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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8화)
七. 황금향(3)
황금향은 소조직이다. 그러나 필요에 의해서 조직되었고 그 소속원은 거대한 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서열을 정하기 위한 비무, 혹은 싸움은 꽤나 치열하게 전개될지도 모른다.
천화는 이 정도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바보천치라고 매도하고서 힘없이 웃었다.
“난 아무래도 좋아요. 황금향에서 우두머리가 된다고 해도 별로 기쁘지도 않고 명예 같은 건 뭐…… 상관없어요.”
명예 같은 건 품질 나쁜 진주 귀걸이보다도 가치가 없다 생각할 여성들이 태반인 흑옥루의 궁희들이다. 여기서 가장 서열이 낮게 된다고 해도 별로 탓하지 않을 것이다. 천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꽤나 말하기 까다로운 내용이었는데 천화가 너무 쉽게 대답하자 정수현은 기가 막혔다. 소상영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흑옥루는 그래도 좋은 거야?”
“네, 상관없어요. 뭣하면 내가 책임지면 되겠죠.”
확신하는 천화를 보며 정수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녀석은 그릇이 큰 건지, 그냥 넉살이 좋은 건지 모르겠네.”
“뭐, 그렇게 물러난다고 해도 위쪽에서 허락할리는 없지만, 너 참 웃기는 애구나.”
“이상한가?”
“당연히 이상하지.”
“당연하잖아!”
두 명이 동시에 대답하는 소리에 천화는 픽 하고 웃고 말았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아니 왜 하필 같이 말하냐.’ 느니 ‘우리 혹시 마음 맞는 거 아냐?’, ‘뭐야, 그 오싹한 말은!’ 이라는 식으로 아웅다웅 싸워 댔다. 마음 안 맞을 것 같아 보이는 둘은 생각보다 잘 어울려 보였다.
둘의 다툼이 끝났다.
서로의 취미와 특기, 생년월일 등을 알아보다 보니 나름대로 서열이 정해졌다. 그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소년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동정심이 가는 안색이 퀭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독고삭이라고 말했는데, 현재는 천축(天竺)에서 유래한 외공을 익히느라 이렇게 메말라가고 있다고 한다. 극한까지 체중을 줄이고 몸의 내공을 축척했다가 서서히 쌓아 가는 과정에 있다던가.
“그래서 익히는 무공이 뭐야?”
독고삭은 성대까지 말라 버린 듯 버석버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이들이 경악했다.
“흑미륵신공(黑彌勒神功)이라고!”
말하기 싫어하는 독고삭을 어르고 달랜 결과 익히고 있는 무공의 이름이 흑미륵신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소상영과 정수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구석에 박혀서 하루 종일 혼잣말만 구시렁거릴 것 같이 생겼는데 그런 걸 익히고 있고 게다가 사 성의 성취라고? 흑미륵신공을 익힐 때는 다른 무공을 익힐 도리가 없을 테니 이미 기반은 충분히 다져졌을 텐데…… 굉장한데?”
정수현은 이를 드러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형으로서의 풍모가 돋보이던 그도 어쨌든 사내이긴 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난 또래에서 나보다 무공의 성취가 높은 녀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있었어. 당연하지, 그렇게 영약을 먹고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신공을 익혀서 벌써부터 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는걸.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하루 내도록 무공을 익히는 나날이었지. 여기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어. 당연히 나는 황금향의 향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뭐? 흑미륵신공? 내공이 삼 갑자가 아니면 반드시 주화입마를 입고 단전이 산산이 부서져 목내이(木乃伊)가 되어 버린다는… 그걸 익히고 있는 녀석이 있다니! 게다가 까다롭긴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걸 극성으로 익혔던 이는 미쳐 버렸다고 하지! 그럼에도 강함에 이끌려 흑미륵신공을 찾던 이들은 남겨진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탄식했고. 그런 신공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익히고 있다고! 이것 참, 손발이 다 떨리는 걸?”
정수현이 소상영과 천화를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내가 여기서 최고일 거다, 그런 생각 말이야!”
소상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난 또래 최강이에요. 뿐만 아니라 중견 고수를 만나도 물러서지 않고 제압할 자신도 있고요.”
“천화, 너는 어때?”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천화는 솔직하게 속마음을 답했다. 정수현이 미소를 지으며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너희들, 한 판 붙어 보자.”
“사양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을 건가요?”
소상영이 어깨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은 분명히 무기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잡힐 리가 없었다. 소상영의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흘러내린 머리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상영이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부끄럽냐?”
소상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그렇다 답하고 있었다. 검을 수족같이 다뤄왔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검이 없으면 저렇게 당황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천화가 손을 들었다.
“저도 검을 사용하긴 하는데 다른 수법도 좀 익히고 있어요. 저와 붙어 볼래요, 현 형님?”
“괜찮겠어?”
“사정을 조금만 봐준다면 괜찮겠죠.”
당당하게 나서는 정수현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천화가 바라던 무림인이 저기에 있었다.
정수현.
아직 젊고, 아니 젊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나이이지만 그 가슴에 품은 호기와 스스로의 자긍심은 이미 당당한 무림인과 다름없었다.
“흑옥루의 천화입니다.”
가볍게 포권. 처음으로 해 보는 포권이지만 별로 어색하진 않았다. 예를 지키는 모습에 정수현은 웃음을 보이고는 역시 포권을 했다.
“황궁무고의 정수현, 그럼 간다!”
정수현이 팔을 뻗었다.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힘이었다. 천화는 순식간에 몇 가지의 생각을 했다.
‘막을까? 회피? 반격? 막는다면 어떻게? 회피는 어느 방향으로? 반격은 어떤 식으로?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면 무엇을? 안 맞고 친다!’
실로 찰나(刹那)라는 말이 안타깝지 않을 정도의 사고가 끝난 후 천화는 한 걸음 앞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왼팔을 들어 올려 정수현의 장법을 피하고 손목을 밀어내고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명백했다.
‘순동(瞬動)!’
정수현의 빈 가슴을 향해 팔꿈치를 세워서 찔러든다. 아직은 어린 나이, 강렬한 무공이 없다면 주먹을 뻗어 봐야 그리 큰 타격을 주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 한정으로 파괴력을 증폭하기 위해서 익힌, 팔꿈치로 치기. 신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 중 하나, 거리는 짧아지지만 거리를 희생한 파괴력은 충분히 나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속도도 빨라진다. 동선이 주먹을 뻗을 때보다 줄어드니까.
정수현은 자신의 공격에 겁을 먹기는커녕 주저하지도 않고 파고들어 오히려 공격을 해 오는 걸 보며 일순 만족을 느꼈다. 정수현은 최단거리로 팔꿈치를 접고는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천화의 팔꿈치를 보고는 순식간에 기를 모았다.
내공이 요동치고 몸이 단단해진다. 몸뿐만이 아니라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다.
텅!
공기를 갈랐다곤 믿기 힘든 반탄음(反彈音).
천화가 급히 물러났다. 정수현 또한 한 걸음 물러서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굉장한데?”
정수현은 실로 감탄스러워서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엄청나.”
과연 황궁에서 길러내는 후계자다웠다. 아낌없는 지원이 만들어 낸 총아가 여기에 있었다. 정수현은 반탄강기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분명 심장에 도달했을 공격을 맛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최고야, 다시 한 번 붙자.”
초심의 가벼운 공격으로 상대의 실력을 엿볼 생각은 이미 버렸다. 정수현은 양손에 내공을 일으켜 단단하게 만들면서 허공에 원을 그렸다. 마음을 정리하는 동작 같기도 했고 방어초식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굉장한 상승의 무학이라는 것.
손바닥이 지나간 대기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천화, 너와 사이좋게 되고 싶다는 건 진심이야.”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정수현이 말했다.
“사실 나는 고아거든. 정 씨 성도 영감들 중 한 명의 성에 불과해. 하지만 나쁘진 않아. 그대로였다면 굶어 죽었을 테고, 여기에 있지도 않을 테니까. 특히 너도 성이 없다는 사실은 꽤나 동질감을 안겨 줘.”
“저도 형님으로 모실 생각이에요. 누가 지든 이기든, 이 우애가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요.”
천화는 그렇게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무슨 무공을 쓰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죽을 테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정수현이 그와 닮은 미소를 지었다.
“이 무공은 나도 이제 입문 단계야. 왜냐면 독행문의 무공은 일곱 가지 무기를 쓰는 것으로 이루어지거든. 장법도 있지만 입문 무공과 최상승의 무공밖에 없어. 너에게 표하는 경의다. 받아 줘.”
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모았다.
황금빛 서기가 그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소상영도 구석에 처박혀 퀭한 눈빛을 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독고삭도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저건.”
황금빛의 기운이 대기에서부터 생성되어 천화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천화가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은 환우일기담(?宇一己憺).
저 무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천하제일인 환우제일존의 내공심법으로 전설이라 불러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할 신공이었다.
원시의 자연과 함께했던 환우제일존. 그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천재적인 오성을 전부 쏟아 짐승의 동작을 연마했다.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연 속에는 온갖 위험이 노출되어 있고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혹독하다. 그래서 그는 동작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물들의 힘의 근원에 집중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환우일기담.
인간의 단전에 내단(內丹)을 만드는 내공심법.
역사상 유래도 없고 그를 제외한 누구도 만들지 못한 희대의 무공심법. 무림인이 무예를 익히기 위해서, 혹은 무의 끝을 알기 위해서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반대로 원시적인 자연에 대항한 환우제일존은 그 내공심법을 통해 최강의 생물로 탈바꿈되었다.
자연에 맞서기 위해, 혹은 자연 위에 우뚝 서기 위해.
이 생존본능이 만들어 낸 집념은 이윽고 환우제일존을 천하 최강의 생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환우제일존이 인류의 문명과 접촉하고 말을 배우고 그들을 지배할 때도 그는 스스로를 무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강한 인간이라고… 최고로 강한 생물이라고.
내공심법을 운기하지 않아도 살아가면서 내단이 알아서 자연의 기를 흡수하고 내단의 크기를 불린다. 내단이 타오르면서 선천적인 힘을 부여한다. 빛을 닮은 황금빛 서기를 일으키면서, 내단은 내공이라는 힘을 이끌어 낸다.
사 갑자의 내공이 만들어 낸 내단은 천화의 단전에 있다. 그리고 그 내단은 천화의 의지에 회전하면서 온몸을 서기로 둘러쌌다.
체내의 뭔가가 달칵 하고 바뀌는 것 같다.
기관 창치의 잠금이 풀려나간 것처럼, 육체가 용의 부활을 알리며 황금빛 서기를 풍긴다.
이것이 바로 환우일기담.
아무런 내공도 익히지 않은 채 영약 및 기연을 통해 사 갑자 이상의 내력을 쌓은 다음, 단환 모양의 내단으로 정제한 후 품는 심법.
음양의 조화가 갖춰지지 못한 금수들이나 만든다는 내단을 일부러 정제하여 속에 품고, 엄청난 신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천 년을 사는 영물이나 하늘을 비상하여 날아오르는 용처럼,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생물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엄청난 힘과 감각을 선물한다.
영물이 그 종의 정점에 도달한 힘을 가지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흐르는 먼지의 윤곽조차, 상대의 긴장과 의념조차도 귓가에 대어 듣는 것처럼 크게 울려 퍼진다.
황금색 서기가 몸을 타고 흐른다. 마치 황금으로 덧대어진 듯, 빛을 머금고 있는 그의 몸에는 아무리 경험이 일천한 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