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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장.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2)


“이렇게 엉망인 시스템은 처음입니다. 우선은 시스템 정리부터 하죠. 업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고 있는 시스템을 왜 쓰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정영하 실장의 얼굴은 차가웠다.
실장이 회장의 아들임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그저 놀기 좋아하는 갑부집 놈팡이라며 모두가 우습게 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치의 틈도 없는 냉정한 판단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문제점을 파악하는 능력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대우해 주고 맞춰 주며 데리고 놀아 볼까 했건만 만만치가 않았다. 과연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라는 말이 맞는 듯.
영하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순간에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한결같이 새로운 실장을 우습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흘렀다.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는 이 부장을 흘깃 쳐다본 영하가 내쳐 몰아댔다.
“이 부장님. 우리 회사가 쓰고 있는 시스템 팀 교체합니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나아지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직접 확인하신 것은 맞습니까?”
서릿발 같은 영하의 눈빛을 받아 내지 못한 이 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영하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간의 정리를 따지며 머뭇거리면 앞으로가 힘들다.
이 부장을 바라보던 차가운 눈초리로 사무실을 둘러보자 다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 안의 직원들은 각자의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혹시나 새로 온 실장과 눈이 마주칠까 봐 서류를 뒤적이며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다른 업체로 알아서 추천하시고, 전면적으로 편하고 효과적인 업무 시스템으로 교체합니다. 업무 평가서 확실하게 체크하고 보고서 작성하십시오. 현 시스템보다 오류가 절반 이상 적어야 합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갓 스물네 살밖에 안 된 새파란 어린애 주제에 서슬 퍼런 기세로 다그치는 영하에게 불만이 많은 이 부장이었다. 하지만 한 치의 틈도 없는 정확한 지적에 솟는 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굳은 얼굴로 돌아 제자리에 앉는 이 부장을 지켜보던 영하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착잡한 눈빛으로 서류를 들춰 봤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오만해 보이는지. 그러나 여기서 한 수 접고 가면 모든 것이 틀어진다. 이제는 경영인으로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지휘해야 할 입장이었다. 정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르게 굴면 질서가 안 잡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영하였다.
우선 기세는 잡았다. 남은 것은 능력을 보여 주는 일뿐.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신의 방법으로 끌어가리라.
사회인으로는 초년생이지만 그만큼 영민한 그였다. 처음에 누가 기세를 잡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래서 한동안 이렇게 오만 방자한 인간으로 나가야 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든 이 부장의 벌게진 얼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네, 백야입니다.”
[누구? 혜주 씨?]
“네, 송혜주입니다. 누구세요?”
[이런 섭섭할 때가! 하하. 나야, 반 대리.]
“네, 사장님 바꿔 드려요?”
[아니, 혜주 씨 미안한데, 내 책상에 있는 디스켓 케이스 좀 이리로 가져다줘. 오늘 꼭 필요한 건데 내가 잊어버리고 안 들고 왔다. 아침에 들려서 가지고 온다는 게 정신없어 그냥 왔지 뭐야. 여기 팀장이라는 인간 성질이 어찌나 더러운지, 빨리 하라고 난리 났거든.]
일은 잘하지만 늘 덜렁대는 반 대리의 불평을 흘려들으며 혜주는 버릇처럼 반 대리의 책상을 눈으로 훑었다. 빨간색 케이스가 보였다.
“책상에 올려놓은 빨간색 케이스 말씀이세요?”
[맞아, 맞아. 지금 이리로 가지고 올 수 있지?]
“네, 지금 갈게요.”
전화를 끊은 혜주가 발 빠르게 신영빌딩으로 향했다.
이번 일은 반 대리의 말대로 중요했다. 회사는 이번 일의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만큼 큰일이었고, 성사만 된다면 이쪽 업계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클 수 있었다. 그래서 매사 부드럽고 느긋하던 사장도 무척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기업 신영은 주종목인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문어발식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커 가는 신진 그룹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신영빌딩은 한창 커 가는 기업의 건물답게 으리으리했다. 덜렁대던 반 대리가 그동안 실수 없이 잘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제 버릇 남 줄까. 그새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아예 이쪽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반 대리가 가끔 회사에 모습을 보일 때마다 열심히 씹어 대던 팀장이라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싶어 혜주도 조금 두근거렸다.
반 대리는 그를 열심히 씹는 와중에도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혜주도 다른 직원들처럼 그가 궁금했다. 반 대리는 느슨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고집이 센 편이라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혜주가 유리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이런 큰 건물에 와 보는 것은 처음인 것이다.
하지만 이내 넓은 로비 한가운데 안내 데스크가 보인다. 잘 차려입은 경비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가 부리나케 그쪽으로 다가가던 그 순간, 나이 많은 경비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고개만 까딱거리는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눈을 들어 그 남자를 스쳐 지나가던 혜주의 눈이 다시 등잔만큼 커다래졌다.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남자는 분명 혜주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 혜주의 발걸음을 꽁꽁 묶어 버린 사람!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혜주는 6년이나 지났는데도 단번에 영하를 알아본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끼면서 멍하니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일까?
아이 같던 얼굴에는 이제 청년의 진지함과 패기가 넘쳐흘렀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잿빛 스트라이프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그 남자는 가까이 분명 영하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혜주가 그를 잊을 리 없었다.
평생이라도 기다리리라 마음먹은 남자. 내 남자!
떨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영하가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혜주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니? 어째서 여기서 널 보게 되는 거야? 그 차가운 얼굴은 뭐니, 영하야?’
넋이 빠진 채 다가오는 영하를 바라보던 혜주가 막 그를 향해 손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자신을 지나쳐 무심히 걸어갔다. 그리고 혜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타인처럼 자신을 지나쳐 버린 영하의 태도에 그녀는 경악했다. 너무 놀라서인지 제게서 멀어지는 그를 뛰어가 잡지도 못했다.
잠시간 멍하니 서 있던 혜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영하를 부르려는 찰나였다. 하이 톤의 날카로운 음성이 환청처럼 넓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영하 씨-!”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영하가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환하고 따스한 웃음을 뿌리며…….
그럴 리가 없었다. 영하가 자신을 몰라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사라진 후, 혜주는 한동안 지나치는 사람들 모습에서 영하를 찾아 헤맸다.
비슷한 체격의 남자만 봐도 정신없이 불러 세우고는 눈물을 쏟아 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너무 닮은 사람을 만나 착각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 또 병이 도지나 보군.”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상황을 바로 부인해 버리는 혜주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어느새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보지 않으니까. 혜주가 아는 영하는 약속이라면 죽어서라도 지키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저렇게 차갑고 타인의 표정을 지닌 남자가 그녀가 아는 영하일 리가 없었다.
여자를 품에 안고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넋 놓은 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혜주 씨? 뭐 해? 기다리다 지쳐서 여기까지 나왔잖아.”
어깨를 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혜주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혜주 씨, 울어? 뭔 일이야? 어디 아파?”
혜주의 얼굴을 확인한 반 대리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현실로 들어온 혜주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변명하며 반 대리가 기다리던 물건을 건네주고 도망치듯 서둘러 건물을 나섰다.
문득 아들 해빈이 보고 싶어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작스레 나타난 영하와 똑 닮은 사내. 처음 보는 타인이건만 그 사내로 인해 그동안 꽁꽁 숨겨 놓았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버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아들 해빈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해빈을 보지 못하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급하게 지나는 택시를 불러 세운 혜주는 그 길로 해빈이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영하 씨. 왜 그래요?”
넋이 빠진 것 같은 영하의 모습에 급기야 수지가 칭얼거렸다.
간만에 점심이나 하자고, 애원하여 만든 약속이었다. 하지만 마주 앉아서도 딴생각을 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급기야 그녀도 화가 났다.
“아. 미안, 잠시 딴생각을 좀 하느라…….”
“아, 진짜 너무해요. 우리 얼마나……. 간만에 만나는 줄 알아요? 그런데도 딴생각이나 하고……. 나 복학하면 미팅하고 다닐 거야!”
“그래. 그것도 좋지. 좋은 추억이 될 거야.”
“뭐예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렇지. 난 영하 씨 애인이란 말예요. 적어도 질투하는 척이라도 하라고요!”
내심 영하의 질투를 기대했던 수지가 짜증을 냈다. 하지만 영하의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솔직히 눈앞의 수지가 무슨 소릴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 로비를 나서며 스쳐 지난 여자가 왜인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을 본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무심히 지나쳤건만 그 순간 싸하게 아파 오던 가슴의 통증이 당황스럽다.
심장이 조여 온다고 했던가?
그때 자신의 심장이 그랬다. 낯선 여자를 지나치는 순간부터 가슴이 찔린 듯 아파 왔다. 그리고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를 맡은 듯했다.
‘분명 모르는 여자였는데…….’
혹시 지워진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치듯 본 여자였지만 창백한 하얀 얼굴과 단정한 옷차림, 심지어 그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의 색깔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영하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를 꼭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고 슬픔과 놀람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여자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모르는 여자의 감정이 왜 그리도 선연하게 손에 잡힐 듯 느껴졌을까?
마치 데자부처럼…….
왠지 익숙한 느낌에 의아했지만 이내 그렇게 수긍했다.
그렇다. 단순한 기시감이다.
“춥다. 얼른 들어가자.”
고급스런 레스토랑 앞에서 수지를 에스코트하는 와중에도 그는 내내 낯선 여자를 되새기고 있었다.



3장. 감춰진 진실(1)


“어디?”
“신영. 이번에 신입사원 모집하잖아. 제길! 이번이 몇 번째인지. 진짜 취직하기 힘들어 못살겠다.”
간만에 혜주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한 정아가 짜증을 내며 하소연했다. 정작 혜주를 이모부 회사에 밀어 넣고도 자신은 이모부에게 기대지 않았다.
말로는 싸이코 집단에 끼기 싫다는 등, 가족 경영은 나쁜 거라는 등 하지만 쉽게 안주하고 싶지 않은 본인의 고집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정아답기도 했다.
“이번이 졸업 앞두고 12번째로 이력서를 넣은 거야. 조금 있으면 민우 씨도 제대하는데 얼른 취직해야 사는 게 좀 나아지지.”
대학 CC인 민우와 1학년 때부터 동거에 들어갈 정도로 자기감정에 솔직한 정아였다. 덕분에 지금의 집에 혜주와 해빈이 살 수 있었다.
민우가 군대에 간 후에도 그와 살던 지키며 사는 정아는 말만 거칠 뿐, 알고 보면 혜주만큼이나 일편단심이었다.
보통은 청바지에 티만 걸치고 다녀 선머슴처럼 보이지만 그 알맹이는 순정으로 꽉 찬 친구였다. 그래서 정아와 혜주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 내일은 면접이야?”
“응. 그래서 너희 집에서 자는 거잖아. 알잖니. 나 한번 잠들면 시계 소리 못 듣는 거. 내일 10시부터 면접이라고. 에이씨~ 이번엔 진짜 잘돼야 할 텐데.”
태연한 표정이지만 내심 긴장이 되는지 속 편한 정아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나 혜주는 정아에게 신영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로비에서 스친, 이름마저도 영하라던 남자를 떠올렸다.
‘정말 영하가 아닐까? 혹 이름 때문에 영하로 착각한 것일까? 그렇겠지? 영하가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나를 지나칠 리 없어. 그래, 분명 그 사람은 영하가 아니야.’
혜주는 그렇게 하루 종일 수십 차례도 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야! 뭔 생각해?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안 좋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정아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혜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냐, 요즘 좀 피곤하네. 얼른 자자. 내일 면접 보려면 일찍 자야지. 해빈이는 벌써 잠들었잖아.”
“어쩌면……. 근데 얘는 커 갈수록 제 아빠를 똑 닮는다. 신기해.”
두 사람 가운데 누워 새근새근 숨을 쉬며 꿈나라를 헤매는 해빈이를 보던 정아가 감탄이라도 하듯 말했다.
정아와 혜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혜주와 영하의 사랑을 옆에서 지켜봤고, 또 힘을 다해 응원해 주었다.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친구가 문제아로 유명했던 영하를 만나고 바뀌어 가던 모습에서부터 혜주로 인해 거칠고 차갑기만 하던 영하가 웃음을 되찾게 되기까지. 정아는 두 사람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렇지? 다행이야. 영하 닮아서. 우리 영하가 좀 잘생겼니?”
“미친……. 내 보기에는 우리 민우가 더 나아.”
정아도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혜주는 내심 정아에게 신영빌딩에서 보았던 남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잘못 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괜한 말로 친구의 기분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 애써 잘못 봤다며 마음을 다스리고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

“오늘 면접은 몇 명이지요?”
“네. 1차 서류 통과하고, 2차 면접까지 마친 50명입니다.”
“음, 25대 1의 경쟁이군요.”
“네, 그래도 인재가 꽤 되네요.”
“그래요? 기대하지요. 그럼 시작할까요?”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사무적인 영하의 말에 1번부터 호명이 시작되었다.
면접은 순조로웠다. 가끔 뜬금없이 던지는 영하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면접자들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에 뽑히는 신입사원 중 보충되는 인원 말고 따로 한 명을 보좌관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자리에 일부러 면접관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썩 마음에 드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부장급 이상의 간부들 사이에 어린 티가 역력한 자신이 면접관으로 있다는 사실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도 다소 당황스런 기색을 보이긴 했다. 면접관이 아무리 잘 보아도 자신보다 어리거나 같은 연배라면 누구나 그러리라.
‘제길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을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솔직히 아직은 연륜의 부족함을 느끼는 영하였다. 그런 만큼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첩첩산중일 터였다. 그래서 자신과 맞을 만한 인물을 찾기 위해 일부러 참석한 것이다.
어느새 면접은 중반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다들 엘리트였다.
“안녕하세요. 27번 유정아입니다.”
제법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 영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칼을 보자 ‘짧은 머리면 더 잘 어울릴 텐데?’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낯선 여자임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자기소개를 하던 여자가 영하를 보더니 놀란 눈으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