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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9화)
七. 황금향(4)
공기가 흔들린다.
몸 주변의 사물이 일그러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한다.
“……진짜 괴물이군.”
식은땀이 흘렀다. 정수현은 웃고 있었지만, 자신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땀을 줄줄 흘리는 정수현의 모습은 분명,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황금빛 서기라니…… 생각나는 무공이 있어. 하지만 그건 아닐 테지.”
천화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아닐 거예요.”
“아니라 이거지?”
“네.”
천화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환우일기담이 환우제일존이 썼던 그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주 효능이 비슷한 다른 무엇일 거라고 생각했다. 요희가 가르쳐 준 이 내공심법은 그만큼 위력적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색적이고 괴이하다.
그렇기에 천화는 진짜임을 알면서도 아닐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누가 날 기습해서 내단을 빼먹는단 말이지!’
……천화는 살아 있는 영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 갑자의 내단이 그의 단전에 굴러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넌 피가 다른 동생이면서, 최고의 맞수라고 인정하겠어. 그러니까 나도 전력을 다하지.”
천화가 자랑하기 위해서 내공을 선보인 건 아니다.
상대는 환우제일존의 환우일기담을 펼칠 자격이 있었다.
정수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장법은 실로 파괴적이며 위력적인 장공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무림의 최고봉에 위치한 무림삼성이 태어나기도 전, 나라가 바로 서기도 전의 일이다.
육백 년 전의 무림은 지금과 같은 구도가 아니었다. 마교의 발발이 없는 조용한 시대. 당연히 사파로 규정된 세력이 크게 성장해 있었던 때가 있었다.
팔십팔황(八十八荒)이라 불리는 사파의 최강자들. 거기서도 사천왕(四天王)이니 오궁주(五宮主) 따위로 분류되었지만 정점은 대개 둘로 꼽혔다.
독행신군(獨行神君) 군여람.
오보추혼마(五寶追魂魔) 서동악.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최고의 자리에 자신만이 적합하다고 믿던 둘은 사파의 정점을 가리기 위해 일대일로 맞붙기를 원했고 대망의 그날.
누구 하나 죽을 기세로 싸워 댔던 그들은 상대방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 당황하고 자신의 입가에 서린 웃음에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결국 승부를 내지 못했지만 그들에겐 진정한 친우가 생겼기에 가장 만족스런 비무였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 그날.
성격이 모질어 언제나 홀로 다니는 독행신군과 잘난 체가 너무 심해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오보추혼마는 마치 생이별한 형제처럼 친해졌고 이후 매일같이 함께 다녔다고 한다. 둘 중 하나가 여자였다면 분명히 결혼하고 자손까지 보았을지도 몰랐다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며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맞추어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을 먹고 무림을 은퇴할 때가 되자 서로의 절예를 합쳐 독행문이라는 문파를 만들었다. 당대 사파 최강자들의 문파, 사파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무림인들은 믿었다.
문제는 무공의 난이도였다.
안 그래도 강력한 무인 둘의 무공을 중구난방 합쳐 버렸기에 익힐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강호를 떠돌며 간신히 모은 다섯의 고아에게 다섯 조각으로 나눈 무예를 선물했다. 다섯 명은 오보추혼마라는 별호의 근원이 된 다섯 가지의 보물을 나눠 가지고 다섯 가지의 각기 다른 절예를 익혔다.
그리고 강호로 출두했는데 그 실력은 예전의 독행신군과 오보추혼마 못지않았다.
이 엄청난 위력의 무공에 경악한 이들은 소문에 소문을 덧붙였고 이윽고 강호에 또 한 가지 전설을 추가하고 말았다. 오독문의 모든 무예를 한 몸에 익힐 수 있다면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설이 그것이었다.
그 전설을 이룰 이를 위해 마련된 별호까지도 있었다.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고 무림의 전설로 남겨질 별호.
그게 바로 독행추혼(獨行追魂).
오보추혼마의 다섯 가지 보물[五寶], 즉 수라궁(修羅弓), 교룡편(蛟龍鞭), 뇌정추(雷精錐), 주광봉(柱廣棒), 삭풍검(朔風劍)으로 사용하는 모든 무공을 익히고 독행신군의 각갑(脚鉀)과 수갑(手鉀)으로 사용하는 무공을 익힌 자가 얻을 칭호다.
그중 독행신군은 마신각(魔神脚)이라는 각갑과 명왕수(冥王手)라는 수갑을 차고 패도적인 무공을 펼쳤는데, 명왕수의 장법은 그 누구도 피해 없이 상대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유래를 가진 독행문의 후계자. 정수현의 손바닥이 파랗게 달아올랐다. 뿐만 아니라 대수인(大手印)의 그것처럼 부풀었다.
“명왕수!”
이것이야말로 패도(覇道)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장법.
그런 가운데 한때 천하제일인의 영역에 발을 들였던 자의 독문무공답게 다채로운 묘리와 어디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 지닌 장법. 마공도, 사술도, 그렇다고 정도의 그것처럼 올바르지도 않는 패도 그 자체의 무공이 천화의 호신강기와 부딪쳤다.
쩌엉! 거대한 수정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반조차 흔들린다.
당장 겨루는 이들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경지에서 내공과 내공, 무공과 무공이 맞부딪친다.
사희는 천화의 요청에 맞춰서 무공을 전해 주었고 전희는 피를 토할 수련을 통해 천화가 바라는 전투 방법을 익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완성된 후발선제(後發先制).
상대의 공격을 읽고 후의 선을 전개하는 기예.
양손으로 검을 쥐고 가슴 앞에 조금의 비뚤어짐도 없이 들어 올린 상태에서 가라앉는 눈으로 지켜본다. 공격할 틈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빈 곳을 공격하기 전 닿는 검은,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만큼 강력하다.
건곤일척이라고 말할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압도적인 힘을 머금고 휘두르는 칼날의 폭풍 속에서 버티고 일격을 노리는 그것을, 승부사의 생각이라고 얕잡아 볼 이도 있을지 모른다.
칼이 없는 지금이라고 해도 후발선제를 위해 눈빛은 단 한 순간을 위해 타오르고 있다.
명왕수가 천화의 호신강기를 꿰뚫기 위해 닥쳐드는 그 한 순간. 천화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정수현의 명왕수를 양손으로 붙들고 찔러 들어오는 기세를 죽인다. 하지만 정수현 또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천화는 후발선제의 묘리를 사용한다.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기세를 이용하여 공격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미 출수할 때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정수현은 특유의 전투감각으로 천화가 명왕수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도리어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눈치채고 기대했다는 듯한 섬뜩한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미소 짓는 것은 천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재라고는 할 수 없는 천화는 금의침을 통한 천정사상대법으로 체질을 개선,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 반응속도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라 있고 눈으로 보고 깨닫는 그 순간 몸이 움직인다.
명왕수가 막히고 천화가 양손을 감듯이 들어 정수현을 끌어당긴 한 순간.
정수현이 끌려 들어오면서 자세 이동을 마치고 도리어 재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천화는 정수현의 무게중심이 변하고 근육의 밀도가 변하는 것을 확인하고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예정했던 반격이 아닌 다른 반격을 가했다.
즉, 반격에 대한 재반격의 반격.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여기서 딱 한 명이었다.
대장군부에서 금의침을 통해 역시 체질을 개선한 소상영. 그는 눈 한 번 깜빡일 동안 일어난 이들의 변화를 또렷이 보았다. 그 또한 초인의 반열에 올라 무공 없이도 생각과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이였으니까.
“믿을 수가 없군.”
약관(弱冠)은커녕 아직 엄마 치마폭 속에서 있어도 부족함이 없을 나이였다. 이곳에 모인 소년들은 다 그랬다. 젖살도 빠지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도 어른들에게 웃음만을 줄 뿐인 그런 이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소상영이 탄식했다.
“이게 황궁의 저력이란 말이지.”
황제가 마음먹고 무인을 만들면 이렇게 된다.
여기의 네 소년,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한 명.
그렇게 다섯이 무림으로 나가면 분명히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이다.
소상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림은 이들 황금향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아아악!”
소상영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정수현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와 대련하던 천화도 역시 튕겨 날아갔다. 접점 지역의 바닥은 깊이 함몰되어 있었고 허공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더 심한 피해를 입었는지는 자명했다.
정수현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천화가 정수현의 주먹으로 찢겨나간 옷자락을 털었다.
“만만치 않아, 정말로…….”
전화가 이미 상대방의 반격을 예상하고 반격을 준비했는데도 피해를 입었다. 찢겨진 옷자락과 가슴 한복판을 문지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정수현이 반격에 당하면서도 피해를 입힌 것이리라.
이곳에서 최강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소상영은 어린아이 특유의 젖살이 빠지지 않은 동그란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 쉬었다.
“이래서야…….”
또래의 수준은 말 그대로 예상 외였다.
한층 더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이 정도로 과신했단 말이지.”
스스로가 환멸스러워 견딜 수 없다.
소상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켜보고 있던 독고삭도 한 차례 실력을 겨뤄본 정수현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마음은 천화도 같았다.
하지만 이들과 조금 다른 감정이 있다면 바로 즐거움.
남성이라면 시종과 일부 나이 많은 중신들만을 보아 온 천화에게 있어 동경하던 무공으로 또래와 어울릴 수 있다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와, 정말 놀랐는데!”
“놀랐다로 끝나는 건가요?”
소상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지만 정수현은 웃고 있었다.
“정말 멋져! 다들 이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겠지? 진심으로 황금향이라는 것에 대해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고! 황금향에 들어오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뭐라고요? 그럼 본래는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는 거예요?”
“당연하지. 사실 황금향이라는 곳은 실력도 없는 녀석이 지위와 신분만 믿고 잘난 척을 할 줄 알았단 말이야.”
“허, 황상께서 명하신 일에 그런 얼치기들이 포함될 것 같나요?”
“응, 이렇게 실전을 겪어 보니 알겠어. 이봐, 우리들 좀 더 커서 오자.”
천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솔직히 말해도 될까? 나만한 녀석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
정수현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래서 조금, 놀았던 감도 있어. 하지만 말이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손댈 수 없을 만큼 떨어질 거라는 걸 알았어. 그러니까 이 년 후 다시 보자. 이 년 후에는 제대로 몸을 만들어 올 테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래도 되겠지요?”
정수현이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몇 명. 워낙 기척도 없이 서 있던 터라 눈치채지 못했다. 소상영은 그들 중에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신의 사부 중 한 명을 보고 급히 자세를 바로 했고 있는 듯 없는 듯 혼자 중얼거리고만 있던 독고삭도 어느 정도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내가 바로 무림의 호걸이다!’ 라고 써 붙인 듯한 인상의 노인도 있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었는데 체격은 현직 장군보다도 훨씬 컸다.
“의도하지 않은 좋은 효과가 발생했군.”
독행문의 다섯 괴인, 그중 한 명으로 추측되는 덩치 큰 노인이 말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곱상한 외모에 화려한 차림새의 청년이 대답했다.
“뭐, 좋지 않은가. 이렇게 한다면 예상했던 것보다 열심히 할 수 있을 터.”
갑옷을 갖춰 입은 장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럼 이 년의 시간을 더 사용할 수 있게 됐네요.”
그리고 그들 덕분에 잘 보이지 않았던 여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천화가 고개를 돌렸다. 덩치 큰 남성들이 주저하면서 거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서 단정한 옷차림에 달콤한 감귤 향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흑단 같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진주와 황금으로 장식된 비녀를 세 개나 꽂은데다 하얗고 하얀 피부에 긴 목, 단아한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미인, 사희 사영령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바보 아들, 따라와요. 아직 수업이 덜 끝났으니까.”
“여기서까지 바보라고 부르진 말아 줘.”
천화가 투덜거리면서 사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느껴지는 시선에 천화가 일행을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들 그래?”
다들 침묵.
이 압도적인 미인을 앞에 두고서 남자로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소년들이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었다. 물론 천화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아리따운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는 것 따위는. 천화는 늘 보는 얼굴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희 옆에 다가섰고 그녀와 함께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흑옥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