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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2)
“잘하고 와.”
차 안에서 인상을 구긴 채 앉아 있는 규원은 잘하고 오라던 어머니의 말뜻이 대체 뭘까 고심을 하며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 채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높은 담을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물을 잔뜩 주워 실은 채 유모차를 몰고 걸어가는 할머니는 차가 멈춰선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여유롭게 길을 건너고 있다.
느닷없는 저녁 초대. 그것도 삼원 일가라…….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의중이 느껴졌다. 며칠 전 예고 없던 은영의 저녁 초대도 그랬고 의심쩍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일찍 혼담이 오가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자신도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였고 무엇보다 은영은 스물셋의 어린 나이였다. 아무리 결혼도 일종의 사업이라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감이 있다 싶었다. 그럼에도 자신역시 피할 길이 없다는 것엔 그 어떤 부정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삼원 일가라면 그들의 훌륭한 병풍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인이 안전하게 인도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규원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차창을 활짝 내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던 그 순간처럼 어느 순간 딱 그쳐버린 비로 인해 공기는 깨끗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했다. 온갖 불순물들이 사라진 대기 중은 비 특유의 약간 비릿한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리창에 가득 맺혀있는 빗방울을 와이퍼로 밀어내며 규원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아 물었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가 공중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한 개비의 담배는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얼마 전부터 금연을 시작해놓고도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 또다시 흡연주의로 돌아서버린 자신이었다. 하긴, 담배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푼단 말인가.
Rrrr.
골목길 커브를 도는데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며 통화버튼을 누르는 순간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규원은 본능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이런 젠장!
불과 1미터도 남기지 않는 거리. 까만 우산을 뒤집어 쓴 사람 앞에 차가 겨우 멈춰있었다. 나직이 험악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규원은 입술에 삐딱하니 물려있던 담배를 뱉어내고 차에서 내렸다.
귓가에 이어폰을 꽂은 여자의 눈동자와 정확하게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처럼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는 여자의 고요한 눈길에 오히려 규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을법한 상황이었지만 귀에서 들려오는 강의 소리에 정신이 없었던 윤하는 허벅지까지 젖어드는 물벼락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엉망이 되어버린 바지를 조금 짜증 섞인 손길로 툭툭 털어냈다.
일진이 사납다. 하얀 바지를 입는 게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하얀 바지를 골라들었던 자신을 슬쩍 원망을 해보며 윤하는 우산을 접어들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를 응시했다.
은색의 포르쉐를 몰고 오던 남자는 꽤 장신이었다. 회색이 감도는 값비싼 슈트를 휘감고 있는 남자의 몸을 따라 실례인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다. 도어 위에 올려진 손엔 얼마 전 잡지에서 보았던 은색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저 모델이 얼마였더라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괜찮습니까?”
표정엔 짜증이 서린게 분명한데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하다. 조금은 섹시한, 조금은 나른한 음성. 비가 와서 그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는 젖은 블라우스 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괜히 소름이 돋았다. 끈끈하게 팔위로 들러붙은 천위로 남자의 시선이 덧붙여졌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어쩌면 묘한 흥분감이 타고 올랐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이런 기분이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중에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던 규원의 행동은 여자의 단호한 말에 끝을 보지 못했다.
“안 부딪혔어요.”
“…….”
다시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뒤를 돌아 앞서 걸어가는 윤하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규원은 연락처라도 물어둘걸 그랬나,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우연한 사고였고 지나가면 그뿐인 일이었다. 미련 같은 건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질 테니까.
근사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식탁에 사람들이 마주앉아 있었다. 중간에 졸지에 끼게 된 윤하는 불편함을 감추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은영이 부탁한 자료들만 건네주고 돌아가려했었는데 굳이 집안까지 끌어들이는 은영 때문에 결국은 여기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데만 열중하고 있는 윤하는 남자의 옆에 앉아 앙앙거리는 은영의 콧소리에 슬쩍 눈을 돌렸다.
서규원. 불과 20분 전 골목에서 그를 만났다. 은영의 곁에 서있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은 반가운 것도 같고, 싫은 것도 같고. 낯선 타인에게 애초에 관심을 잘 주지 않는 그녀로서는 허용하고 싶지 않은 관심인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평상시에도 조금 오버스러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과도한 애교를 부리는 은영을 남자는 용케도 참아내고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진짜로 별난 취향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이번에 좋은 성과가 있다고? 제주도 건도 이젠 막바지지?”
물 잔을 들어 입을 가신 최 회장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직 두어 달 정도 더 마무리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덕분에 무사히 완공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덕분은 무슨. 아무튼 자네가 있어 아버님이 상당히 마음이 든든하시겠구먼.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만능일꾼에 이렇듯 인물까지 훤칠하니. 나야 딸만 둘이라 자네 같은 아들을 둔 서 회장님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야.”
“아이 참 아빠는! 이런 사위를 두면 되지 아들이 뭐가 필요해. 딸이 둘이라 멋진 사위도 둘이나 생기겠는데.”
새치름하게 눈을 치켜뜬 은영의 타박에 최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규원을 마음에 둔 것 같은 은영의 태도에 다들 만족스런 웃음을 보였다.
“언제 자리나 한번 마련해서 양쪽 사람들 모두 식사나 한번 하지. 내 수일 내로 한번 기별을 할 테니 그리 전해주게.”
최 회장의 말에 규원은 흠 헛기침을 하고는 은영을 돌아봤다.
“오빠?”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 같은 표정의 은영을 향해 의무적으로 씩 웃어주던 그 순간 건너편에 앉은 윤하와 시선이 부딪혔다.
입술을 오물거려 먹는 것에만 열중하는 여자는 마치 자신들의 일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온 가족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길이 부딪혔을 뿐인데 낙엽이 전부 떨어져버린 한산한 거리를 혼자 걷고 있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한번이라도 웃어본 적이 있기는 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의중은 그 순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은영과 계단을 내려오다 마주쳤던 그 흔들렸던 눈동자가 무슨 의미일까. 쓸데없는 곳에 자꾸만 머무는 자신의 감정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멈춰진 움직임들은 플레이버튼을 누른 것처럼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여자의 움직임은 정지되었다.
서늘한 바람에 펼쳐놓은 책장이 펄럭였다. 이젠 제법 쌀쌀한 날씨다.
2층 은영의 방에 앉아 있는 윤하는 벽면 한쪽을 가득 메운 책들을 훑어보다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에 미친 듯이 빠져 살았던 시집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펼쳐들고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 좋아하는 책을 펼쳐놓고도 이상하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급하게 먹은 저녁이 체한 것도 같고 미열이 있는 것도 같다. 발이 바닥에서 뜬 것처럼 부유하는 느낌이다.
갑작스러운 비를 맞아 감기 기운이 있는 걸까.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한기가 일었다.
“으응, 오빠~.”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가릉거리는 낮은 속삭임에 막 창을 닫으려 손을 내밀었던 윤하는 멈칫거렸다.
대문에서 멀지 않은 편백나무 뒤편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 남자와 은영. 나란히 있는 그들의 하반신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저도 모르게 벽 뒤로 몸을 숨긴 채 커튼 자락을 힘껏 움켜잡았다.
남자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은영의 말처럼 선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침묵. 저 나무 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남자가 돌아가는 것인지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은영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윤하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문을 닫았다. 펄럭이던 책장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울렁거림도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저녁을 너무 급하게 먹은 모양이다…….
“우리 이번 시험 끝나면 어디 여행이라도 안 갈래?”
버스정류장까지 윤하를 배웅 나온 은영이 느닷없이 물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친구였던 은영은 윤하가 보기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든든한 집안과 보장되어 있는 미래.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긴 시간을 내기는 곤란해.”
“계집애. 누가 짠순이 아니랄까봐…….”
“적금 만기되려면 아직 일 년이나 남았어.”
“유학자금? 너 그거 아직도 부어? 휴, 뭣 하러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 내 상식으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윤하의 표정이 딱딱해지는 것을 본 은영이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알았는지 아차 하는 얼굴로 서둘러 말을 돌렸다.
“참, 네가 보기엔 어때?”
“뭐가?”
“아까 그 남자 말이야.”
“아…….”
“그만하면 비주얼이 참 좋지 않니? 우리 아버지가 탐내는 사위후보 일 순위다. 근데 네가 알다시피 딱딱한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잖아.”
조금 전 그 남자 앞에서 온갖 애교를 부렸던 은영이 진심이 아니었다 고백을 한다. 하긴 은영이 좋아하는 남자들. 안다. 그 가벼움의 극치인 바람기가 진득한 남자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꼬드겨야지. 우리 아버지 소원이라는데 못 들어줄건 또 뭐있어? 누구랑 결혼을 하든 그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겠니. 안 그래?”
자신과는 아무상관도 없는 일인데 은영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 길에 다다랐을 무렵 요즘 은영이 새로 만나기 시작한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온갖 콧소리를 내가며 통화중인 은영의 등 뒤로 윤하가 소리쳤다.
“나 알바 늦어서 빨리 가봐야 해. 나중에 보자.”
문이 열린 버스로 빠르게 올라 타버린 윤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하는 그냥 모른 척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플레이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강의실을 나서는 윤하는 자신을 부르는 은영의 밝은 음성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사한 색감의 블라우스 위로 걸친 하늘색 코트자락에 은영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언제보다도 한껏 멋을 부린 모양이 수업이 끝나고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 오늘 어때? 어제 쇼핑 갔다가 산건데.”
“예쁘네.”
“그래? 다행이다. 오빠한테 데이트 신청하러 갈 건데 어울리지 않으면 골치 아파.”
오빠?
“이것 봐라. 트임새가 좀 아찔하지 않니? 혹할 것 같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