일 가치 있고 훌륭한 무기를 선보이려던 찰나 들려온 소리로 분위기가 박살 났다. 천화의 긴장된 반응을 즐기고 한껏 자랑하려던 소상영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아, 당신인가.”
천화도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현 형이군요? 형은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요?”
아래위로 잡아 늘린 것처럼 키가 커졌다는 것 말고는 방금 나타난 소년은 이 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수현.
황궁무고에 자리한 다섯 괴인들의 후계자.
아마도 황금향의 다섯 후계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무림인다운 사내.
천화와 소상영보다 두엇 살 많기 때문에 그는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몸은 옷으로 가려도 알 수 있을 근육질이 되었고, 느껴지는 것은 다소 살벌해졌지만 그 얼굴에 새겨진 장난기는 여전했다.
“너희들도 변한 게 하나도 없는걸, 네가 소상영이고 네가 천화지?”
소상영이 버럭 고함질렀다.
“반대예요! 이름은 기억하면서 왜 외모를 몰라봐요!”
“둘 다 인상적이었거든. 그런데 너 예뻐졌다?”
소상영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러는 댁은 더 유치해진 것 같아요.”
“진짜 거시기 달고 있는 남자 맞아? 뭐야, 그 몸에서 좔좔 흐르는 색기는. 갑주를 걸치고 있어도 왜 그 모양이야?”
“벌써 시비 거는 거예요?”
“아, 그건 아니지. 좋게 좋게 지내자고. 예전처럼 까부는 녀석이 아니란 말씀이야.”
그걸 누가 믿어라고 천화는 생각했지만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오자마자 분란을 일으키고 상대방의 언성을 높이게 하는 사람의 말 따위를 믿을 수 있을까 보냐.
“현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천화. 너도 오랜만이야. 흐음, 제법 인물이 사는 걸? 역시 흑옥루 출생이라 그런가, 예전엔 몰랐는데 점점 그럴듯해져?”
“현 형도요. 완전 무림인인데요?”
빙글빙글 웃는 입술만 아니라면 정수현은 굉장히 진지한 인상을 가진 무림인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오뚝한 코와 늘씬한 키와 잘 발달된 근육, 다소 호리호리한 편이지만 그렇기에 근육의 발달이 더욱 잘 드러난다.
흑색의 경장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많이 길러서 한 명의 고독한 승부사, 혹은 야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그 무기도 참 그러네요.”
천화가 정수현의 등뒤를 가리켰다.
정수현이 씩 웃었다.
“이 년 후에 만나기로 했었잖아? 그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안 잊었어요.”
“그래서 다 가져온 거지. 나는 이 무기들을 다 다룰 줄 알거든. 거기 그쪽도 만만치 않은걸? 뭐야 그건, 왜 검이 울어 대는 거야? 신검이라도 가져온 거야?”
“검이 운다니 그 무슨 소리에요?”
“검의 마음을 못 읽어?”
“그딴 걸 누가 읽을 줄 아나요.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하지 마세요.”
정수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헛소리 아닌데……. 영감들 모르는 눈치였고 하긴, 그런 걸 보면 나만 들을 수 있는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말을 진짜처럼 생각하게 하네요. 아무튼 당신의 그건 뭔가요?”
“당연히 영감들의 보물이지.”
“정말 충격의 연속이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이었다니…….”
소상영이 살짝 이마를 짚었다.
천화도 웃음을 흘렸지만 심장이 방금 전보다 훨씬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저 나이에 이미 독행문의 다섯 괴인보다 실력이 뛰어나게 되었다는 말인가? 후계자라고 해도 오보추혼마의 다섯 가지 보물 모두를 사용하는 건 용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중 가장 경지가 높은 무기를, 그것도 전대에 사용하고 있는 이를 꺾어서 획득하는 것. 그게 독행문의 다섯 가지 보물, 오보였다.
그런데 지금 정수현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무기는 총 다섯 가지.
검과 봉, 유성추, 채찍, 활이었다.
또한 다리에도 푸른색의 각갑과 손을 덮은 장갑도.
독행문에 전해지는 모든 무공을 다섯 괴인보다도 성취가 높다는 의미였다.
천화가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이거 이 년 전보다도 훨씬 무서운걸요?”
“그러는 천화, 너도 그렇잖아? 네 심장 소리가 빨라졌지만 그게 두려움 때문은 아니지? 호기심, 그리고 흥미…… 싸워 보고 싶어서 네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거잖아. 이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으니까 이미 한 번 꺾은 상대와 싸우고 싶은 거 아냐?”
“절 싸움꾼으로 만들면 곤란해요, 현 형. 그냥 저런 경지에 오른 이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애송이의 저항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정말이지, 사람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한다니까. 어이, 소가야.”
“누구 맘대로 소가예요!”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면 이 나에게 형이라고 해라.”
“시끄러워요.”
이 년 전에 있었던 다툼. 두 명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며 천화는 익숙한 향수를 느꼈다.
분명히 즐거웠다.
그 엄청난 수련 과정을 버티고 여기에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과의 약속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천화가 웃었다.
“하하하.”
소상영과 정수현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하하하하하, 정말 재밌어요.”
천화가 눈물까지 조금 흘려가며 웃었다.
천화는 이런 것을 바랐다.
또래와의 선의 경쟁, 그리고 큰 것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가 결과물을 확인하는 것.
“그러고 보니 그놈은 어디 있지? 설마 안 온 것은 아닐 텐데.”
“그놈?”
“그 왜 미륵이 있잖아.”
“……독고삭이에요. 미륵이가 뭐예요, 미륵이가. 그리고 미륵 님 함부로 부르면 천벌 받아요.”
“아, 이런데서 깐깐하다니까 장군부 녀석은. 알았어, 다르게 부르면 되잖아, 다르게. 그럼 다시 묻겠는데, 고삭이 말이야. 그놈 어디에 있는 거야?”
“독고가 성이고 삭이 이름이거든요! 삭이라고 말하든가 독고 녀석이라고 말하든가 해야죠!”
“너무 깐깐하잖아. 이 정도는 봐줘.”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 아, 맘대로 해요.”
소상영이 더 이상 왈가왈부하기 싫은지 이마에 손을 짚고 뒤로 물러났다. 천화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독고삭도 없네요.”
“흐음, 설마 약속을 어긴 건가? 아니, 지가 약속을 잊었다고 해도 어른들이 가르쳐 줄 거잖아. 오늘 황금향에 도착할 것, 뭐 이런 식으로.”
“그러게요.”
“그건 확실히 좀…… 이상하네요.”
소상영조차도 고개를 갸웃하면서 독고삭의 부재를 의심했다.
그때였다.
“……어.”
세 명의 귀가 움찔한 것처럼 보였다.
“……있어.”
세 명은 감각을 잔뜩 키운 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석. 빛조차도 여긴 싫어하고 들어오지 않을 그런 황금향의 구석자리에, 뭔가가 있었다.
완전히 그림자와 일체되어 버린 듯한 남자. 그림자에 높이를 부여해 주면 이런 게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두운 녀석이었다.
이 대목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는 세상 천지에 단 한 명뿐이었으므로 정수현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도, 독고삭?”
“……그래.”
한 열흘 밥을 못 먹고 있는 소년이 피리를 불 때 내는 것마냥 힘없고 메마른 소리였다.
“세상에! 퀭한 것도 모자라 어두워졌어!”
정수현이 경악하고.
“……금위반은 도대체 무슨 공부를 시키는 거지? 어째서 예전보다 상황이 심각해진 거야?”
소상영조차 의문을 느끼는데 천화는 가벼운 공포를 느꼈다.
“이 미칠 듯한 존재감이라니, 암살조 같은데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답이 안 나오겠는걸?”
“어! 그러게!”
금위반의 역할 중 하나가 요인 암살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소상영과 정수현이 독고삭을 쳐다보았다. 이 년 전의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한 명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독고삭은 그림자와 동화된 채로 다 죽어 가는 말로 속삭였다.
“묵영월야의 비의를 습득하는 중이다…….”
당대 최고의 암살 집단 묵영월야.
그들의 비의라면 당연히 암살밖에 없다.
세상에,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