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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낙인
1화
프롤로그


작열하듯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열기. 그 어디에도 숨을 공간은 없었다.
멀리 남해의 섬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잔잔한 파도에 요트가 요동을 칠 때마다 까무룩 해지는 정신. 호흡이 끊어질 것만 같다. 숨이 금방이라도 멎을 것만 같다.
절정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선 혼탁해진 눈동자가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힘겹게 떠졌다 감기며 여자는 짙은 탄성을 흩뿌렸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탄성은 사막의 열기만큼이나 뜨겁고 끈적거렸다.
선체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심해처럼 짙은 동공을 따라 남자의 시선이 움직였다. 격정적인 키스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방긋거렸다. 여자가 더 이상은 힘에 버거운지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바닥을 후비듯 긁어대던 손가락이 천천히 기어오르더니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어깨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하아! 그만!”
열정이 스민 탁한 음성으로 그녀가 소리쳤다. 그만하라고. 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방법 따위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남자는 어림없다는 듯 도리질을 치며 깊게 박혀 있는 분신을 더욱 세게 밀어 넣었다. 여자의 여린 속살이 짓눌렸다. 성난 분신이 깊게 파고들수록 중심은 뜨거워졌고, 여자가 뿜어내는 분비물들로 남자의 수풀은 축축한 늪이 되어갔다.
흐르듯 부드러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내려간 손이 도발적으로 솟은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탱탱한 물 풍선을 쥐는 것과 비슷한 감촉이었다. 터트릴 듯 가슴을 거칠게 거머쥐고는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갈라진 몸 사이로 달궈진 불기둥을 밀어 넣었다.
“윽!”
바짝 조여든 여자는 그를 극한으로 몰아간다. 어서 토해내라고. 남김없이 분출하라고. 어서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라고. 그를 자극하고, 유혹했다.
어림없다. 대충하고 끝내버리리라고 생각하지 마. 철저하게 널 가질 거다. 네가 흘리는 땀방울이든 뭐든 모두 내가 가질 거다.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입술을 포갰다. 이와 이가 부딪히고 혀가 얽히더니 진득한 타액이 사정없이 뒤섞였다.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강렬한 키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먹잇감을 쫓는 상어처럼 물러서는 여자의 혀를 휘감아 가졌다.
산소가 부족해진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목을 할퀴고 그를 밀어내는 그 순간까지 뜨거운 탐닉은 이어졌다. 잠시 놓아준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득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매번 사랑을 나누었지만 버거워했다.
정말 어떤 날은 잡혀 먹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며 앓는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추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었다. 그녀의 전부를 차지하고 싶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자는 여자를 들어 올려 턱이 진 갑판위에 눕히고 허벅지를 벌려 세웠다.
“규원 씨…….”
이름을 부르며 내미는 여자의 손을 잡는 대신 남자는 그녀의 벌어진 다리 틈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검고 윤이 나는 삼각지대의 숲으로 코를 들이밀고 문질렀다. 그 어떤 향수보다도 그를 흥분시키는 말초적인 향기가 맡아지자, 흥분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촉촉하게 젖어 있는 샘의 입구에 입술을 대었다. 연붉은 여린 속살이 추릅 빨려 들어왔다. 노련한 혀놀림에 여자의 엉덩이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바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아아아.”
민감함이 극치에 다다른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할퀴며 울부짖었다. 참을 수 없는 자극에 남자는 빠르게 몸을 포개었다.
“이제 내 차례야.”
“이리, 들어와요.”
활짝 열린 여자의 몸 아래로 넘실대는 푸른 파도가 보였다. 여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인어 같았다.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몸과 비현실적일 정도로 흰 피부. 열기로 흐려진 눈동자.
“들어와요.”
인어가 거부할 수 없는 손짓을 하며 다시 한 번 재촉했다. 허연 허벅지를 벌리고 젖은 숲길로 딱딱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하복부를 완벽하게 밀착시켰다. 억눌린 탄성이 입술을 비집었다. 가느다란 목 아래로 탐스럽게 드러난 젖가슴이 그가 허리를 흔들 때마다 출렁였다. 하얀 살 무덤. 잘록한 허리. 바라보는 시선……. 턱을 움켜쥐고 귓불을 잘근거리자 여자의 매끈한 다리가 골반을 휘감았다.
바람이 분다.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인 뜨거운 바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지나 촘촘하게 돋아난 음모의 숲으로 숨어든다. 바람은 이내 부풀었다. 숨 막히게 지독한 열기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로를 이은 채 여자의 다리를 어깨위로 걸쳐들었다.
갑판의 너른 그물막 아래로 출렁이는 파도는 점점 거세졌다. 끝도 보이지 않는 검푸른 물길이 그물막 사이로 아찔하게 펼쳐져있다. 그 아찔한 공간에 여자는 겨우 매달려 있다. 절박해서 더 황홀한 정사. 남자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여자의 골반을 잡고 그 끝까지 도달했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완벽하게 자신을 집어삼키는 통로의 흡착력에 더는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사랑해.”
결국 참아내지 못했다. 견디지 못하고 뱉어내고야 말았다.
지독한 쾌감이 타고 흐르던 뼈마디마디가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신경을 따라 고통이 춤을 추었다.
“아, 제발!”
절망감에 젖은 눈길로 손을 뻗었지만 너무 늦었다. 닿을 듯 닿을 듯 애를 태우며 여자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던져버린 퍼즐 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 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부서진 몸이 검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남자는 몸부림을 치며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자의 조각들에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다. 그물에 발이 걸린 채로,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남자는 절규했다.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수면위로 메아리쳤다.
“윤하야!”
언제나 그렇듯 지독한 식은땀을 흘리며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호흡은 거칠었고 손바닥은 땀으로 끈적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이른 오후. 꿈과 똑같은 거라고는 블라인드 사이로 파고드는 뜨거운 태양뿐이었다.

“네 시 사십 분에 입국한 것 확인했습니다. 어떡할까요?”
가을비치고는 제법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물음이 들려왔다. 손끝에서 타들어가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남자가 물었다.
“집은?”
“시키신 대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명도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
“더 알아볼까요?”
“혹시라도 최희원 씨 앞으로 된 재산들이 더 있는지 찾아봐. 도망갈 구멍은 하나도 없는지, 낱낱이 파헤쳐봐.”
“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깊어졌다.
3년이다. 허송세월을 보내버린 것이.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마음껏 웃으며 살 수도 없었던 시간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원망을 퍼부으며 살아온 시간들. 하루가 멀다 하고 꿈을 꾸었었다. 끔찍하리만큼 달콤한 꿈과 동시에 애타게 부르며 눈을 뜨게 만드는 악몽을 꾸었었다. 시간을 되짚어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내가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를 다시 보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미치게 흥분이 돼. 어떻게 해줄까. 얼마나 철저하게 널 괴롭혀야할까.
규원은 천천히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열쇠가 잠긴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그것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마가 일순 살짝 일그러졌다. 실룩이는 눈썹이 불편한 그의 심기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후우 긴 한숨이 허공을 갈랐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수북하게 쌓인 사진이 있었다.
어깨 아래로 흐르던 머리카락이 짧게 변하였다가 다시 길어졌다. 시간이 그만큼 흘러있었다. 벌써 3년이니까.
윤하가 있는 곳을 찾아낸 건 몇 달 전이었다. 그날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었다. 인내의 한계까지 끝까지 다다르기를. 그래서 인정이나 배려 같은 건 가뿐히 무시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되었다.
얼마 전 그에게 사진이 배달되었다. 카페로 보이는 곳에서 마주 앉아 있는 윤하와 웬 파란 눈의 남자. 웃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잘 웃는 여자였던가.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울컥 배알이 뒤틀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내 시간과는 상관없이 넌 행복했던 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버리고 넌 까맣게 날 잊어버린 거겠지.
그래. 그렇게 웃고 있어. 마지막일 테니까.
손아귀에서 사진은 힘없이 구겨져버렸다. 희미해지는 대신 더욱 깊게 각인 되어버린 여자의 얼굴은 쾅 소리와 함께 서랍이 닫히며 사라져버렸다.



1.(1)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던 햇볕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검은 구름이 뒤덮인 하늘이 온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후드득 소리를 내며 굵은 빗방울들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앞 다투어 뛰기 시작했고 분주했던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니. 부탁한 거 전부 다 가져왔어. 미안하긴……. 어디?”
사거리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던 택시 안에서 윤하는 또다시 제멋대로 꺼져버린 전화기를 노려봤다. 벌써 며칠사이 여러 번이나 똑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아무래도 교환을 해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올 것은 또 뭐람. 우산도 챙겨 나오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기에 하늘은 이미 너무 성이 나 있었고 윤하는 하는 수 없이 은영의 집 앞이 아닌 대로변 편의점 앞에 택시를 세웠다.
우산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간 윤하는 냉장고 앞을 지나다말고 걸음을 멈췄다. 김밥, 샌드위치, 컵라면. 죽 늘어선 먹을거리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윤하는 뱃속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그제야 자신이 점심도 먹지 않았음을 알았다.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한 탓인지 며칠 밤을 새웠는데도 정신은 여전히 또렷하기만 했다.
뭐라도 좀 먹고 갈까.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윤하는 냉장고에서 샌드위치 하나와 우유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카운터 바로 옆에 놓여있는 우산을 함께 계산대 위에 올렸다.
계산을 마치고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윤하는 비닐을 뜯어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뒤꽁무니에 무의미한 시선을 두던 그녀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담았다.
유통기한이 남아 있었지만 조금 시큼한 맛이 나는 것 같아 끝까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느 정도 허기는 달랬으니 그럼 된거다.
여전히 장대처럼 퍼부어대는 빗속을 걸어 골목으로 올라가는 윤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mp3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직도 외워야할 것들은 태산이었고 윤하의 머릿속은 온통 그것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