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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 중독
1화
프롤로그
“그래서?”
수원이 휑한 눈으로 물었다. 술에 취하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그였기에 저 눈은 이미 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래서’란 질문이 왜 나오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수원의 질문에 대답한 지연의 눈동자도 이미 알코올 한도 초과가 된 듯 풀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열띤 토론의 마지막은 수원과 지연의 몫이었다.
“그래서 모든 남자들이 다 미쳐 있다고? 그거에? 그것도 펠, 펠라…….”
“더듬거리기는. 펠. 라. 치. 오.”
야무진 지연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고 도와 달라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가진과 건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치고는 뽀얀 피부의 수원의 얼굴에는 뭔가 더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눈빛을 반짝이는 그를 보며 가진은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수원의 시선은 가진에게 머물렀다.
난 잘 모르겠는데. 가진은 난감함이 깃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도와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은 오늘 좀 피곤하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참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시원하게 얼음을 가득 채운 톡 쏘는 콜라를 마시자 갈증은 더욱 심해지는 듯했다. 그녀가 답답한 듯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전혀 불금 같지 않은 축 처져 버린 불금. 항상 모이는 아지트 같은 ‘대숲 사이로’의 제일 안쪽 방엔 초등학교 동창이자 동네 친구, 몇몇은 대학 동창이기도 한 이십 년 지기 친구 다섯이 모여 있었다.
방 가운데 테이블이 크게 있고, 그 밑이 뚫려 발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그곳은 앉을 수도 있고, 한쪽엔 누울 수도 있어 누군가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곤 하는 그들에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조금 전 가진이 야근을 끝내고 왔을 때엔 멤버 중 한 명인 희준은 이미 한쪽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고, 수원과 지연은 가진으로선 입에 담기도 난감한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휴대폰을 든 채 느긋하게 벽에 기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가진이 늦은 걸 사과하며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듯 건우도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선생님처럼 수원을 가르치고 있는 지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친 듯이 준비한 언론 고시에 합격해 그토록 바라던 기자가 된 그녀였다. 그러나 기자가 된 후 아무런 관련 없는 식당이나 물건을 사러 가서도 특권을 누리고 싶을 때면 기자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선배들에게 질려, 그녀는 몇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썼다고 했다.
“주말에 단합 대회 겸 딸기밭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기자랍시고 그 선배가 명함 내밀면서 주둥이를 나불대더라. 혹시나 기사라도 안 좋게 나갈까 봐 좋게 봐 달라고 딸기 더 주는 그 순진한 주인 할아버지한테 끝까지 거드름을 피우는데. 그냥 선배 놈 얼굴에 딸기 한 바구니 던져 주고 그냥 나와 버렸어.”
잘했어. 지연의 말에 친구의 성격을 아주 잘 아는 가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지연은 연애, 섹스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물론 기자일 때보다 불규칙한 일로 인해 경제적으론 어려워지긴 했지만, 예전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 가진에겐 더 좋아 보였다. 그래도 그 일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인지 들어오는 일도 페이도 갈수록 괜찮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는 섹스, 그중에서도 펠라치오. 아마도 핫하게 연재 중인 모 여성 잡지와 포털사이트, 그리고 그녀의 블로그에 순차적 수위 조절을 통해 들어갈 내용 중 하나일 것이다. 인기가 많아질수록 그 수위가 높아진다면서도 지연은 대충 하는 건 맞지 않는다며 칼럼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지금 녹음기까지 켜 있는 것을 보니 수원의 이야기는 남자 A나 남자 B의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섹스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즐기자는 주의의 지연은 오늘도 꽤나 난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실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지만.
펠라치오. 그녀로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인데. 게다가 그건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알 수 있는 느낌이잖아. 그녀로선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다시 콜라 한 모금을 마셨다.
“fellatio. 미국 전 대통령 스캔들도 기억 안 나냐? 그리고 고대엔 그게 회춘법의 하나였대. 게다가 발기부전인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나이 들어서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미국 육 개월 어학연수 출신다운 능숙한 발음으로 지연의 나름 명쾌한 설명이 이어지자 수원의 애절한 눈빛과 또다시 마주쳤다. 결국 뭐라도 그를 거들어야 할 것 같아 가진이 말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음. 내 생각엔…….”
그녀가 입을 열자 네 개의 흐린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나건우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느긋하게 그녀가 마시던 콜라 한 모금을 마실 뿐이었다.
헉.
갑자기 움찔한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그녀 대신 건우가 대답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른 척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다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었다. 그녀의 허벅지 위에는 나건우의 커다란 손이 올라와 있었다.
넓은 테이블이지만 고개만 숙이면 보이는 상황이었고, 잠든 희준이 눈만 뜨면 보일 위치였다. 힘 대결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아무리 손을 치우려 해도 그의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며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상황이었다.
그렇지, 하는 지연. 진짜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묻는 수원. 그리고 이 손이나 치우고 말 해, 하는 가진의 표정까지. 한 사람을 향한 눈빛은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는 전제하에.”
능력도 좋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슬금슬금 그의 손가락은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한 길이의 원피스였지만 아무래도 앉으니 허벅지 위로 올라간 것이 문제였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백을 무릎 위에 올리긴 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미 그녀의 스커트 안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무리 오므리려 애를 써도 그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 취향인 거지? 난 있잖아. 그냥 여자의…….”
수원이 꼬인 혀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심술궂은 간질거림에 그것까지 듣고 있을 순 없었다.
결국 가진은 벌떡 일어섰다. 바닥에 고정된 테이블이 작은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정확히는 섞어 마신 소주병와 맥주병, 그리고 대숲 사이로의 명물이라는 키위 막걸리 주전자까지.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그녈 향했다. 건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기지개를 펴듯 스트레칭을 하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 뻔뻔한…….
“결제하고 올게.”
서둘러 말을 마친 가진이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혹시 몰라 옆에 두었던 카디건도 가방에 넣었다.
“와, 오늘도 홍가진이 쏘는 거야? 역시 공무원이 제일 좋다.”
찰싹. 갑작스러운 소란에 언제 일어난 것인지 희준의 중얼거리자 지연이 그의 등을 내리쳤다.
“네가 좀 쏴 봐. 연봉은 가진이보다 네가 더 높아.”
“그래도 정년은 내가 더 짧아. 쟤보다 내가 먼저 백수가 될 거라고.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쐈거든.”
그들의 투닥거림을 뒤로한 채 가진이 샌들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손바닥이 닿았던 허벅지가, 교묘하게 손가락이 스쳤던 팬티 라인이 여전히 화끈거렸다.
계산대 옆 에어컨 앞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가 답답하기도 했다.
“오늘은 좀 늦으셨나 봐요.”
“네. 좀.”
계산을 한 아르바이트생의 알은체에 가진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웬만한 아르바이트생과는 눈인사를 할 만큼 익숙해진 곳이었다.
많이도 달렸네. 카드 명세서를 확인하던 가진이 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 어디야?
나건우다. 잠시 미간을 모은 그녀는 문자를 무시한 채 가방을 창가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숲 사이로는 그녀의 집과 가깝기도 했고, 야근까지 했기에 눈 밑에 마스카라까지 번져 있어 이곳에 오기 전 잠깐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나온 상태였다. 수원만큼은 아니더라도 다크서클이 창백한 얼굴의 코 옆까지 내려와 있고, 피곤함에 지친 눈빛까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사업 계획서를 여섯 번을 고치라고 하는지, 하루 종일 새로 온 팀장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녀였다. 취업지원본부에 새로 발령을 받은 그는 의욕이 능력을 따라 주지 못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학교별로 발표된 대학별 취업률에서의 낮은 순위와 그에 대한 월요일 업무보고 때문인지, 아니면 즐거워야 할 금요일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인지 돌아가면서 한 명씩 닦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의 차례였나 보다. 가진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서른이 되니 스트레스가 얼굴로 나타나나 보다. 게다가 무시하고 있지만 나건우에 의해 뜨거워진 몸은 피곤이 겹쳐져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대숲 사이로’ 화장실엔 항상 얼음이 비치되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뭐 술 깨서 정신 차리라는 이유겠지. 예전엔 넓은 세면대에 장식처럼 얼음을 한가득 깔아 놓더니 지금은 커다란 통에 담아 둔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은 화장실 한쪽 의자나 창가에 걸터앉아 얼음을 눈 위에 두곤 했다.
그녀 역시 세수를 하고 가글을 한 후 커다란 얼음 두 개를 쥐고 얼굴에 댔다. 여전히 가방 속에선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 차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허벅지에 머문 열기를, 스멀스멀 퍼져 가던 그 열기를 지울 만큼 얼음은 차가웠다.
그 뻔뻔한 손가락을 가진 나건우까지도.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릴까. 이미 카디건까지 다 챙겨 왔기에 그냥 가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물론 술에 취한 지연이 걸리기는 했지만 수원이 있어 괜찮을 것이다. 요즘 들어 노골적인 건우의 태도가 굉장히 아슬아슬해 그녀가 고민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반쯤 녹았을 즈음이었다.
정신 차렸으니 그냥 집에 가는 게 낫겠지.
가진이 결심을 하고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 빛을 등진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이자, 누군가가 그녈 향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던 나건우.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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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원이 휑한 눈으로 물었다. 술에 취하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그였기에 저 눈은 이미 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래서’란 질문이 왜 나오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수원의 질문에 대답한 지연의 눈동자도 이미 알코올 한도 초과가 된 듯 풀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열띤 토론의 마지막은 수원과 지연의 몫이었다.
“그래서 모든 남자들이 다 미쳐 있다고? 그거에? 그것도 펠, 펠라…….”
“더듬거리기는. 펠. 라. 치. 오.”
야무진 지연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고 도와 달라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가진과 건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치고는 뽀얀 피부의 수원의 얼굴에는 뭔가 더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표정과 다르게 눈빛을 반짝이는 그를 보며 가진은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수원의 시선은 가진에게 머물렀다.
난 잘 모르겠는데. 가진은 난감함이 깃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놓인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도와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은 오늘 좀 피곤하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참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시원하게 얼음을 가득 채운 톡 쏘는 콜라를 마시자 갈증은 더욱 심해지는 듯했다. 그녀가 답답한 듯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전혀 불금 같지 않은 축 처져 버린 불금. 항상 모이는 아지트 같은 ‘대숲 사이로’의 제일 안쪽 방엔 초등학교 동창이자 동네 친구, 몇몇은 대학 동창이기도 한 이십 년 지기 친구 다섯이 모여 있었다.
방 가운데 테이블이 크게 있고, 그 밑이 뚫려 발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그곳은 앉을 수도 있고, 한쪽엔 누울 수도 있어 누군가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곤 하는 그들에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조금 전 가진이 야근을 끝내고 왔을 때엔 멤버 중 한 명인 희준은 이미 한쪽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고, 수원과 지연은 가진으로선 입에 담기도 난감한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휴대폰을 든 채 느긋하게 벽에 기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가진이 늦은 걸 사과하며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듯 건우도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선생님처럼 수원을 가르치고 있는 지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친 듯이 준비한 언론 고시에 합격해 그토록 바라던 기자가 된 그녀였다. 그러나 기자가 된 후 아무런 관련 없는 식당이나 물건을 사러 가서도 특권을 누리고 싶을 때면 기자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선배들에게 질려, 그녀는 몇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썼다고 했다.
“주말에 단합 대회 겸 딸기밭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기자랍시고 그 선배가 명함 내밀면서 주둥이를 나불대더라. 혹시나 기사라도 안 좋게 나갈까 봐 좋게 봐 달라고 딸기 더 주는 그 순진한 주인 할아버지한테 끝까지 거드름을 피우는데. 그냥 선배 놈 얼굴에 딸기 한 바구니 던져 주고 그냥 나와 버렸어.”
잘했어. 지연의 말에 친구의 성격을 아주 잘 아는 가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지연은 연애, 섹스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물론 기자일 때보다 불규칙한 일로 인해 경제적으론 어려워지긴 했지만, 예전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 가진에겐 더 좋아 보였다. 그래도 그 일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인지 들어오는 일도 페이도 갈수록 괜찮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는 섹스, 그중에서도 펠라치오. 아마도 핫하게 연재 중인 모 여성 잡지와 포털사이트, 그리고 그녀의 블로그에 순차적 수위 조절을 통해 들어갈 내용 중 하나일 것이다. 인기가 많아질수록 그 수위가 높아진다면서도 지연은 대충 하는 건 맞지 않는다며 칼럼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지금 녹음기까지 켜 있는 것을 보니 수원의 이야기는 남자 A나 남자 B의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섹스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즐기자는 주의의 지연은 오늘도 꽤나 난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실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지만.
펠라치오. 그녀로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인데. 게다가 그건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알 수 있는 느낌이잖아. 그녀로선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다시 콜라 한 모금을 마셨다.
“fellatio. 미국 전 대통령 스캔들도 기억 안 나냐? 그리고 고대엔 그게 회춘법의 하나였대. 게다가 발기부전인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나이 들어서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미국 육 개월 어학연수 출신다운 능숙한 발음으로 지연의 나름 명쾌한 설명이 이어지자 수원의 애절한 눈빛과 또다시 마주쳤다. 결국 뭐라도 그를 거들어야 할 것 같아 가진이 말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음. 내 생각엔…….”
그녀가 입을 열자 네 개의 흐린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나건우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느긋하게 그녀가 마시던 콜라 한 모금을 마실 뿐이었다.
헉.
갑자기 움찔한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그녀 대신 건우가 대답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른 척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다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었다. 그녀의 허벅지 위에는 나건우의 커다란 손이 올라와 있었다.
넓은 테이블이지만 고개만 숙이면 보이는 상황이었고, 잠든 희준이 눈만 뜨면 보일 위치였다. 힘 대결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아무리 손을 치우려 해도 그의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며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상황이었다.
그렇지, 하는 지연. 진짜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묻는 수원. 그리고 이 손이나 치우고 말 해, 하는 가진의 표정까지. 한 사람을 향한 눈빛은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는 전제하에.”
능력도 좋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슬금슬금 그의 손가락은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한 길이의 원피스였지만 아무래도 앉으니 허벅지 위로 올라간 것이 문제였나 보다. 그래서 자신의 백을 무릎 위에 올리긴 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미 그녀의 스커트 안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무리 오므리려 애를 써도 그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 취향인 거지? 난 있잖아. 그냥 여자의…….”
수원이 꼬인 혀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심술궂은 간질거림에 그것까지 듣고 있을 순 없었다.
결국 가진은 벌떡 일어섰다. 바닥에 고정된 테이블이 작은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정확히는 섞어 마신 소주병와 맥주병, 그리고 대숲 사이로의 명물이라는 키위 막걸리 주전자까지.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그녈 향했다. 건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기지개를 펴듯 스트레칭을 하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 뻔뻔한…….
“결제하고 올게.”
서둘러 말을 마친 가진이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혹시 몰라 옆에 두었던 카디건도 가방에 넣었다.
“와, 오늘도 홍가진이 쏘는 거야? 역시 공무원이 제일 좋다.”
찰싹. 갑작스러운 소란에 언제 일어난 것인지 희준의 중얼거리자 지연이 그의 등을 내리쳤다.
“네가 좀 쏴 봐. 연봉은 가진이보다 네가 더 높아.”
“그래도 정년은 내가 더 짧아. 쟤보다 내가 먼저 백수가 될 거라고.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쐈거든.”
그들의 투닥거림을 뒤로한 채 가진이 샌들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손바닥이 닿았던 허벅지가, 교묘하게 손가락이 스쳤던 팬티 라인이 여전히 화끈거렸다.
계산대 옆 에어컨 앞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가 답답하기도 했다.
“오늘은 좀 늦으셨나 봐요.”
“네. 좀.”
계산을 한 아르바이트생의 알은체에 가진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웬만한 아르바이트생과는 눈인사를 할 만큼 익숙해진 곳이었다.
많이도 달렸네. 카드 명세서를 확인하던 가진이 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 어디야?
나건우다. 잠시 미간을 모은 그녀는 문자를 무시한 채 가방을 창가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숲 사이로는 그녀의 집과 가깝기도 했고, 야근까지 했기에 눈 밑에 마스카라까지 번져 있어 이곳에 오기 전 잠깐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나온 상태였다. 수원만큼은 아니더라도 다크서클이 창백한 얼굴의 코 옆까지 내려와 있고, 피곤함에 지친 눈빛까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사업 계획서를 여섯 번을 고치라고 하는지, 하루 종일 새로 온 팀장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녀였다. 취업지원본부에 새로 발령을 받은 그는 의욕이 능력을 따라 주지 못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학교별로 발표된 대학별 취업률에서의 낮은 순위와 그에 대한 월요일 업무보고 때문인지, 아니면 즐거워야 할 금요일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인지 돌아가면서 한 명씩 닦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의 차례였나 보다. 가진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서른이 되니 스트레스가 얼굴로 나타나나 보다. 게다가 무시하고 있지만 나건우에 의해 뜨거워진 몸은 피곤이 겹쳐져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대숲 사이로’ 화장실엔 항상 얼음이 비치되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뭐 술 깨서 정신 차리라는 이유겠지. 예전엔 넓은 세면대에 장식처럼 얼음을 한가득 깔아 놓더니 지금은 커다란 통에 담아 둔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은 화장실 한쪽 의자나 창가에 걸터앉아 얼음을 눈 위에 두곤 했다.
그녀 역시 세수를 하고 가글을 한 후 커다란 얼음 두 개를 쥐고 얼굴에 댔다. 여전히 가방 속에선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 차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허벅지에 머문 열기를, 스멀스멀 퍼져 가던 그 열기를 지울 만큼 얼음은 차가웠다.
그 뻔뻔한 손가락을 가진 나건우까지도.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릴까. 이미 카디건까지 다 챙겨 왔기에 그냥 가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물론 술에 취한 지연이 걸리기는 했지만 수원이 있어 괜찮을 것이다. 요즘 들어 노골적인 건우의 태도가 굉장히 아슬아슬해 그녀가 고민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이 반쯤 녹았을 즈음이었다.
정신 차렸으니 그냥 집에 가는 게 낫겠지.
가진이 결심을 하고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 빛을 등진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이자, 누군가가 그녈 향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던 나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