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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장. 감춰진 진실(2)
“정……영……하?”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까지 저으며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여자의 모습에 영하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를 알아? 어떻게?
“유정아 씨? 절 아십니까?”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영하를 노려보는 여자로 인해 순간 면접장이 조용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자식! 왜 네가 여기 있어! 어째서 멀쩡히 여기 있는 건데! 이 나쁜 놈아!”
순간적으로 영하에게 달려든 여자가 욕설과 함께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갑자기 난폭하게 돌변한 여자의 행동에 면접 장소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작 멱살을 잡힌 영하만은 침착했다.
“절 아시나 보군요. 이 손부터 놓고 얘기하죠. 그리고 지금은 면접 중입니다만. 잊었습니까?”
“뭐? 면접?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 개자식아! 네가 여기서 버젓이 앉아 있는 동안 혜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아? 이럴 거면서 왜 기다리라고 했니! 그 멍청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넌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었어?”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지르는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던 여자의 눈에서 말과는 다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위에서는 그 기세에 눌려 여자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쑥덕이고 있었다.
속으로는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 보이는 영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여자 때문인지 다시금 그 지독한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채워 왔다.
아니,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우선 이 자리는 정리를 해야 했다. 머릿속을 정리한 영하가 여자의 손을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면접은 조금만 쉬죠. 그리고 당신, 나 좀 볼까? 따라와.”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둘러본 영하가 상황을 정리하고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아무도 쓰지 않는 빈 회의실로 들어선 영하는 그제야 여자의 손을 놓았다.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여자는 아예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면접을 위해 깔끔하게 했던 화장이 흘러내려 얼굴에 묘한 얼룩을 남겨 놓았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도 흐트러져 흘러내린 모양이 제대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밀려오는 짜증과 두통으로 인해 영하도 더 이상의 인내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음성과 칼날 같은 표정 때문일까? 순간 여자의 어깨가 잠시 흠칫했다.
“뭐? 그만? 이 나쁜 새끼……. 그래, 내 예전부터 네놈 알아봤지. 이 싸가지 없는 인간아! 아니지, 인간 망종!”
멈칫한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었던 듯 여자의 독설은 여전했다. 눈물을 닦고 주저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매는 매서웠다.
“자. 이제 이성적으로 말해 보자고. 우선 당신, 나 아나?”
“뭐야? 이제는 아예 쇼를 하신다? 왜 혜주도 모른다 하려고?”
여자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 보며 영하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난 혜주란 사람 몰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정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혜주를 잊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인간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무척이나 건방은 떨었지만 절대 이렇게 나올 만큼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너……. 정영하 아니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정아의 음성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영하는 여전히 당당하기만 했다.
“정영하 맞아.”
“그런데 왜 혜주를 몰라? 왜 나를 몰라?”
영하는 여전히 진전 없는 대화에 짜증이 밀려왔다. 두통은 이미 극에 달해 머리를 꽝꽝 울려 댔다.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정아가 다시 물었다.
“하나만 더 묻자. 너, 정훈고 다녔던 정영하 아냐? 혜원여고 다니던 송혜주랑 사귀었던 그 정영하 아니냐고!”
당당한 얼굴로 모른다고 말하는 영하의 모습에 정아도 슬슬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음. 난 미국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알고 있는데…….”
난데없는 물음에 영하가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하! 나왔다고 알고 있어?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너 쌍둥이야?”
“아니, 아마 아닐 걸.”
“아닐 걸?”
점입가경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정아는 자신이 아는 영하라 굳게 믿었던 것도 잠시, 스스로에 대해 타인처럼 읊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누구인지 그녀마저도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럼 나이는?”
“아마 여기 나이로 스물넷이지?”
“그런데 왜 내가 아는 정영하가 아니라는 거야?”
동문서답처럼 이어지던 둘의 대화는 기어이 정아의 비명 같은 외침으로 끝이 났다.
너무나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정아는 진짜 자신이 무언가 혼동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흠……. 솔직하게 말하지. 난 6년 전의 일은 아무것도 몰라. 미국서 사고가 있었다는 것 외엔. 6년 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그것과 관련이 있나?”
담담한 그의 설명에 놀란 정아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의 말에 굳어진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하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 뭐라더라……. 혹시 기억상실……? 그런 거야?”
“아마도.”
이제야 이해가 된 것일까?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정아가 잠시 휘청거렸다.
“뭐 이런 개 같은……. 그래서 넌 혜주를 기억 못 한다? 이런 미친.”
억지로 몸을 일으킨 정아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마저 중얼거렸다.
“뭐 이런 진짜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진짜 혜주 기억 안 나?”
넋 나간 얼굴로 다그치는 정아를 묵묵히 지켜보던 영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길! 영하도 욕설이 나올 것만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소한 움직임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울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잠시 멈췄던 정아의 울부짖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어떻게 혜주를 잊을 수가 있어? 이 나쁜 새끼야! 아무리 기억상실이라도 잊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혜주를 잊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럼 그 바보 같은 계집애는 어쩌라고? 너만 목 빠지게 기다린 그 병신 같은 년은 어쩌라고! 그리고 해빈이는……. 뭐 이런 그지 같은 일이 다 있어!”
혼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정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영하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너 지금 쇼 하는 거지? 지금 드라마 써? 너무 오랜만에 와서, 약속보다 훨씬 늦어서 너 지금 미안해서 쇼 하는 거잖아. 그치?”
급기야 애원하며 매달리는 정아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정녕 기억에 없는 사람이건만 그 모습이 영하의 머리를,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이다. 내가 정훈고를 나왔다고 했나?”
“그래, 너 정훈고 나왔어. 제길!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넌 이미 혜주를 지웠는데. 씨발! 이게 뭐야! 우리 혜주 그 불쌍한 건 어떡하느냐고!”
웬일인지 혜주라는 이름만 나오면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리고 그에 따라 두통도 점점 심해졌다.
이를 악물고 꾹 참고는 있지만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하게 등을 적시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 내라는 듯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머리를 울리는 것은 끔찍한 두통뿐이었다.
“내가 한번 만나도 될까? 그 혜주라는 사람?”
영하는 욱신거리는 머리와 급기야 울렁거리기 시작한 속을 다스리느라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가슴의 통증이 먼저였다.
“혜주를 만나? 기억도 못 하면서? 이 미친놈! 누굴 죽이려고? 만나고 싶으면 기억부터 해, 나쁜 놈아. 그전에 혜주 앞에 나타나지 마. 너! 기억도 못 하고 혜주 앞에 나타나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너 때문에 수도 없이 아파한 애야. 그런데 지금 모습으로 나타나 또 혜주를 울리려고? 이 새끼야, 너 때문에 혜주가 흘린 눈물이 모르긴 몰라도 한강 물만큼은 될 거다. 나쁜 놈! 넌 혜주를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 다른 건 다 몰라도 혜주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혜주를 만나려거든 기억부터 찾아. 알아들어?”
정아는 지금 자신의 말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불쌍한 혜주를 생각하자니 저 혼자 너무나 멀쩡한 영하의 모습에 정말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절망하는 혜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정아는 말도 안 되는 억지만을 남기고 거칠게 몸을 일으켜 그곳을 벗어났다. 술이 필요했다. 어디든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영하를 만난 것 자체를 꿈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폭탄을 던지듯 자기 말만 늘어놓고 휙 사라지는 여자를 잡으려 하지만 두통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영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숨쉬기도 힘이 들었다. 더불어 가슴의 통증도 끝없이 커져갔다.
자신이 잊고 있는 무언가를 하루빨리 기억해 내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힘겹게 핸드폰을 꺼낸 그가 저장된 번호를 눌러 한 박사를 찾았다. 시야가 희미해진다. 치미는 구토도 참기 어려웠다. 수화기 너머 한 박사의 음성이 들려오는 느낌에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박사……님? 저……. 영하……. 머, 머리가…….”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마저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간신이 용건을 말하는 도중에 그의 눈앞엔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눈을 떴어도 보이는 사물은 여전히 흐릿했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해 영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두통은 사라진 듯 묵직함만이 남아 있었다.
“흠! 정신이 드나?”
익숙한 목소리. 한 박사였다.
“네.”
“다행이군. 왜 거기 쓰러져 있었나?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두통은 어떤가?”
“좋아진 것 같군요.”
“한동안 괜찮더니 왜 또 시작인지……. 쯧. 아무튼 사고 후유증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 더 검사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듣는 사이 시야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곧 잔뜩 찌푸린 한 박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자네 회사 의무실이라네. 급해서 우선 이곳으로 옮겼네.”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잖아?”
조심스럽게 묻는 한 박사의 음성이 살짝 흔들렸다. 애꿎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영하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일순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영하가 그제야 유정아, 라는 여자와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한 박사님. 박사님은 저희 집안 주치의시죠?”
몸을 일으키며 담담한 음성으로 묻는 모습에 한 박사의 눈가에 일순 경련이 일었다.
“그, 그렇지.”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제가 진짜로 미국에서 공부를 마쳤습니까?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지는 않았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왜 감추셨습니까? 제가 정훈 고등학교 다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제가 계속 미국에서 살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리 묻는 영하의 목소리는 낮고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가웠다.
아직은 새파랗다고 할 만한 나이 어린 남자였다. 그러나 일말의 여지도 없이 추궁하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져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한 박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솟았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전부?”
마치 있어선 안 되는 일을 보듯 한 박사가 심하게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랬군요. 제길!”
영하의 거친 목소리에 한 박사는 이내 또 긴장했다. 그럼 기억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란 말인가?
“뭡니까? 도대체 제 과거에 뭐가 있는 거죠? 말해 주신 것들 중에 대체 진실이 있기는 합니까? 이제는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동안 묻어 두었던 과거에 대한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실을 묻는 영하의 목소리가 자못 격하게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박사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것보다 우선은 자네의 그 두통이 문제네. 병원에 들러 검사부터 받아 보게.”
“그렇게 말 돌리지 마십시오.”
“후……. 난 더 할 말이 없네. 어쩌겠나? 나와 병원으로 갈 텐가?”
계속 말을 돌리는 한 박사를 차갑게 바라보던 영하가 짧은 한숨을 끝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회사일 보고 며칠 뒤에 들르지요.”
체념 섞인 말에 그제야 한 박사의 미간이 펴졌다. 궁지에서 벗어난 표정이랄까? 날카로운 영하의 시야에 그의 그런 모습이 걸렸다.
자신의 과거가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잊혀진 기억 속에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감춰진 아주 중요한 진실이.
*
갑자기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혜주가 인상을 흐렸다. 밤 12시.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었다.
오늘 간만에 본 엄마의 얼굴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여 그러잖아도 마음이 안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한 엄마다.
엄마는 혜주를 볼 때마다 안쓰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혜주도 목이 메곤 했다. 아직도 자신은 물론 외손자인 해빈도 외면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가끔은 원망스런 마음이 앞서는 것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긴 한숨과 함께 현관으로 나간 혜주는 술에 만취한 정아를 발견하곤 놀라 급하게 부축했다.
“너 왜 이래? 오늘 면접 망쳤어?”
아침에 면접이라고 부산을 떨며 갖은 멋을 내고 나갔던 정아였다.
“불쌍한 계집애. 딱한 내 친구. 병신. 머저리. 널 어쩌면 좋으니……. 혜주야! 널 어쩌면 좋아…….”
현관에 들어선 정아가 급기야 혜주를 붙잡고 오열을 토해 냈다. 정아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인 혜주는 갑작스런 일에 당황했다.
술을 좋아하고 입이 걸기는 해도 남을 챙길지언정 실수는 없는 정아였다. 여태 남보다 먼저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자존심 강한 친구임을 누구보다 혜주가 잘 알았다.
그런 정아가 이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다니. 낯선 모습에 마음마저 불안해졌다.
“너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정아야? 정신 차려 봐!”
혜주가 힘겹게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동안에도 정아는 연신 혜주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겨우 거실에 들여 코트를 벗기고 눕히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야유, 이 계집애야. 이렇게 술에 골아 들어오면 어떡해? 얘가 민우 씨 없다고 완전 지 멋대로야. 너 민우 씨 제대하면 다 일러줄 거야. 알아서 해.”
어느새 눈이 감긴 정아를 보며 혜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고맙기만 한 친구 정아. 언제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하고 구박하지만 또한 늘 자신의 편이었다.
해빈이를 낳을 때도 옆에 있었던 사람은 정아뿐이었다. 그리고 해빈에게 하나뿐인 가장 좋은 이모가 되어 준 것도 정아였다.
엄마는 외손자라고 해빈을 예뻐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먼저인 것일까? 예뻐하는 반면 딸이 힘들게 사는 원인이이라 느껴서인지 가끔은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나이보다 눈치가 빠른 해빈인지라 그 시선을 아는지 외할머니에겐 제대로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아는 늘 따스했고 정말 제 자식처럼 사랑을 주기에 해빈이도 끔찍하게 좋아하며 따랐다. 그런 친구가 도대체 무슨 일로 이토록 술이 필요했는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됐다.
날씬한 정아였지만 키가 커서 거실 한가운데에서 잠이 든 그녀를 방으로 옮기는 것은 힘에 부쳤다. 그래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와 춥지 않도록 감싸 주는 일이 혜주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추울까 싶어 막 거실의 온도를 높이려 보일러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정아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혜주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정영하, 나쁜 놈. 어떻게 혜주를 잊어. 이 나쁜 새끼야. 이 쳐 죽일 인간. 인간 망종.”
정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영하의 이름에 혜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앞뒤 생각 없이 잠이 든 정아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급함이 밀려왔다.
“정아야! 정아야? 눈 떠 봐.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영하가 소식 들었어? 응? 날 잊다니? 정아야? 정아야!”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정아는 이미 세상모르고 잠이 든 상태였다. 그저 잠꼬대에 불과하겠지만 혜주에게 미치는 파장은 무시할 수 없이 컸다. 영하라는 이름 하나에 제 심장이 쑥 하고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멍하니 정아를 바라보던 혜주가 한참만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향했다.
꽤나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해빈은 깨지 않고 편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을 마치 기도하는 듯 모으고 잠이 든 해빈의 얼굴은 천사처럼 보였다. 새근거리는 아이 특유의 숨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리고 있었다.
혜주는 제 아이의 순진함이 새삼 부러워졌다.
잠이 든 해빈의 모습에 영하의 얼굴이 겹쳐 보여 그녀는 기어이 또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랠 법도 하건만 영하와의 추억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했다. 영하와는 정말 처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혜주의 기억에는 그 순간순간들이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3장. 감춰진 진실(2)
“정……영……하?”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까지 저으며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여자의 모습에 영하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를 알아? 어떻게?
“유정아 씨? 절 아십니까?”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영하를 노려보는 여자로 인해 순간 면접장이 조용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자식! 왜 네가 여기 있어! 어째서 멀쩡히 여기 있는 건데! 이 나쁜 놈아!”
순간적으로 영하에게 달려든 여자가 욕설과 함께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갑자기 난폭하게 돌변한 여자의 행동에 면접 장소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작 멱살을 잡힌 영하만은 침착했다.
“절 아시나 보군요. 이 손부터 놓고 얘기하죠. 그리고 지금은 면접 중입니다만. 잊었습니까?”
“뭐? 면접?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 개자식아! 네가 여기서 버젓이 앉아 있는 동안 혜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아? 이럴 거면서 왜 기다리라고 했니! 그 멍청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넌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었어?”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지르는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던 여자의 눈에서 말과는 다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위에서는 그 기세에 눌려 여자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쑥덕이고 있었다.
속으로는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 보이는 영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여자 때문인지 다시금 그 지독한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채워 왔다.
아니,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우선 이 자리는 정리를 해야 했다. 머릿속을 정리한 영하가 여자의 손을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면접은 조금만 쉬죠. 그리고 당신, 나 좀 볼까? 따라와.”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둘러본 영하가 상황을 정리하고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아무도 쓰지 않는 빈 회의실로 들어선 영하는 그제야 여자의 손을 놓았다.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여자는 아예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면접을 위해 깔끔하게 했던 화장이 흘러내려 얼굴에 묘한 얼룩을 남겨 놓았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도 흐트러져 흘러내린 모양이 제대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밀려오는 짜증과 두통으로 인해 영하도 더 이상의 인내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음성과 칼날 같은 표정 때문일까? 순간 여자의 어깨가 잠시 흠칫했다.
“뭐? 그만? 이 나쁜 새끼……. 그래, 내 예전부터 네놈 알아봤지. 이 싸가지 없는 인간아! 아니지, 인간 망종!”
멈칫한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었던 듯 여자의 독설은 여전했다. 눈물을 닦고 주저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매는 매서웠다.
“자. 이제 이성적으로 말해 보자고. 우선 당신, 나 아나?”
“뭐야? 이제는 아예 쇼를 하신다? 왜 혜주도 모른다 하려고?”
여자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 보며 영하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난 혜주란 사람 몰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정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혜주를 잊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인간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무척이나 건방은 떨었지만 절대 이렇게 나올 만큼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너……. 정영하 아니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정아의 음성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영하는 여전히 당당하기만 했다.
“정영하 맞아.”
“그런데 왜 혜주를 몰라? 왜 나를 몰라?”
영하는 여전히 진전 없는 대화에 짜증이 밀려왔다. 두통은 이미 극에 달해 머리를 꽝꽝 울려 댔다.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정아가 다시 물었다.
“하나만 더 묻자. 너, 정훈고 다녔던 정영하 아냐? 혜원여고 다니던 송혜주랑 사귀었던 그 정영하 아니냐고!”
당당한 얼굴로 모른다고 말하는 영하의 모습에 정아도 슬슬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음. 난 미국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알고 있는데…….”
난데없는 물음에 영하가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하! 나왔다고 알고 있어?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너 쌍둥이야?”
“아니, 아마 아닐 걸.”
“아닐 걸?”
점입가경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정아는 자신이 아는 영하라 굳게 믿었던 것도 잠시, 스스로에 대해 타인처럼 읊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누구인지 그녀마저도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럼 나이는?”
“아마 여기 나이로 스물넷이지?”
“그런데 왜 내가 아는 정영하가 아니라는 거야?”
동문서답처럼 이어지던 둘의 대화는 기어이 정아의 비명 같은 외침으로 끝이 났다.
너무나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정아는 진짜 자신이 무언가 혼동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흠……. 솔직하게 말하지. 난 6년 전의 일은 아무것도 몰라. 미국서 사고가 있었다는 것 외엔. 6년 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그것과 관련이 있나?”
담담한 그의 설명에 놀란 정아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의 말에 굳어진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하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 뭐라더라……. 혹시 기억상실……? 그런 거야?”
“아마도.”
이제야 이해가 된 것일까?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정아가 잠시 휘청거렸다.
“뭐 이런 개 같은……. 그래서 넌 혜주를 기억 못 한다? 이런 미친.”
억지로 몸을 일으킨 정아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마저 중얼거렸다.
“뭐 이런 진짜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진짜 혜주 기억 안 나?”
넋 나간 얼굴로 다그치는 정아를 묵묵히 지켜보던 영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길! 영하도 욕설이 나올 것만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소한 움직임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울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잠시 멈췄던 정아의 울부짖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어떻게 혜주를 잊을 수가 있어? 이 나쁜 새끼야! 아무리 기억상실이라도 잊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혜주를 잊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럼 그 바보 같은 계집애는 어쩌라고? 너만 목 빠지게 기다린 그 병신 같은 년은 어쩌라고! 그리고 해빈이는……. 뭐 이런 그지 같은 일이 다 있어!”
혼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정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영하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너 지금 쇼 하는 거지? 지금 드라마 써? 너무 오랜만에 와서, 약속보다 훨씬 늦어서 너 지금 미안해서 쇼 하는 거잖아. 그치?”
급기야 애원하며 매달리는 정아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정녕 기억에 없는 사람이건만 그 모습이 영하의 머리를,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이다. 내가 정훈고를 나왔다고 했나?”
“그래, 너 정훈고 나왔어. 제길!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넌 이미 혜주를 지웠는데. 씨발! 이게 뭐야! 우리 혜주 그 불쌍한 건 어떡하느냐고!”
웬일인지 혜주라는 이름만 나오면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리고 그에 따라 두통도 점점 심해졌다.
이를 악물고 꾹 참고는 있지만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하게 등을 적시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 내라는 듯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머리를 울리는 것은 끔찍한 두통뿐이었다.
“내가 한번 만나도 될까? 그 혜주라는 사람?”
영하는 욱신거리는 머리와 급기야 울렁거리기 시작한 속을 다스리느라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가슴의 통증이 먼저였다.
“혜주를 만나? 기억도 못 하면서? 이 미친놈! 누굴 죽이려고? 만나고 싶으면 기억부터 해, 나쁜 놈아. 그전에 혜주 앞에 나타나지 마. 너! 기억도 못 하고 혜주 앞에 나타나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너 때문에 수도 없이 아파한 애야. 그런데 지금 모습으로 나타나 또 혜주를 울리려고? 이 새끼야, 너 때문에 혜주가 흘린 눈물이 모르긴 몰라도 한강 물만큼은 될 거다. 나쁜 놈! 넌 혜주를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 다른 건 다 몰라도 혜주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혜주를 만나려거든 기억부터 찾아. 알아들어?”
정아는 지금 자신의 말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불쌍한 혜주를 생각하자니 저 혼자 너무나 멀쩡한 영하의 모습에 정말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절망하는 혜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정아는 말도 안 되는 억지만을 남기고 거칠게 몸을 일으켜 그곳을 벗어났다. 술이 필요했다. 어디든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영하를 만난 것 자체를 꿈이라 치부하고 싶었다.
폭탄을 던지듯 자기 말만 늘어놓고 휙 사라지는 여자를 잡으려 하지만 두통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영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숨쉬기도 힘이 들었다. 더불어 가슴의 통증도 끝없이 커져갔다.
자신이 잊고 있는 무언가를 하루빨리 기억해 내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힘겹게 핸드폰을 꺼낸 그가 저장된 번호를 눌러 한 박사를 찾았다. 시야가 희미해진다. 치미는 구토도 참기 어려웠다. 수화기 너머 한 박사의 음성이 들려오는 느낌에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박사……님? 저……. 영하……. 머, 머리가…….”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마저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간신이 용건을 말하는 도중에 그의 눈앞엔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눈을 떴어도 보이는 사물은 여전히 흐릿했다.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해 영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잡혔다. 두통은 사라진 듯 묵직함만이 남아 있었다.
“흠! 정신이 드나?”
익숙한 목소리. 한 박사였다.
“네.”
“다행이군. 왜 거기 쓰러져 있었나?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두통은 어떤가?”
“좋아진 것 같군요.”
“한동안 괜찮더니 왜 또 시작인지……. 쯧. 아무튼 사고 후유증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 더 검사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걱정이 담긴 목소리를 듣는 사이 시야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곧 잔뜩 찌푸린 한 박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자네 회사 의무실이라네. 급해서 우선 이곳으로 옮겼네.”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잖아?”
조심스럽게 묻는 한 박사의 음성이 살짝 흔들렸다. 애꿎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영하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일순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영하가 그제야 유정아, 라는 여자와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한 박사님. 박사님은 저희 집안 주치의시죠?”
몸을 일으키며 담담한 음성으로 묻는 모습에 한 박사의 눈가에 일순 경련이 일었다.
“그, 그렇지.”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제가 진짜로 미국에서 공부를 마쳤습니까?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지는 않았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왜 감추셨습니까? 제가 정훈 고등학교 다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제가 계속 미국에서 살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리 묻는 영하의 목소리는 낮고 서리라도 내린 듯 차가웠다.
아직은 새파랗다고 할 만한 나이 어린 남자였다. 그러나 일말의 여지도 없이 추궁하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져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한 박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솟았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전부?”
마치 있어선 안 되는 일을 보듯 한 박사가 심하게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랬군요. 제길!”
영하의 거친 목소리에 한 박사는 이내 또 긴장했다. 그럼 기억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란 말인가?
“뭡니까? 도대체 제 과거에 뭐가 있는 거죠? 말해 주신 것들 중에 대체 진실이 있기는 합니까? 이제는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동안 묻어 두었던 과거에 대한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실을 묻는 영하의 목소리가 자못 격하게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박사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것보다 우선은 자네의 그 두통이 문제네. 병원에 들러 검사부터 받아 보게.”
“그렇게 말 돌리지 마십시오.”
“후……. 난 더 할 말이 없네. 어쩌겠나? 나와 병원으로 갈 텐가?”
계속 말을 돌리는 한 박사를 차갑게 바라보던 영하가 짧은 한숨을 끝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회사일 보고 며칠 뒤에 들르지요.”
체념 섞인 말에 그제야 한 박사의 미간이 펴졌다. 궁지에서 벗어난 표정이랄까? 날카로운 영하의 시야에 그의 그런 모습이 걸렸다.
자신의 과거가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잊혀진 기억 속에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감춰진 아주 중요한 진실이.
*
갑자기 울리는 현관 벨 소리에 혜주가 인상을 흐렸다. 밤 12시.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었다.
오늘 간만에 본 엄마의 얼굴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여 그러잖아도 마음이 안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한 엄마다.
엄마는 혜주를 볼 때마다 안쓰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혜주도 목이 메곤 했다. 아직도 자신은 물론 외손자인 해빈도 외면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가끔은 원망스런 마음이 앞서는 것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긴 한숨과 함께 현관으로 나간 혜주는 술에 만취한 정아를 발견하곤 놀라 급하게 부축했다.
“너 왜 이래? 오늘 면접 망쳤어?”
아침에 면접이라고 부산을 떨며 갖은 멋을 내고 나갔던 정아였다.
“불쌍한 계집애. 딱한 내 친구. 병신. 머저리. 널 어쩌면 좋으니……. 혜주야! 널 어쩌면 좋아…….”
현관에 들어선 정아가 급기야 혜주를 붙잡고 오열을 토해 냈다. 정아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인 혜주는 갑작스런 일에 당황했다.
술을 좋아하고 입이 걸기는 해도 남을 챙길지언정 실수는 없는 정아였다. 여태 남보다 먼저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자존심 강한 친구임을 누구보다 혜주가 잘 알았다.
그런 정아가 이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다니. 낯선 모습에 마음마저 불안해졌다.
“너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정아야? 정신 차려 봐!”
혜주가 힘겹게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동안에도 정아는 연신 혜주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겨우 거실에 들여 코트를 벗기고 눕히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야유, 이 계집애야. 이렇게 술에 골아 들어오면 어떡해? 얘가 민우 씨 없다고 완전 지 멋대로야. 너 민우 씨 제대하면 다 일러줄 거야. 알아서 해.”
어느새 눈이 감긴 정아를 보며 혜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고맙기만 한 친구 정아. 언제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하고 구박하지만 또한 늘 자신의 편이었다.
해빈이를 낳을 때도 옆에 있었던 사람은 정아뿐이었다. 그리고 해빈에게 하나뿐인 가장 좋은 이모가 되어 준 것도 정아였다.
엄마는 외손자라고 해빈을 예뻐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먼저인 것일까? 예뻐하는 반면 딸이 힘들게 사는 원인이이라 느껴서인지 가끔은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나이보다 눈치가 빠른 해빈인지라 그 시선을 아는지 외할머니에겐 제대로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아는 늘 따스했고 정말 제 자식처럼 사랑을 주기에 해빈이도 끔찍하게 좋아하며 따랐다. 그런 친구가 도대체 무슨 일로 이토록 술이 필요했는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됐다.
날씬한 정아였지만 키가 커서 거실 한가운데에서 잠이 든 그녀를 방으로 옮기는 것은 힘에 부쳤다. 그래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와 춥지 않도록 감싸 주는 일이 혜주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추울까 싶어 막 거실의 온도를 높이려 보일러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정아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혜주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정영하, 나쁜 놈. 어떻게 혜주를 잊어. 이 나쁜 새끼야. 이 쳐 죽일 인간. 인간 망종.”
정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영하의 이름에 혜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앞뒤 생각 없이 잠이 든 정아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급함이 밀려왔다.
“정아야! 정아야? 눈 떠 봐.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영하가 소식 들었어? 응? 날 잊다니? 정아야? 정아야!”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정아는 이미 세상모르고 잠이 든 상태였다. 그저 잠꼬대에 불과하겠지만 혜주에게 미치는 파장은 무시할 수 없이 컸다. 영하라는 이름 하나에 제 심장이 쑥 하고 가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멍하니 정아를 바라보던 혜주가 한참만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향했다.
꽤나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해빈은 깨지 않고 편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을 마치 기도하는 듯 모으고 잠이 든 해빈의 얼굴은 천사처럼 보였다. 새근거리는 아이 특유의 숨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리고 있었다.
혜주는 제 아이의 순진함이 새삼 부러워졌다.
잠이 든 해빈의 모습에 영하의 얼굴이 겹쳐 보여 그녀는 기어이 또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랠 법도 하건만 영하와의 추억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했다. 영하와는 정말 처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혜주의 기억에는 그 순간순간들이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