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데자부
1화
1장. 그 기억 속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여름 내내 햇살과 부딪히며 살았던 바다도 한숨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막한 바다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지는 눈발 속에 여자는 마치 동상처럼 서서 미동도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움직임 없이 서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소담스레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결에 간간이 나부끼는 여자의 까맣고 긴 머리칼은 창백한 얼굴에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때 이른 눈이 신기할 법도 하건만 여자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꾸만 얼굴에 달라붙는 젖은 머리칼이 귀찮지도 않은지 여자는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오늘도 여전히 넌 없구나.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잖아. 왜 안 오는 건데? 벌써 잊어버렸니?”
작은 하소연이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물이 가득 배인 듯한 그 목소리는 듣는 사람이 없는 바닷가에서 바람에 날리는 눈발에 섞이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쌓이던 알 수 없는 슬픔이 결국 눈물로 바뀌어 흘러내렸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여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정아가 잊으란다. 널 잊으래. 너무 길다고……. 이런 기다림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너 아니? 그러니 이제 제발 와라. 나 지치나 봐. 한 사람만 보고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그런데 또 난 다른 사람은 보이지가 않아. 어쩌면 좋으니? 너란 사람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마법을 걸어 놓은 거야?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진짜…… 보고 싶어.”
점점 드세지는 바람과 눈발에 여자의 독백은 소리도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은 바다의 한 부분인 양 그림처럼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

“너 또 거기 다녀온 거야? 미친년. 이제 잊어. 벌써 몇 년이니? 네가 수절 과부야? 그 인간 오려면 벌써 수십 번은 왔을 거다. 잊은 거야. 그러니 너도 제발 잊어. 해빈이도 이제 학교 가야 하잖아.”
초췌해진 모습으로 들어오는 바보 같은 친구 혜주를 바라보며 정아가 화를 냈다.
세상에서 가장 밝게 웃으며 삶을 즐기던 친구였다. 그래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혀 왔다.
한창 즐겁고 행복해야 할 나이인데도 모든 즐거움을 거부한 채 사라져 버린 한 남자에게 목을 매는 친구가 너무 안쓰럽고 화가 나 눈물이 솟을 지경이었다.
“해빈이는?”
좁은 집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니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 혜주의 얼굴에도 화색이 도는 듯했다.
“하! 미친년. 아들 생각은 나냐? 아까 밥 먹고 너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었어.”
정아는 지친 듯 어깨를 늘어트린 혜주의 작은 체구를 보자 더욱 울화가 치미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원래부터도 자신보다 10센티는 더 작았던 친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한층 작아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모질게 말하면서도 내내 가슴이 아파 온다.
핏기 없는 얼굴에 커다란 까만 눈만 도드라져 보이는 혜주의 단정하던 긴 머리칼이 어깨에 흐트러져 있어 초췌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다시 울컥하지만 이미 많이 지친 듯 보여 정아는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정아의 악다구니에도 불구하고 혜주의 음성은 담담했다.
“고생했다. 고마워. 너무 늦었네. 자고 갈래?”
“미친~! 갈란다. 여기서 너 보고 있자니 속 터져. 안 해. 나, 갈래.”
정아는 거칠게 코트와 백을 들더니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런 정아를 배웅하면서도 혜주의 표정에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정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다른 날보다 더 지친 듯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해빈이의 얼굴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켜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과 같이 쓰는 작은 방에서 잠든 아들은 꼭 천사 같았다. 유난히 아빠를 닮은 아이다. 그래서 해빈을 보고 있으면 그와 같이 있는 듯 느껴져 행복해진다.
어디를 데리고 다녀도 시선을 끄는 아이. 인형같이 예쁘고 또 그만큼 착하고 순진한, 이제 6살 난 아들 해빈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린 혜주는 한참만에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자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컥 솟는 눈물이 목을 메게 했다.
“영하야, 아니? 해빈이가 이제 6살이다. 우리 해빈이 이렇게 아빠 얼굴도 모른 채 크고 있어. 너 닮아 얼마나 예쁜데. 왜 안 오는 거니? 온다고 했잖아.”
욕실에서 나온 혜주는 서랍 깊은 곳에서 학창 시절에 찍은, 영하와 같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곤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3개월만 누나를 보고 오겠다고 했던 영하였다. 그런 그가 6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아니, 이렇게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혜주는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고 조심스레 해빈의 옆으로 몸을 뉘었다. 아이의 향긋한 베이비 로션 냄새가 잠시나마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 넌 없어도 넌 나에게 정말 소중한 선물을 줬지. 우리 예쁜 해빈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해빈이를 주고 갔으니 널 용서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많이 보고 싶다.”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기야, 두통 심해? 어쩌지? 약이라도 먹을래?”
댈러스에서 출발한 서울행 비행기의 일등석이었다. 머리를 손으로 짚고 있는 남자를 보며 젊은 여자가 호들갑스럽게 수선을 떨었다.
짧고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밑으로 환한 이목구비를 드러낸 남자는 기내 여자들의 시선을 한 번씩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연신 자신의 연인임을 티 내는 한 여자 때문에 그녀들의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잘 재단된 양복은 남자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인상 때문에 그는 여자가 아니라도 쉬이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조용히 해. 너 때문에 더 아픈 것 같아.”
낮고 차가운 음성에 여자는 곧 울기라도 할 듯 입술을 실룩거렸다.
“너무해, 난 걱정이 돼서…….”
“그래, 그래 알았어. 그나저나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응, 영하 씨. 다 왔어. 한 30분이면 도착할 거래. 괜찮아? 요즘 신경 많이 쓰더니. 거봐. 내가 쉬엄쉬엄하라고 했잖아.”
“수지야, 네가 조금만 조용하면 더 괜찮을 것 같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 가득 삐진 기색을 드러내는 여자는 예쁘고 귀여웠다. 화사한 흰색의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어서인지 토끼를 연상시켰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오랜 여행으로 조금은 흐트러졌지만 그 모습마저도 연출한 듯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한 폭의 그림같이 어울렸다. 토라진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옅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뺨에 손을 대고 달래기 시작했다.
“삐졌니? 미안, 화 풀어. 그렇게 입 내밀면 하마 입 된다.”
“뭐? 영하 씨 미워. 흥!”
연인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와중에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몇 년 만이더라……. 6년이던가?’
남자의 얼굴 위로 감회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 더 심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제길……. 한 박사를 찾아가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비행기를 나서는 영하의 곁에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난다며 즐거워하는 수지가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왠지 낯설었다. 아니, 생판 모르는 곳 같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까지의 기억뿐, 그 이전의 일은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였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구조를 익히던 영하의 귓가에 그나마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오랜만이구나.”
자신과 많이 닮은, 아버지라고 기억되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네, 아버지. 안녕하셨어요?”
깍듯하게 인사하는 영하를 순간 당황스러운 듯 바라보던 중년 남자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래, 좋아 보이는구나. 진짜 오랜만에 오는 거지? 졸업식 못 가서 미안하다.”
그랬다. 남보다 좋은 머리 덕에 미국의 대학에서 CEO 코스를 빠르게 졸업하고 예정보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온 영하였다. 이제 회사를 다니면서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아버지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출근은 한 일주일 뒤에 하는 게 어떨까? 시차 적응도 필요하고 여기저기 익혀야 할 얼굴들도 있으니까.”
“네.”
짧고 간략한 대답. 그것이 영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였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6년 전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막막했던 그때 자신의 아버지라며 다가왔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기억도 없이 텅 비어 버린 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던 아버지라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기억이 없음에도 살아가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가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가슴 한구석이 멍해지고 혼란스러움이 밀려들었지만 무엇 하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 느낌이 싫어 지겨운 재활치료에 온 힘을 쏟고 또 학교를 다녔다. 그러면서 아무리 애써도 돌아오지 않는 기억을 아예 지워 버렸다.
그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순간순간 아프게 밀려드는 감정에 숨이 막히곤 한다.
그런 것이 한국에 온 뒤로 더욱 심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두통까지 극성을 부렸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조르는 듯한 느낌은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어머님은요?”
“오는 중이다. 몸이 안 좋아 요양차 별장에 내려가 있었지. 너 온다는 소식 듣고 바로 출발했을 건데. 날씨가 안 좋아 늦나 보다.”
“네.”
“수지는?”
“같이 왔습니다. 아까 공항에 수지 부모님이 나오셔서 인사만 드리고 같이 보냈습니다.”
“그랬구나. 아, 들어온 김에 아예 약혼식이라도 하지 그러니?”
“아직요. 좀 더 익숙해지면 하지요.”
“그래.”
부모 자식이기보다는 타인 같은 대화가 어설프게 이어지고 있었다. 영하는 자신이 조금만 더 따스하게 대하면 많이 좋아하시리라는 것은 알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아버지와의 사이를 막아서는 듯 차가운 반응이 튀어나와 버려 그로서도 민망하고 죄송했다.
노력을 해 봤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를 보면 화가 치밀곤 한다. 사라진 기억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것 같건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하는 아직도 낯설기만 한 집 안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정말 여기가 내가 쓰던 방일까 싶어 조심스레 열어 본 옷장에는 몇 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6년 전에 즐겨 입던 옷이었나 보다.
옅은 한숨을 내쉰 영하가 다시 옷장 문을 닫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발치로 툭 떨어졌다. 작고 앙증맞은 상자였다. 이질적인 방 안 물건들 중에서도 가장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두근거리며 뛰었다.
호기심에 열어 본 상자 안에는 종이로 접은 색 바랜 학 한 마리와 별 모양으로 접혀진 종이 하나, 그리고 누군지 모를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군청색 교복을 깔끔하게 입은 여학생은 마치 세상의 행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양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까만 긴 머리를 단정하게 양 갈래로 묶고, 하얀 이를 보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사진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뭐야?”
놀라 위를 올려다보던 영하는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왜 이 사진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걸까? 왜 가슴이 아프지? 이 소녀가 누구기에……?’
그는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막막하게 밀려오는 낯선 감정이 목이 메었다. 왜일까? 이 소녀는 누구일까? 왜 가슴이 아프지?
영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떠밀려 그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뿌듯한 무언가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의 지갑이 바로 제자리였다는 듯 사진은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무언가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각인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있다. 그 기억 속에.



2장.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1)


“해빈이.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 피우면 안 된다.”
아침 일찍 해빈이를 깨워 옷을 입힌 혜주가 늘 하는 말을 반복했다.
“에이, 엄마, 알아, 안다고. 칫!”
또래보다 똑똑한 아들 해빈.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엄마는 아이를 지우자고 애원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혜주는 감사했다. 영하가 사라진 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랄수록 영하를 닮아 가는 해빈뿐이었다. 해빈이 덕분에 혜주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딸이 고2에 미혼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아버지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셨다.
해빈을 낳기로 결정했을 때, 아니 해빈을 가진 것을 안 순간부터 아버지의 용서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도 내침을 당한 혜주는 미혼모 시설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고 엄마가 아버지 몰래 마련해 준 집에서 어렵게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엄마의 도움도 한계가 있어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때마다 많이 도와준 친구가 정아다. 정아가 없었으면 아마도 지금껏 버티기가 더 힘들었으리라.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정아가 반은 집세를 내주고 있었다.
힘들지만 살아는 간다. 그리고 해빈이가 이렇게 예쁘게 커 가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들 해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자. 우리 아들.”
아이를 먼저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하러 나가야 하기에 아침은 늘 분주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와 헤어질 때가 되면 항상 가슴 한쪽을 떼어 내는 듯한 서글픔을 느꼈다.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한데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해빈이를 두고 나설 때면 금세 눈앞이 흐려지곤 했다.
멈칫 시간을 확인한 혜주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뛰면 지각은 면하리라.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사무실로 들어서는 혜주의 음성은 밝았다.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나름 튼튼한 회사였다. 혜주는 검정고시 출신이지만 친구 정아의 추천으로 이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구설이 많았는데, 나중에 그녀가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져 참 많이 힘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아의 이모부이기도 한 사장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텨 냈고, 시간이 지나며 가족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녀를 편하게 대하는 동료들도 생겼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인지라 꽤나 엽기적이고 사이코스러운 천재가 많은 회사였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정상적인 사고로 상황을 조율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한번 프로그램을 맡으면 잠도 자지 않고 일에 매달리는 프로그래머들의 건강을 챙기고, 사회성이 부족한 그들을 도와 대화를 이끌고 일을 풀어 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그녀였다.
그녀의 나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보다가 혜주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회사에 이로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는 뒤늦게 탄성을 짓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지만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녀는 어느새 회사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 가까이 가면 차가워지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끙끙대며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는 가련한 청춘들이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회의가 열리고 어수선했던 사무실이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