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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다
1화
프롤로그(1)


지독히도 런던스러운 날씨였다.
유주는 창밖에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식은 커피 잔을 천천히 돌렸다. 잿빛 하늘도 서늘할 만치 차가워 보였고, 젖빛 보얀 커피 잔의 감촉도 매끄러우며 차가웠다. 그 감촉이 왠지 쓸쓸함과 비슷한 감촉이라는 생각이 들자 유주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 이런 날 감상적이라니…….
유주가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하얀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의 카페 안에 동양인은 유주 혼자였다.
흑단처럼 까만 머리채를 하나로 느슨하게 틀어 올리고 넥이 깊게 파인 화이트 셔츠에 굵은 짜임의 회색 카디건을 걸친 유주는 가녀린 몸을 소파 깊숙이 묻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오밀조밀 담긴 이목구비는 카페 안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만큼이나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칼과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전형적인 영국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미안. 늦었지?”
필립은 큰 걸음으로 유주에게 곧장 다가오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쩐 일이야? 유주, 갑자기 연락받고 깜짝 놀랐어.”
유주는 필립이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넘겨다봤다.
저 개구쟁이같이 웃는 얼굴을 좋아했었다.
사랑을 속삭일 때, 더없이 진지해지는 눈도,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한없이 뜨거워지는 입술도 분명 좋아했었다. 사랑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좋아했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필립은 콧등을 손가락으로 한 번 만지더니 밝은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이 앞에 우리 자주 가던 펍 없어진 거 알아? 왜 그, 독일식 소시지 맛있던 데 있잖아. 유주 네가 특히 좋아했던 덴데 얼마 전에 없어진 거 보고 영 아쉽더라고.”
조금은 방정맞다 싶을 정도로 밝고 유쾌한 저 목소리도 좋아했었다.
그래……. 좋아했었다.
“…….”
유주의 머루같이 새까만 눈동자가 미동 없이 가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필립은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 샐러드도 참 맛있었는데. 뭐 할 수 없지. 없어진 걸 어쩌겠어? 새로운 데 뚫을 수밖에. 하긴 이 근방엔 널린 게 펍이니 새로운 데 가 보는 것도 괜찮…….”
“언제부터야?”
필립의 말을 끊고 유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의문 서린 눈빛을 했다. 상냥한 그의 눈빛을 보면서 유주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표정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목소리의 변화 없이 다시 물었다.
“루시와 언제부터 잔 거냐고.”
“……!”
유주의 싸늘한 시선에 그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 순간에 미소가 지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유주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없이 추락하는 절망적인 기분을 감춘 채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래. 이 숨기지 못하는 지나친 솔직함조차 좋아했었지.
그리고, 배신당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루시와 내가? 맙소사, 내가 널 두고 그런 짓을 왜 하겠어?”
필립이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려 애써 미소를 짓느라 더 형편없어진 얼굴로 말했다. 농담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유주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몇 번의 터치 후 필립 쪽으로 액정을 돌렸다.
“그럼 이건 뭐라고 설명할 건데?”
휴대전화 액정을 본 필립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아, 아니 이건……. 그,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자신과 루시가 알몸으로 침대 위에서 찍은 셀카가 액정 가득 펼쳐지자 필립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백한 표정으로 계속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를 바라보던 유주가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미쳤지. 무슨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다니…….
더 이상의 미련이 사라진 유주는 토트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서자 헛소리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던 필립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유주의 하얀 손목을 움켜잡았다.
“자, 잠깐 유주! 내 말 좀 들……!”
그의 머리 위로 컵에 담긴 차가운 물이 촤악 소리를 내며 뿌려졌다.
“지옥에나 떨어져.”
유주는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필립에게 싸늘하게 일갈한 뒤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왔다.

음악 소리가 알코올에 푹 절여진 온몸을 시끄럽게 쿵쿵 울리고 있었다.
바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지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홧김에 들이부은 술이 이미 평소의 주량을 훨씬 넘어섰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고 시야가 제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
유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흔들리는 초점을 억지로 바로잡으려 애썼다. 호박색 액체가 담긴 글라스를 들어 올려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위스키가 목구멍을 훑고 내려가는 감각도 마치 남의 몸인 듯 아득했다.
벌써 세 번째다.
2년 사이 벌써 세 번째, 똑같은 방식으로 이별을 맞았다. 심지어 그중 한 번은 침대 위에서 금발의 모델과 뒹구는 애인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사랑? 웃기고 있네.
그녀의 입가가 비틀어지며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주, 넌 남자를 질리게 하는 거 알고 있어? 완벽하지, 잘났지, 깐깐하지. 여자로선 완벽하다고 하지만 너의 그런 성격 어떤 남자가 참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잔소리 심한 엄마랑 사귀는 기분일걸?』

문득 루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루시의 그 말에 깔린 전제가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실제로 자신의 애인이 루시와 뒹굴면서 했던 말이었을 테니…….
우습다. 이유주.
너 왜 이렇게 우스워졌니?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띤 유주가 쓰디쓴 위스키를 다시 들이켰다.
처음 세계적 디자이너 헬렌의 조수 제안을 받고 영국으로 오게 됐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 시키려는 핑크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치열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동양 여자로 앵글로색슨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외롭고 힘든 것이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편견과 차별에 속부터 썩어 가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정신없이 달려가다 먼저 다가온 남자의 손을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이미 그 손을 잡아 버린 후였다.
하지만 그 손조차 똑같은 이유로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들은 그저 동양 여자에 대한 성적인 호기심으로 그녀에게 다가왔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자신을 현혹시킨 뒤, 결국엔 그들과 비슷한 피부색과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여자들과 바람이 났다.
그 지독한 짓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알다니…….
흘러내린 까만 실크 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유주는 문득 저쪽 바에 앉아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술에 취했지만 직업적인 본능으로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한눈에 봐도 그 남자는 꽤나 세련된 감각의 소유자였다. 고급스런 금빛이 도는 머리칼과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눈동자는 아마도 에메랄드 블루……. 그리고 절제된 라인과 날카로운 선이 돋보이는 잿빛 슈트에 매치한 타이트한 블랙셔츠와 실크타이. 견고한 디자인의 메탈시계와 커프스버튼, 넥타이핀까지 세련된 감각으로 매치되어 있었다.
저 스타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들었을 돈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평범한 남자는 아니다. 조각 같은 얼굴과 완벽한 비율의 몸매로 보면 돈 많은 사업가보다는 모델이 더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