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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Black, 징후(2)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적어도 서너 시간은 족히 소요될 텐데, 민우는 정말로 왔다. 그것도 폐기 직전의 중고차를 타고 겨우. 이 시간이면 가게가 한창 막바지에 이르러 정리하느라 바쁠 텐데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온 것일까. 민우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거의 뛰다시피 하며 나간 서희는, 본관 건물 앞, 리조트 전용 2차선 도로 가 벤치에 앉아 있는 민우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어제 아침에 보고 지금 처음 보는 거니, 족히 만 이틀이 지났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그림자를 민우의 얼굴에서 발견한 까닭이었다. 김밥이 들었을 통을 흔들어 보이며 웃고는 있지만, 분명 뭔가 일이 생긴 것이다. 서희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느리게 끌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빠!”
사람들보다도 차가 더 자주 보이는, 이곳 건물 앞 도로 가에는 은은한 주황빛을 뿜는 가로등이 곳곳에 서 있었다. 봄을 맞이하는 3월 초의 꽃샘추위가 절정인 날들이어서 제법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였다. 민우의 얼굴로 그 조명이 환하게 흩뿌려져 있었고, 곧 서희가 그 범주 안에 함께 했다.
“무슨 일 있어?”
다가간 서희는 김밥통을 받아 들고 민우에게 물었다. 십 년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아니, 알고 지낸 것은 훨씬 더 오래되었다. 민우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할 서희가 아니었다. 민우는 그런 서희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복잡하고 어지러워진 심사에 오늘은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다. 털어놓을 곳도, 사람도, 마땅하지 않아 생각 끝에 서희에게 달려온 것이다. 마음 더 쓰실까 차마 아버지 앞에서 계속 기운 빠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해서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심을 전하고 알려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무작정 온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한 방에 훅 가게 생겼어. 서희야.”
서희와 함께 벤치에 앉은 민우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 이내 사실을 털어놓았다.
“집이랑 가게를 내어놔야 할 것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집주인 할머니께서 다른 사람한테 모두 넘길 생각이시래. 시가보다 두 배나 더 쳐 준다고 했단다. 그 터에 뭐 다른 걸 짓는다나 뭐라나. 우리야 뭐 몇 달째 월세도 제대로 못 냈으니 할 말 없는 거고.”
서희의 어깨가 두 치 정도는 축 아래로 늘어졌다. 아주 오래전, 강진의 집을 떠나 민우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부터 지금까지, 제게 있어 보금자리라 불릴 수 있는 곳이었다. 상처로 가득해 있는 그녀에게 따뜻한 피를 수혈해 준 민우의 가족. 서희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버지한테 제일 면목이 없더라. 후우…….”
평소답지 않게 짙은 한숨을 내쉰 후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을 서희는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작년부터 가게가 잘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진즉 돌아가셨고, 다니던 공장에서 사고가 나 한쪽 팔을 쓰지 못한 지 오래된 기수 아저씨 역시, 살려고 바득바득 노력하는 아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대학에 진학하면서 홀로 독립하려던 마음을 접고, 민우의 집에 셋방을 얻어서 살게 된 것도, 이들 부자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되어 주고픈 마음에서였다. 과거, 그녀의 부모님과 둘도 없는 형제지간처럼 지내 온 분들이었고, 어려운 순간마다 작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마음에 진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다. 서희는 한숨을 쉬었다.
“서희 너한테도 집주인이 곧 연락할 거야.”
“있는 사람들이란. 그래, 아저씨는 뭐라셔?”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시겠대. 우선은 주인 할머니께 말미를 좀 달라고 부탁을 드려 봐야지. 그 후에 단칸짜리 전세방이라도 구하고, 나는 포장마차라도 시작해야 하나 생각 중이야. 해 온 게 그런 거잖냐. 문제는…….”
말을 끊은 민우가 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제는 그녀의 거처라는 뜻이겠지. 가끔 민우의 이런 쓸데없는 배려와 인정이 서희는 못내 답답했다.
“내가 왜 문제가 되는데? 오빠도 참 대책 없다. 상황이 이런데 내 생각까지 해 줄 여유가 돼? 내 걱정은 하지 마. 원룸을 구하든, 작은 월세 방을 구하든, 내가 알아서 해. 오빠는 오빠 앞날이나 얼른 고민하시라구요.”
서희의 말에 민우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가게가 잘 되고 주머니에 돈이 좀 쌓이면, 프러포즈라도 할 참이었는데. 아직은 그를 오빠로만 여기고 있는 서희에게, 당당하게 남자답게 다가갈 생각이었는데.
“너 없었으면 우리 집 살림 엉망이었을 거야. 아버지랑 나, 둘이선 절대 못 꾸렸어.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서희야.”
“그래. 알았어. 그렇다고 치자.”
서희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까칠하여 주름이 잡힌 민우의 손을 제게로 끌어와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그들 세 사람의 한 지붕 아래 동거는 순수했고, 서로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와 그리고 남매 같은 가족으로 이루어진 완전체의 느낌이었다. 작은 위로일 뿐일지라도 서희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민우를 위해 계속하여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다 한숨과 함께 도로로 얼핏 돌려진 그녀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커다란 일렁거림으로 움직였다. 서희는 저도 모르게, 말 그대로 정말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고 있던 민우의 손을 놔 버렸다. 바로 앞, 도로를 천천히 서행하며 지나고 있는 고급 승용차의 운전석에서, 경매장 이후 다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오듯 실내등을 환하게 켠 채로, 그는 서희와 민우를 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너희들, 거기서 뭐 하는 거냐.’라고 묻는 듯한 색채의 표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서희의 몸이 경직되어 굳어졌다. 동시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북받치며 그녀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회한 같은 것일 게다. 옆에서 민우가 ‘왜 그래, 서희야?’라고 물어왔으나, 그녀의 시선은 그의 차가 떠난 빈 공간에 멍하니 머물러 있었다. 망각의 정도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십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자그마치 십 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 *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강진은 키를 주머니에 넣은 후 입구 쪽을 응시했다. 저 입구 바깥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서희가 녀석과 같은 집에서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그 속에는 남자와 여자로서 가지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것 정도는, 강 실장을 통해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의 눈매에 일순 번뜩이며 날이 섰지만, 그 빛은 이내 조소가 깃든 쓴웃음으로 변색되었다. 십 년 동안, 그 어떤 상황에도, 절대 반응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심장을 더욱 차갑게 얼리는 훈련을 했다. 냉정하고 딱딱하게. 무엇보다, 두 번 다시 절망감 따위에 굴복하지 않게. 이 가슴을 길들이고 또 길들일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화르르 일기 시작한 마음속 불꽃을 인내심으로 기꺼이 다스려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강진은 저 바깥의 서희에게 주문하듯 얼굴을 굳혔다.
입구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큰 키에서 우러나는 큰 걸음이 따각따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주차장 전체를 울렸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단단한 다리를 감싼 바지가 미끈하게 딸려 가며 유려한 실루엣을 자아냈다.

지하 2층에 있는 클럽 NII에 들어선 강진은, 잠깐 멈춰 서서 내부를 훑었다. 홀은 카지노를 하다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인디밴드의 재즈풍 음색의 보컬도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시명과 여경이 함께 앉아 있는 테이블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그는, 미로처럼 나 있는 테이블 사이사이의 통로를 따라 걸었다. 천정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내린 파란색의 조명등이 각 테이블마다 음산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구불구불한 조명등의 가지들이 마치 복잡하게 얽혀 든 제 심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강진은 잠시 묽은 호흡을 토해 냈다.
“여어. 내 남자, 왔어?”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채로,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던 시명이 제 시야로 강진의 얼굴이 들이치자 입꼬리를 스윽 말아 올리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얼마 전 이곳 엠파이어 카지노 리조트의 대표 이사가 된 시명은, 강진과는 대학 동창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여경 역시나 같은 대학의 친구로, 현재 집권 여당의 실세인 정운오 의원의 큰 딸이자 방송국의 교양작가였다.
십 년 만에 돌아온 강진을 위해 어렵게 시간을 내었지만, 하필 회포의 장소가 이 먼 곳이라 불만이 가득했다. 시명은 몰라도 여경 쪽은 항상 시간과 전쟁을 벌인다는 방송국 사람이니 말이다. 시명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장난스러운 눈을 빛냈다. 그러곤 제 옆에 앉은 강진의 얼굴을 세심하게 훑어 내렸다.
“어제 입국했는데도 뭐 그리 급해서 오늘 바로 날아왔냐. 역시 나 때문인 거지?”
같은 남자로서,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강진을 늘 동경해 온 시명이었다. 이런 농담조차 그를 향한 경외감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시명의 습관이었다.
“재작년에 뉴욕 갔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건데도, 너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구나. 참 신기한 비주얼일세.”
“미친 녀석.”
건들거리는 시명을 향해 짧게 욕설을 내뱉은 강진은, 손가락을 튕겨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예. 손님.”
인사하던 직원은 시명의 얼굴을 확인하곤 더욱 공손한 자세가 되어, 강진에게 귀를 기울였다.
“위스키 한 잔.”
고개를 끄덕인 직원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는 소파 깊숙이 나른하게 몸을 묻고 기다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홀을 지나 건너편에 있는 긴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매장에서도 보았던, 문화옥션의 직원들로 추정되는 스텝들이 모두 모여 저들끼리 건배를 외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저 자리에 서희가 들어설 것이다. 강진은 무감한 얼굴로 물 잔을 들었다.
“강진이 너, 시명이 말로는, 이번 경매 이벤트에 네가 문화옥션을 추천했다던데 이유가 뭐야?”
“에헤이. 여경이 네가 무슨 저 녀석 마누라라도 되냐? 질문 뉘앙스가 왜 그렇게 도전적이냐?”
여경이 의문에 찬 얼굴로 묻자, 시명은 옆에서 깐죽거렸다. 그러곤 강진을 슬쩍 돌아보며 그의 눈치를 살핀다. 십 년 동안 강진과 시명이 어떤 식으로 교류를 해 왔는지 알 리가 없는 여경은 곧 죽어도 궁금증은 풀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를 포함한 세상사 모든 일들에 무관심이거나 내지는 무신경인 그였다. 함께 대학을 다닐 때에도 할 게 없으니 공부라도 한다는, 주의였다. 무엇보다, 절대 타인에게 간섭 따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명의 사업에 강진이 끼어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여경에겐 하나의 사건인 셈이었다.
“바른대로 불어. 무슨 꿍꿍이인 건데?”
여경은 강진에게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확고한 표정이었다. 강진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미소로 그런 여경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서희가 클럽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서희는 잠시 내부를 두리번거리더니 제 동료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곧 걸음을 옮겼다. 하얀 블라우스를 감싼 검은색의 재킷과 그 아래로 타이트한 검은색 스커트. 경매장에서 본 그대로 우아하고 단정한 차림이었으나 푸른 조명 탓인가, 서희의 모습은 다른 누구보다 유혹적이었다.
직원이 내온 위스키 잔을 바로 받아 든 강진은 서희가 하는 양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회한의 눈빛. 그것을 넘어서는 간절한 그리움이 잔 속에 가득 담겼다.
“보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보려고.”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전하려고.”
서희를 향한 독백 같은 중얼거림.
“오늘 네가 구입한 그 그림 때문인 거야?”
강진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여경이 눈동자를 굴리며 전혀 다른 쪽으로 추측하자, 시명이 또다시 간섭한다.
“몰라도 되는 일들은 모른 채로 두는 게 좋아. 그렇지, 강진아?”
찡긋 윙크를 해 보이는 시명의 신호를 무시하며 강진은 잔을 들었다.
“지나친 추측들은 사양.”
미소를 머금은 강진의 입가가 곧 위스키 잔에 의해 감추어졌다. 여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남자였다. 최강진이라는 사람은. 마음에 담아 두다가도 지나치게 과묵한 그의 성정이 답답하여 밀어내기를 몇 번. 지쳤을 법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경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여경은 의도적으로 강진을 도발하며 그에겐 전혀 먹히지 않을 제안을 했다.
“최강진. 이따 밤에 내 룸으로 올래? 와인 한잔 더 하자.”
서희에게서 여경으로 잠시, 강진의 시선이 돌려졌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다니게 되었던 스무 살 때부터, 여경이 제게 이따금씩 보내왔던 유혹의 분위기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냉정하게 거절을 해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농담이었어.’라고 웃으며 넘어가 버리던 그녀.
“너하곤 안 자.”
강진은 여경의 속내를 간파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곤 다시 서희를 응시했다. 입가에 고이는 위스키의 강렬한 맛이 입안뿐 아니라 몸속으로 저릿하게 흘러들었다.
“너희 둘은 어째 만날 때마다 불꽃이 튀냐. 변한 게 없네. 재미없다. 나만 빼놓고.”
시명의 놀림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서희와 시선이 부딪친 때문이었다.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지만, 그때부터 서희의 모든 신경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강진은 잘 알고 있었다. 목에 걸려 있던 위스키를 넘겼다. 서희의 타액을 삼키던 그 순간처럼, 몸에 전율이 찾아왔다.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잠시 숨을 내쉰 후 곧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