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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20화)
七. 황금향(5)
천화가 물었다.
“즉 황금향이란 황궁에서 길러진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라는 거죠? 무림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래,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 딱딱한 어투는 문희의 그것.
천화가 무릎 꿇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들 황금향은 무림에 나서면서 여러 특권을 가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돈에 구애받지 않고 무공을 익히는 것도 자유로우며, 내공도 일정 수위 이상이 보장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난 자, 이 경우는 무공의 수위와 판단력 따위 등을 합쳐서 결정하는 거겠지만… 아무튼. 이들 중에서 성적이 가장 상위인 자는 황금패주(黃金覇主)가 된다고 한다.
“황금패주요?”
“그래, 가면을 쓰고 곤룡포와 흡사한 황금색 용포를 입게 되지.”
“세상에, 그게 가능한가요?”
천화가 경악했다.
이렇게 왕권이 확실한 이때 왕을 사칭하거나 그와 비슷한 옷을 입는다는 것만으로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세상의 그 어떤 황제도 자신과 같은 옷을 입는 이를 곱게 봐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문희는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의 명령이니까.”
“세상에!”
황금패주, 즉 환상향에서 제일 뛰어난 자는 용포를 입을 자격이 있다.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황제가 직접 말했다고 한다.
천화의 몸이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천화는 그걸 어떤 감정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흥분, 혹은 희열. 혹은 또 다른 어떤 감정.
천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희의 담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 그들을 만나 본 느낌이 어떠하더냐?”
“최고였어요.”
천화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좋아요. 강한데다 그들만의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 빛나고 있었어요.”
세상 어디에다 던져둬도 자신의 별을 찾아서 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이들.
천화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퀭한 눈빛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독고삭도 그랬다. 지독히 고난스러운 신공을 익히고 있느라 그렇게 폐인 비슷하게 되었지만 거기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지? 그들은 오늘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해질 거야. 재능이 유달리 뛰어난 그들이 독기를 품고 발전하려고 할 거야. 그렇다면 이쪽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나는, 최소한 나만큼은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진 않아. 천화, 네 생각은 어떻지?”
“어떠냐면?”
“지금까지 경험했던 수업보다 훨씬 고난스러운 수행이 이어질지도 몰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 보고 싶어? 이 년 후 재회했을 때의 그들과 비견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여 황금패주가 되어 있을 자신을 위해서.”
천화는 입을 다물었다.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입가에 서린 만족스런 미소가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문희 엄마는 참…….”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은 이미 한껏 주먹 쥐어져 있었다. 몸속에 깃든 황금의 단환이 그의 기분에 맞춰 용솟음쳐 육체를 지상 최고의 생물, 그것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문희 엄마는 말을 참 잘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천화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외쳤다.
“저, 흑옥루의 후계자인 천화! 더 힘겨운 고행을 요청합니다!”
“좋아.”
문희는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헤헤.”
“아주 훌륭해, 역시 내 아들이야. 좋았어.”
문희가 몹시 드물게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을 하고서 천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년 후, 그들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도록 가르쳐 주겠어. 엄마를 믿어. 각오와 신념, 그 이상의 성과를 보여 줄 테니까. 날 믿지?”
천화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믿고 있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저 하늘 아래의 어떤 누구보다도.
“믿고 있어!”
……그리고 이 년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헛된 시간 낭비였을지도 모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믿고 있다는 말 따위 하지 말걸.’ 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세월.
“약해, 부족해, 느려, 모자라, 그게 네 전력이냐? 응?”
다분히 도발적인 외침에 따라 그동안 감춰 왔던 봉인을 풀어내는 소년이 한 명.
아기였고 남자아이였고 소동이었고 이제는 소년이 된 이가 황금색의 도신을 가진 검, 금고검을 역수로 쥐고는 황금의 서기를 내뿜었다. 입고 있는 옷자락이 연신 펄럭거리며 소음을 일으키고 주변의 공기를 울린다.
웅웅웅웅웅!
공기가 울리는 것 이상으로 떨리는 검자루.
황금색의 빛을 띤 이 금고검은 어마어마한 내력을 담고 용틀임과 같은 소리를 내면서 진동하고 있었다.
소년의 앞에서 화극(畵戟)을 양손으로 쥐고 막아서는 여인은 세상에서 십요궁희라 불리는 자. 화명은 전희.
전희 악자연, 군문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악 씨 세가의 여식이자 궁희였다.
“와 봐! 그게 네 전력이라면, 나를 거꾸러뜨려!”
“하아아아아아압!”
소년, 천화가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황금색의 검신에서 황금색의 서기를 머금고 황금색의 검기(劍氣)가 석 자 이상이나 뻗어 나왔다. 어깨까지 들어 올리는데 검기가 지나간 대기가 파형을 그리며 일그러진다.
어마어마한 열기를 담은 검기가 금고검의 떨림 맞춰 물결치듯 흔들리고 이윽고 전력을 다해 뿌린 손의 흔들림에 따라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담고 검강(劍|)이 된다.
전희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화극을 움켜쥐고 전력으로 버티고 섰다.
전쟁에서 장군을 보호하기 위한 직책. 덕분에 전희는 그 살벌한 화명과는 달리 누군가를 보호하는 쪽에 자신의 전력을 드러낼 수 있었고 이번 한정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천중백제성(天中百濟城).
그 자체가 하나의 성벽이 되어 모든 공격에서 버틸 수 있는 최상승의 무공.
기가 실체를 갖추어 푸른빛을 띠고 구체를 그려간다. 그리고 몸에서 세 뼘쯤 떨어진 곳에서 고정되어 외부의 그 무엇 하나 들어올 수 없는 공고한 철벽을 만들어 낸다.
저 흉노의 황제라 칭해지는 선우(單于)의 일격조차 막아 내고 저 묵영월야(默影月夜)의 필살검조차도 튕겨내고 혈전수(血電手), 파천일격(破天一擊)조차도 버틴 바 있는 이 강고한 방벽 위로 황금의 벼락이 떨어진다.
그 벼락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패도적이고 우악스럽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전희는 자신이 자랑하는 신공이 깨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다. 허탈하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소년은 천화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궁희들이 모든 것을 걸고 키워낸 아이였으니까. 오히려 그 성장을 기뻐해야 마땅할 터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녀석.’
마냥 흑옥루에서 사랑 받고 살아갈 것 같은 순진한 아이였던 그는,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시간 참 빠르구나.’
조금만 놀려도 으앙 하고 울어 버리고 그러다가 군것질 거리를 가지고 돌아오면 안 울었던 척 눈가를 비비적거리면서 걸어오고 양팔을 벌리고 가슴을 비워 주면 와앙 하고 달려와 안겨 버리던 녀석.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걸로 충분해.’
전희가 화극을 들어 올렸다.
때마침 장벽을 뚫고 탐욕스럽게 쳐들어오는 검기가 보였다. 검기는 화극과 맞부딪치고 불똥을 튀었다.
잠시의 마찰.
그러나 탐욕스러움을 버티어 낼 수는 없었던지 화극의 자루는 두 동강으로 깨끗이 분질러져 버리고 황금의 검기가 전희의 머리로 닥쳐든다.
전희가 훌쩍 피했다.
두 동강 난 화극과 산산이 부서진 천중백제성, 그리고 내력을 잔뜩 일으켰기에 솟아난 땀방울이 그녀의 처지를 실감하게 한다.
“졌어.”
천화가 빙긋 웃었다.
“응.”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니야, 왜냐면 나는…….”
“응, 말하지 않아도 알아.”
“이 차전의 시작이야.”
다시 한 번 전희가 날아올랐다. 천화가 그에 맞서 응수했다.
무기가 맞부딪치고 불똥을 튀고 궤도를 읽고 슬쩍슬쩍 피해가며 반격을 꾀한다. 너무나도 서로를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부딪치는 일격은 그야말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아직 부족해, 이걸로는 모자라. 더할 수 있잖아?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훨씬 더 정확하게 해 보란 말이야!”
“후회할 거야, 전희 엄마!”
채앵 하고 검과 화극의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청아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이윽고 모든 궁희가 모여 전희와 천화의 대련을 보고 있었다.
품에 넣고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감쌌던 새가 이제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다.
아쉽지 않은 이 하나 없지만 그녀들은 놓아주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좋은가…….”
우희 소소군이 조금 샘이 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헤어진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 몇 년이나 남았으니까.”
흑희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겨우 몇 달 어린 우희를 달랬다. 두 명의 사희가 서로를 감싸 안고서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사내아이란 순식간에 쑤욱 자라 버려서 문제야.”
“그래도 어린애인 건 변함없지만 말이야.”
“아직 마음껏 안아 주지도 못했는데.”
“하여간 사내아이라니…….”
춘희가 시선을 돌려 옆에 선 이를 바라보고 봄의 향기가 묻어날 것 같은 미소로 물었다.
“왜 그러니? 왜 그런 표정이야?”
“표정?”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한 표정이야.”
구희 단리서라가 조금 허탈한 듯 한숨을 쉬었다.
“비무.”
“그렇게 어렸었는데 벌써 비무까지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니?”
“응.”
“그런 게 시간이라는 거지. 괜찮아, 서라.”
천화의 어머니이자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한 흑옥루의 최고 연장자 춘희 주아란이 깍지를 끼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들의 아이인걸.”
“정확히는 내 아들이지만.”
“찌릿.”
“모두의 아들이죠. 네네.”
이 부드러운 분위기가 마음이 들지 않는 듯 툭 하고 요희가 말을 꺼냈다가 이내 춘희의 눈초리에 급히 수그러들었다. 요희는 고개를 숙였다가 침울한 표정의 혈희를 보았고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흑의의 손을 감싸 쥐었다. 누구보다 어린 혈희는 그 의도를 깨닫고 조금 흠칫했지만 곧 요희의 품에 안겼다.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자아, 우리 모두 열심히 하자. 웃으며 떠나보낼 수 있도록.”
“네에, 그래야지요.”
“그리고 이윽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올 수 있기를.”
뱀의 그것을 닮은 웃음을 지으며 쌍둥이 기녀가 팔짱을 끼고 까르르 웃었다.
“아무렴요, 돌아와야 하지요.”
“그건 그렇지, 후후.”
“그렇지 않으면…… 우후후.”
“당장 말하고 싶어, 아이!”
“그날을 위해서 아껴 두자!”
끄덕.
“오호호호호!”
“훗…….”
제비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다가 돌아오길 수 번째. 그동안 황궁의 구조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젊은 설악 선생도 점점 대학사 다운 면모를 찾아갔다.
변하지 않는 것은 흑옥루의 기녀들 뿐.
이 년.
사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시간.
소동이 소년이 되는 시간.
그리고 서로가 최고라고 믿었던 이들이 서로를 다시 마주할 수 있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