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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이방인
1화
프롤로그
“세 번째 작품, <연화(戀花)>입니다. 응찰가 1억 5천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또렷한 발음, 살짝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색을 가진 서희의 음성이, 까만색의 헤드마이크를 통해 경매장에 울려 퍼졌다. 서희의 옆 벽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붙어 있는 전광판에서 일억 오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리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도 일제히 불이 켜졌다. 중국 ‘소더비즈(Sothebys)’ 경매에 출품되었다가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는 유명 작가의 유작에, 모두 뜨거운 관심들을 보냈다.
40평 남짓 되는 이곳 경매장에서는 서희가 몸담고 있는 ‘문화옥션’이 주관하는 대규모의 미술품 경매가 열리고 있었다. 동서양의 고(古)미술품과 그림, 그리고 희귀 컬렉션까지 경매의 대상과 종류는 한계가 없었다. 오늘의 ‘스페셜 이브닝 세일(Special Evening Sale)’ 이벤트를 위해서 지난 두 달간 문화옥션의 직원 전체가 매달렸다. 특별히 동해 쪽에 위치해 있는 ‘엠파이어(Empire) 카지노 리조트’로부터 경매 장소를 제공받아 정, 재계 쪽 유명 인사들이 대거 초청되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의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에 한껏 부응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저기 번호판을 든 손들이 더욱 높은 가격을 부르며, 그들의 화려한 부(富)를 은근히 과시하기 시작했다. 서희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들어 올리는 번호판들 사이를 빠르게 오고 갔다.
“2억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1초. 2초. 가격을 책정하는 마지노선의 순간들이 지나자, 서희는 경매사의 자격으로 최종 낙찰가를 발표했다.
“<연화> 2억, 낙찰되었습니다.”
‘연화’가 물러가고 다음 작품이 단상에 올려졌다. 그 그림을 바라보는 서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이를 담고 일렁거렸다. 아득히 먼 시절, 그 어느 시간의 기억을 떠올린 눈이 아주 잠깐 아련함을 드러냈다. 곧추선 등허리를 따라 회한이 내달리는 듯하여 그녀는 잠시 단상에 기댔다. 경매에 출품된 작품목록을 보며, 그리고 사전 준비 과정에서 이미 한차례 마음을 다잡은 일이었다. 서희는 뛰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잠시 손을 쥐었다 폈다. 이내 깔끔하고 단정한 경매사의 태도로 돌아간 그녀는, 헤드마이크 위치를 바로잡는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번째 작품, <낙원의 이방인>입니다. 서면 응찰가 3억부터…….”
들리는 번호판을 확인하려 객석을 주시하던 그녀는 멈칫하며 이내 말끝이 흐려졌다. 고요하고 기계적으로 가라앉아 있던 서희의 안색이 짙은 의구심으로 탈색되었다. 객석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좌석. 고급 쌍안경을 통해 그녀가 서 있는 앞쪽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 까닭이다. 이런 경매장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서희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쌍안경에 가려진 남자의 눈은 초점을 확인할 순 없었으나 서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3억부터…… 시작합니다.”
쌍안경 아래로 드러나 있는 코와 인중, 그리고 입술과 턱 선은, 멀리서 보아도 어딘가 기묘하게 낯이 익었다. 검은색 셔츠를 감싸듯 부드럽게 떨어지는 핏의 검은색 슈트. 익숙하게 감겨드는 분위기.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그녀를 따라붙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남자의 시선은 한곳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응찰가를 제시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서면으로 선(先)응찰을 한 사람의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이에 쓰여 있는 위력적인 세 글자를 확인한 순간,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최강진.
서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쌍안경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였다. 어쩌면 무의식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의미를 읽을 수 없을 만큼 무감하고 건조함에도 경매장 전체를 휘어잡을 정도로 강렬한 그의 분위기에서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단서들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응찰 없으십니까?”
잊고 싶었으니까.
“……낙원의 이방인…… 삼…… 삼억에 낙찰입니다.”
잊고 살고 싶었으니까.
서희는 허리 뒤로 손을 감추었다. 땀이 밴 손바닥을 스커트에 정성스레 문지르다 순간 새어 나간 짙은 한숨 소리가 헤드마이크를 통해 장내에 울려 퍼지자 그녀는 곧 마이크를 손으로 덮었다. 의아해하며 서희의 안색을 살피던 문화옥션 감독이 다가와, 다음 작품의 호명을 채근하며 속삭였다.
“서희 씨, 진행 안 하고 뭐 해.”
“네. 죄송합니다.”
서희는 자꾸만 비집고 올라오는 비통한 마음을 크게 심호흡을 하여 가라앉히고는 마이크를 막아 두었던 손을 떼었다.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는 그와의 사이에 놓인 숨 막히는 기류 속에서, 애써 침착하게 다시 진행을 이어 갔다.
“다섯 번째 작품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서희는 아름다웠다. 굳이 쌍안경으로 자세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아도,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성이, 창백하도록 하얀 얼굴이, 가냘파서 더 매혹적인 어깨와 허리선이, 모두 다 그를 십 년 전으로 고스란히 데려다 주고 있었다.
십 년. 오래도 걸렸다. 돌아오기까지. 누군가에겐 생의 커다란 의미로 자리할 수도 있을 시간, 또 누군가에겐 그저 살아가는 것뿐 무의미할 수도 있을 시간. 강진에게 십 년은 그저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도기에 불과했다. 시냇물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랄까. 때론 냇물에 풍덩 빠지기도 했고, 때론 바짓단을 더욱 바짝 끌어 올려 돌다리도 두들겨 보며 걷는 조심성을 학습하고 체득하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늘 시선은 한곳만 보았다. 시냇물 건너 저쪽. 그래서 징검다리를 다 건너온 지금, 그는 다시 제 앞에 드리워진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서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강진의 눈은 짧게 메시지를 보내었다.
말해.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알아보았다고, 말해. 유서희.
더듬거리는 서희의 언어들 속에,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그녀의 한숨 소리에, 강진은 대답을 다 들은 듯했다. 그가 서면으로 3억에 응찰했던 유화 <낙원의 이방인>이 보조감독에 의해 옮겨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후로 서희는 두 번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박혀 든 그의 눈길은 오랫동안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낙원은 지금부터 다시 펼쳐질 것이었다.
1. Black, 징후(1)
망각의 정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어떤 책 속의 글귀가 아니어도, 경매를 끝낸 서희는 충분히 평상시로 돌아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 경매의 성공적인 축하를 위해 뒤풀이 자리를 가진다면, 생각 같아선 다른 이들 앞에서 즐겁게 웃으며 춤까지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억 따위, 그리고 그 때의 일과 감정들 따위.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 무엇에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한낱 꿈일 뿐이었다.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도려내고 싶었던 순간들 속에, 그가 존재했다. 아팠기에 더욱 떠올리기 힘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어쩌면 그도 그녀를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우연은, 말 그대로 우연일 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경매장에서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그 순간들 또한 잠시 꾸었던 꿈처럼 별거 아닌 듯 여겨졌다.
“하…… 답지 않게 감상에 빠졌어, 내가.”
긴장할 때마다 물을 마시는 습관이 든 서희는, 물 잔을 내려놓고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한숨을 지었다.
이제 경매장 뒷정리를 끝냈을 스텝들이 하나둘씩, 이곳 대회의실로 모여들 시간이었다. 이토록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시간에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매 액수의 정확한 통계라도 내보는 것이 훨씬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서희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전면 통유리창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바라본 밤하늘은 유난히 높고 새카맸다. 낮 동안의 파란 하늘도 절로 시선이 갈 만큼 감탄스러웠지만, 지금 보니 밤하늘의 정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해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무수히 많은 별들이 포말처럼 부서지며 쏟아져 내린다. 이곳 카지노 리조트에 온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인데도 저 하늘에 벌써 익숙해진 것 같았다.
‘낙원에는 이방인이 필요 없어. 그 자체로 아름답거든.’
갑자기 환청이 고막을 찌르며 상습적으로 찾아오는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등장으로 아무래도 생체 리듬이 깨져 버린 듯했다.
“헤이. 서희 씨!”
스텝 김민석 실장이었다. 서희는 평소의 야무진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를 맞이했다.
“김 실장님. 정리 다 끝나셨어요?”
“물론.”
그는 문화옥션의 기획실장으로 경매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40세라는 나이답게 연륜이 담긴 얼굴은 어느새 새카만 후배를 경외에 찬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커피를 목으로 넘긴 후 환하게 웃는 표정이, 아무래도 오늘 경매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아, 서희도 따라서 웃었다.
“오늘 대단하던데? 아직 정확하게 통계가 나온 건 아니지만 짐작에 38억 6천만 원 정도? 낙찰률도 굉장해. 70% 넘겠어. 이제 다섯 번째 경매인데 이러다 서희 씨가 우리 문화옥션 대표 경매사로 자리 잡는 거 아냐?”
“빨리 그러고 싶은데요? 서 선배한텐 죄송하지만요.”
문화옥션의 대표 경매사인 서윤희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지금껏 35회의 경매를 치러 낸 발군의 프로. 물론 서희가 따라가려면 아직 멀고 먼 길이겠지만, 목표와 야망은 무조건 크게 잡는 거라고…… 그가, 말했었다. 그가. 서희는 또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해 내는 이 부질없음이 어이가 없어졌다.
“어렸을 때 미술 쪽으론 생각도 안 해 봤다던 사람이 어떻게 미술사학 공부를 시작했던 거야?”
김 실장의 질문에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지만 서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조차도 그를 떠올리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므로. 사실 작년에 입사 당시 면접 때에도 이 질문만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 그를 개입시킬 수가 없었다.
“마땅히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그땐. 우연히 그림을 보게 되었고, 할 게 없으니 그럼 이거라도. 했던 거죠.”
진심을 숨기고 나간 대답에, 김 실장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긴 시크해. 보통은, 전공이 아닌데도 이렇게 잘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하냐고 목에 힘 빡 주는데.”
“모르시는구나. 실장님. 저 이거 굉장히 으스대는 건데.”
“하하하. 유서희 표 오만함인가? 어쨌든, 오늘 수고했어.”
“실장님두요.”
“곧 뒤풀이가 있을 거야. 지하 2층에 있는 클럽인데 지금 바로 내려가면 돼. 리조트 측에서 장소를 무려 공짜로 제공해 줬어. 끝내 주는 서포트야. 이 밤의 끝을 잡고 요란스럽게 한번 놀아 보자구.”
그러곤 다 마신 종이컵을 조준하여, 구석진 곳에 있는 휴지통에 툭, 던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희의 안색이 얼마쯤 굳어졌다. 그도 여전히 그럴까. 다 마신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정조준하여 툭, 내던지던 습관. 강진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의식 속으로 재차 침입하자 서희는 기억을 털어 내려 고개를 젓다 기습적으로 전해지는 핸드폰 진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핸드폰을 꺼낸 서희는 액정 위를 흐르고 있는 이름에 얼마쯤 가슴을 다독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오빠.”
서희가 통화를 시작하자, 김 실장은 눈치껏 빠져 주었다. 다 끝나면 클럽으로 내려오라는 손짓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서희는 다시금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경매는 잘 끝났어?
“물론입죠. 내가 누구야?”
―이제 겨우 다섯 번째면서 너무 으스대는 거 아니니?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구.
“나 훅 가도 오빠한테 먹여 살려 달라고 애원 안 할 테니까 염려 놓으라구요.”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부러 더 환한 음성을 만들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으며 서희가 대답하자, 핸드폰 너머에선 주저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애원해도 되는데…… 그래, 열흘 후에 오는 거지?
“응. 그럴 것 같은데. 여기 공기가 좋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숨 막힐 것 같아.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산이거든.”
―산이면 가슴이 더 뻥 뚫려야 하는 거 아냐? 산에 대한 예의가 없네.
“그런가? 근데 난, 여기가 답답해.”
한참 동안 민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물론 통화를 하다 보면 잠깐씩 대화가 끊길 때가 있지만, 워낙 여자 뺨 올려다 붙일 정도로 수다가 많고 또 상대방과의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의 민우라, 서희는 새삼 이 침묵의 시간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오빠? 듣고 있어?”
확인하듯 묻자, 민우에게서 급기야 참을성이 바닥이 난 듯한 한숨이 터졌다.
―에이. 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 서희야. 오빠 입 무지 싼 거 알지? 좀 더 뜸 들이려고 했는데. 나 사실은 리조트 앞에 와 있다?
“뭐?”
서희는 민우의 의외의 대답에 밤하늘로부터 시선을 떼어 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민우는 서희를 불러낼 그럴싸한 미끼까지 들이대었다.
―너 좋아하는 김밥도 싸 왔어.
1화
프롤로그
“세 번째 작품, <연화(戀花)>입니다. 응찰가 1억 5천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또렷한 발음, 살짝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색을 가진 서희의 음성이, 까만색의 헤드마이크를 통해 경매장에 울려 퍼졌다. 서희의 옆 벽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붙어 있는 전광판에서 일억 오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리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도 일제히 불이 켜졌다. 중국 ‘소더비즈(Sothebys)’ 경매에 출품되었다가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는 유명 작가의 유작에, 모두 뜨거운 관심들을 보냈다.
40평 남짓 되는 이곳 경매장에서는 서희가 몸담고 있는 ‘문화옥션’이 주관하는 대규모의 미술품 경매가 열리고 있었다. 동서양의 고(古)미술품과 그림, 그리고 희귀 컬렉션까지 경매의 대상과 종류는 한계가 없었다. 오늘의 ‘스페셜 이브닝 세일(Special Evening Sale)’ 이벤트를 위해서 지난 두 달간 문화옥션의 직원 전체가 매달렸다. 특별히 동해 쪽에 위치해 있는 ‘엠파이어(Empire) 카지노 리조트’로부터 경매 장소를 제공받아 정, 재계 쪽 유명 인사들이 대거 초청되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의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에 한껏 부응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저기 번호판을 든 손들이 더욱 높은 가격을 부르며, 그들의 화려한 부(富)를 은근히 과시하기 시작했다. 서희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들어 올리는 번호판들 사이를 빠르게 오고 갔다.
“2억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1초. 2초. 가격을 책정하는 마지노선의 순간들이 지나자, 서희는 경매사의 자격으로 최종 낙찰가를 발표했다.
“<연화> 2억, 낙찰되었습니다.”
‘연화’가 물러가고 다음 작품이 단상에 올려졌다. 그 그림을 바라보는 서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이를 담고 일렁거렸다. 아득히 먼 시절, 그 어느 시간의 기억을 떠올린 눈이 아주 잠깐 아련함을 드러냈다. 곧추선 등허리를 따라 회한이 내달리는 듯하여 그녀는 잠시 단상에 기댔다. 경매에 출품된 작품목록을 보며, 그리고 사전 준비 과정에서 이미 한차례 마음을 다잡은 일이었다. 서희는 뛰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잠시 손을 쥐었다 폈다. 이내 깔끔하고 단정한 경매사의 태도로 돌아간 그녀는, 헤드마이크 위치를 바로잡는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번째 작품, <낙원의 이방인>입니다. 서면 응찰가 3억부터…….”
들리는 번호판을 확인하려 객석을 주시하던 그녀는 멈칫하며 이내 말끝이 흐려졌다. 고요하고 기계적으로 가라앉아 있던 서희의 안색이 짙은 의구심으로 탈색되었다. 객석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좌석. 고급 쌍안경을 통해 그녀가 서 있는 앞쪽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 까닭이다. 이런 경매장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서희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쌍안경에 가려진 남자의 눈은 초점을 확인할 순 없었으나 서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3억부터…… 시작합니다.”
쌍안경 아래로 드러나 있는 코와 인중, 그리고 입술과 턱 선은, 멀리서 보아도 어딘가 기묘하게 낯이 익었다. 검은색 셔츠를 감싸듯 부드럽게 떨어지는 핏의 검은색 슈트. 익숙하게 감겨드는 분위기.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그녀를 따라붙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남자의 시선은 한곳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응찰가를 제시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서면으로 선(先)응찰을 한 사람의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이에 쓰여 있는 위력적인 세 글자를 확인한 순간,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최강진.
서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쌍안경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였다. 어쩌면 무의식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의미를 읽을 수 없을 만큼 무감하고 건조함에도 경매장 전체를 휘어잡을 정도로 강렬한 그의 분위기에서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단서들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도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응찰 없으십니까?”
잊고 싶었으니까.
“……낙원의 이방인…… 삼…… 삼억에 낙찰입니다.”
잊고 살고 싶었으니까.
서희는 허리 뒤로 손을 감추었다. 땀이 밴 손바닥을 스커트에 정성스레 문지르다 순간 새어 나간 짙은 한숨 소리가 헤드마이크를 통해 장내에 울려 퍼지자 그녀는 곧 마이크를 손으로 덮었다. 의아해하며 서희의 안색을 살피던 문화옥션 감독이 다가와, 다음 작품의 호명을 채근하며 속삭였다.
“서희 씨, 진행 안 하고 뭐 해.”
“네. 죄송합니다.”
서희는 자꾸만 비집고 올라오는 비통한 마음을 크게 심호흡을 하여 가라앉히고는 마이크를 막아 두었던 손을 떼었다.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는 그와의 사이에 놓인 숨 막히는 기류 속에서, 애써 침착하게 다시 진행을 이어 갔다.
“다섯 번째 작품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서희는 아름다웠다. 굳이 쌍안경으로 자세하고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아도,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성이, 창백하도록 하얀 얼굴이, 가냘파서 더 매혹적인 어깨와 허리선이, 모두 다 그를 십 년 전으로 고스란히 데려다 주고 있었다.
십 년. 오래도 걸렸다. 돌아오기까지. 누군가에겐 생의 커다란 의미로 자리할 수도 있을 시간, 또 누군가에겐 그저 살아가는 것뿐 무의미할 수도 있을 시간. 강진에게 십 년은 그저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도기에 불과했다. 시냇물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랄까. 때론 냇물에 풍덩 빠지기도 했고, 때론 바짓단을 더욱 바짝 끌어 올려 돌다리도 두들겨 보며 걷는 조심성을 학습하고 체득하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늘 시선은 한곳만 보았다. 시냇물 건너 저쪽. 그래서 징검다리를 다 건너온 지금, 그는 다시 제 앞에 드리워진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서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강진의 눈은 짧게 메시지를 보내었다.
말해.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알아보았다고, 말해. 유서희.
더듬거리는 서희의 언어들 속에,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그녀의 한숨 소리에, 강진은 대답을 다 들은 듯했다. 그가 서면으로 3억에 응찰했던 유화 <낙원의 이방인>이 보조감독에 의해 옮겨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후로 서희는 두 번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박혀 든 그의 눈길은 오랫동안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낙원은 지금부터 다시 펼쳐질 것이었다.
1. Black, 징후(1)
망각의 정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어떤 책 속의 글귀가 아니어도, 경매를 끝낸 서희는 충분히 평상시로 돌아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 경매의 성공적인 축하를 위해 뒤풀이 자리를 가진다면, 생각 같아선 다른 이들 앞에서 즐겁게 웃으며 춤까지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억 따위, 그리고 그 때의 일과 감정들 따위.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 무엇에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한낱 꿈일 뿐이었다.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도려내고 싶었던 순간들 속에, 그가 존재했다. 아팠기에 더욱 떠올리기 힘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어쩌면 그도 그녀를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우연은, 말 그대로 우연일 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경매장에서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그 순간들 또한 잠시 꾸었던 꿈처럼 별거 아닌 듯 여겨졌다.
“하…… 답지 않게 감상에 빠졌어, 내가.”
긴장할 때마다 물을 마시는 습관이 든 서희는, 물 잔을 내려놓고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한숨을 지었다.
이제 경매장 뒷정리를 끝냈을 스텝들이 하나둘씩, 이곳 대회의실로 모여들 시간이었다. 이토록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시간에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매 액수의 정확한 통계라도 내보는 것이 훨씬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서희는 고개를 들어 커다란 전면 통유리창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바라본 밤하늘은 유난히 높고 새카맸다. 낮 동안의 파란 하늘도 절로 시선이 갈 만큼 감탄스러웠지만, 지금 보니 밤하늘의 정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해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무수히 많은 별들이 포말처럼 부서지며 쏟아져 내린다. 이곳 카지노 리조트에 온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인데도 저 하늘에 벌써 익숙해진 것 같았다.
‘낙원에는 이방인이 필요 없어. 그 자체로 아름답거든.’
갑자기 환청이 고막을 찌르며 상습적으로 찾아오는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등장으로 아무래도 생체 리듬이 깨져 버린 듯했다.
“헤이. 서희 씨!”
스텝 김민석 실장이었다. 서희는 평소의 야무진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를 맞이했다.
“김 실장님. 정리 다 끝나셨어요?”
“물론.”
그는 문화옥션의 기획실장으로 경매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40세라는 나이답게 연륜이 담긴 얼굴은 어느새 새카만 후배를 경외에 찬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커피를 목으로 넘긴 후 환하게 웃는 표정이, 아무래도 오늘 경매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아, 서희도 따라서 웃었다.
“오늘 대단하던데? 아직 정확하게 통계가 나온 건 아니지만 짐작에 38억 6천만 원 정도? 낙찰률도 굉장해. 70% 넘겠어. 이제 다섯 번째 경매인데 이러다 서희 씨가 우리 문화옥션 대표 경매사로 자리 잡는 거 아냐?”
“빨리 그러고 싶은데요? 서 선배한텐 죄송하지만요.”
문화옥션의 대표 경매사인 서윤희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지금껏 35회의 경매를 치러 낸 발군의 프로. 물론 서희가 따라가려면 아직 멀고 먼 길이겠지만, 목표와 야망은 무조건 크게 잡는 거라고…… 그가, 말했었다. 그가. 서희는 또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해 내는 이 부질없음이 어이가 없어졌다.
“어렸을 때 미술 쪽으론 생각도 안 해 봤다던 사람이 어떻게 미술사학 공부를 시작했던 거야?”
김 실장의 질문에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지만 서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조차도 그를 떠올리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므로. 사실 작년에 입사 당시 면접 때에도 이 질문만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 그를 개입시킬 수가 없었다.
“마땅히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그땐. 우연히 그림을 보게 되었고, 할 게 없으니 그럼 이거라도. 했던 거죠.”
진심을 숨기고 나간 대답에, 김 실장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긴 시크해. 보통은, 전공이 아닌데도 이렇게 잘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하냐고 목에 힘 빡 주는데.”
“모르시는구나. 실장님. 저 이거 굉장히 으스대는 건데.”
“하하하. 유서희 표 오만함인가? 어쨌든, 오늘 수고했어.”
“실장님두요.”
“곧 뒤풀이가 있을 거야. 지하 2층에 있는 클럽인데 지금 바로 내려가면 돼. 리조트 측에서 장소를 무려 공짜로 제공해 줬어. 끝내 주는 서포트야. 이 밤의 끝을 잡고 요란스럽게 한번 놀아 보자구.”
그러곤 다 마신 종이컵을 조준하여, 구석진 곳에 있는 휴지통에 툭, 던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희의 안색이 얼마쯤 굳어졌다. 그도 여전히 그럴까. 다 마신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정조준하여 툭, 내던지던 습관. 강진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의식 속으로 재차 침입하자 서희는 기억을 털어 내려 고개를 젓다 기습적으로 전해지는 핸드폰 진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핸드폰을 꺼낸 서희는 액정 위를 흐르고 있는 이름에 얼마쯤 가슴을 다독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오빠.”
서희가 통화를 시작하자, 김 실장은 눈치껏 빠져 주었다. 다 끝나면 클럽으로 내려오라는 손짓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서희는 다시금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경매는 잘 끝났어?
“물론입죠. 내가 누구야?”
―이제 겨우 다섯 번째면서 너무 으스대는 거 아니니?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구.
“나 훅 가도 오빠한테 먹여 살려 달라고 애원 안 할 테니까 염려 놓으라구요.”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부러 더 환한 음성을 만들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으며 서희가 대답하자, 핸드폰 너머에선 주저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애원해도 되는데…… 그래, 열흘 후에 오는 거지?
“응. 그럴 것 같은데. 여기 공기가 좋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숨 막힐 것 같아.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산이거든.”
―산이면 가슴이 더 뻥 뚫려야 하는 거 아냐? 산에 대한 예의가 없네.
“그런가? 근데 난, 여기가 답답해.”
한참 동안 민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물론 통화를 하다 보면 잠깐씩 대화가 끊길 때가 있지만, 워낙 여자 뺨 올려다 붙일 정도로 수다가 많고 또 상대방과의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의 민우라, 서희는 새삼 이 침묵의 시간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오빠? 듣고 있어?”
확인하듯 묻자, 민우에게서 급기야 참을성이 바닥이 난 듯한 한숨이 터졌다.
―에이. 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 서희야. 오빠 입 무지 싼 거 알지? 좀 더 뜸 들이려고 했는데. 나 사실은 리조트 앞에 와 있다?
“뭐?”
서희는 민우의 의외의 대답에 밤하늘로부터 시선을 떼어 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민우는 서희를 불러낼 그럴싸한 미끼까지 들이대었다.
―너 좋아하는 김밥도 싸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