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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독왕 티르 1권 (1화)
프롤로그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다.
낮엔 부슬부슬 내리기만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쏟아부어 대는 통에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촛불의 주황빛에 고깃덩이만 번들거릴 뿐.
푸줏간 주인 메링거는 입구를 응시하다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장사를 접으려는 것이었다. 일찍 들어가 탁주나 한 사발 해야지.
하지만 앞치마를 벗고 돌아섰을 때 언제 왔는지 문간에 사람이 서 있었다.
“젠장, 기다리고 있을 땐 그렇게도 안 오더니. 어디로 몇 근 필요하쇼?”
물었지만 실루엣은 답이 없었다.
대신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촛불의 범위에 들어오자 서서히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로브에 후드를 깊이 눌러쓴 차림.
후드 때문에 자세한 인상은 볼 수 없지만 가느다란 턱 선이나 하얀 피부로 보아 여자라는 건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검은 로브가 여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은…….
‘아기?’
검은 로브가 안고 있는 포대기에 싸인 작은 생명체는 분명 아기였다.
푸줏간에 아기라니?
더구나 이 비가 오는 저녁에?
메링거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검은 로브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가르케 마을의 푸줏간 주인, 메링거 미네. 당신한테 맡길 것이 있다.”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나 반박할 틈조차 없이 검은 로브는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얼결에 주머니를 받자 절그렁하는 소리가 꽤 묵직했다. 메링거는 직감적으로 이 무게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돈?’
그것도 적지 않은 양. 아니나 다를까 주머니를 열자 환한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꿀꺽―
메링거는 마른침을 삼키곤 고개를 들어 검은 로브를 쳐다봤다.
“뭐요? 왜 이런…….”
“이유는 말했다. 아이를 맡긴다.”
“단지 그것뿐이요? 아이를 거두기만 하면 금화를 준단 거요?”
“16년 후 아이를 찾으러 올 것이며,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어떻게 키우든 관계없지만…….”
검은 로브가 고개를 들었다.
후드 속 핏빛 눈동자가 타오른다. 검은 로브는 노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Adanuch mem lu mus.”
“커, 컥!”
그 순간 메링거는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턱 막혔다.
눈앞이 노래지며 몸에 힘이 축 빠진다. 메링거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할 수 있는 건 핏발 선 눈동자로 자비를 호소하는 것뿐.
다행히 숨이 넘어가기 직전 검은 로브는 시선을 거두었다.
“허억, 허억.”
“16년 후 아이가 없으면 금화의 무게만큼 심장을 도려낼 것이다. 네 심장으로 모자라면 다음엔 네 아내를, 그다음엔 네 자식들을.”
“그건 너무하지 않소. 그런 조건이라면 차라리 나는 금화를 안 받고…….”
소리쳤지만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검은 로브는 이미 사라진 후였던 것이다. 남은 건 차가운 바닥과 언저리에 떨어져 있는 금화 주머니뿐.
메링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작업대 위의 강보에 쌓인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나 항의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아기는 이곳에 있고 금화 또한 여기에 있다.
그렇게 계약은 이미 실행되고 있었다.
제1화. 어느 푸른 날에(상) (1)
덜그럭, 덜그럭.
티르는 발바닥에 전해지는 미미한 진동에 뒤로 돌아보았다.
마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오고 있다.
이내 앞질러 가더니 짐칸에 네 명의 소녀가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각각의 복장. 평범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 소녀들이 실려 가는 걸 보니 티르는 문득 예전에 아버지가 해 줬던 말이 떠올렸다.
“그건가…….”
아마 시골에서 나이 어린 소녀를 사다가 도시의 사창가에 파는 그런 부류일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며 티르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뿐. 시야에서 마차가 사라지자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날씨는 여전히 푸르렀고 티르는 들판을 가로질러 너털너털 걸었다.
“그래인, 있어요?”
피혁 상점의 문을 열며 소리쳤다. 하지만 상점 주인인 그래인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가죽을 보며 기웃거리는데 뒤에서 상점 문이 열렸다.
“왔냐?”
상점에 들어온 노인은 그래인이었다. 머리는 희었지만 주름은 적은 편이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거동도 불편한 노인네가 그냥 방에 앉아 있지.”
“어허, 이놈아 늙었다고 무시하냐? 나도 내 생활이 있어.”
그래인이 가죽을 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티르는 노루 가죽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사흘 전에 말한 노루 가죽이에요. 조금 흠집 나긴 했는데 그럭저럭 괜찮아요.”
“흠, 그래?”
그래인은 티르가 내놓은 노루 가죽을 들었다.
그런데 대충 훑어보기만 하고 티르를 힐끔거리는 모양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많이 바쁘냐?”
“왜요?”
그래인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급히 필요한 가죽이 있어서 그러는데 다람쥐 가죽 두어 장만 구해다 줄 수 있냐?”
“언제까지요?”
“가능한 빨리. 오늘 구하면 오늘 바로 가져다줘도 상관없어. 빨리 가져다주면 그만큼 더 후하게 쳐 주지. 거절하기 어려운 분의 주문이라서 말이야.”
“다람쥐 가죽이라…….”
티르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전으론 가져다줄게요. 대신 돈은 확실히 쳐 줘야 하는 거 알죠?”
“허허허, 돈이야 확실하지.”
고민하던 일이 풀려서인지 그래인이 빠진 이를 드러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 그래인을 뒤로하고 상점에서 나가려는데 그때 그래인이 티르를 다시 불렀다.
“아참, 티르. 혹시 세피아 만났냐?”
“세피아요?”
티르가 쳐다보자 그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까 밖에서 들어올 때 보니까 세피아가 너 보러 간다며 나가던데?”
“글쎄요. 오늘은 천막에서 온 게 아니라 건너편 산에서 노루 사냥하고 바로 이쪽으로 온 거라.”
“그러냐? 아무튼 세피아가 찾더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래인이 묻자 티르는 별일이랄 것도 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이 마을에서 제일 할 일 없는 녀석이니까요. 아무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이, 티르.”
티르가 돌아보니 그래인이 노인 특유의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평생 장가 못 간다. 다른 놈이 채 가기 전에 얼른 잡아.”
* * *
마을에서 뒷산 천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혼자 걷는 이 길이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티르는 여전히 허전함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와 함께 오가며 생긴 길인 까닭이었다.
다만 3년 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어느 날 무리해서 사냥을 나간 후로 아버지는 다신 함께 이 길을 걷지 못하게 됐다.
“비 오는 날은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나 말하던 당사자가…….”
아버지 생각에 싱숭생숭해져 괜히 티르는 나뭇가지만 부러뜨렸다.
그렇게 얼마쯤 홀로 걸었을까 갑자기 수풀 속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티르!”
쳐다보니 수풀 속에서 주황빛 머리칼이 불쑥 솟아오른 참이었다.
“왜 이제 와! 한참 기다렸잖아.”
투정부리며 말하는 소녀는 바로 세피아였다.
쾌활한 미소가 꽤 귀여웠지만 티르는 짐짓 무관심한 듯 물었다.
“여태 거기 그러고 있었냐?”
“응.”
티르는 작게 한숨을 쉬곤 머리칼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 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뭐, 심심하기도 하고.”
“카론이나 제론이랑 놀아. 오빠가 둘이나 있으면서 뭣하러 산까지 와.”
“오빠들은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아버진 나만 보면 그냥 집에만 있으라고 하고……. 나랑 놀아 주는 건 역시 티르밖에 없으니까.”
“나도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
티르가 소리쳤지만 세피아는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티르는 뭘 그런 소릴. 그보다 오늘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오늘 다람쥐 가죽 구해야 되는데, 왜?”
“푸줏간에 나카이안 잎이 거의 떨어졌던데 챙겨 놓으면 부모님이랑 오빠들한테 점수 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도와줄 거지? 응?”
세피아가 바짝 붙으며 살갑게 물었지만 티르는 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잘랐다.
“안 돼.”
“윽, 왜 안 되는데?”
“오늘 바쁘다 그랬잖아. 그리고 점수 따려는 목적이라면 스스로 해야지.”
“아이, 티르. 그러지 말고 좀 도와달라니까. 응?”
“…….”
세피아가 팔을 붙잡고 보챘지만 티르는 말없이 계속 걸을 뿐이었다.
* * *
다람쥐는 날래고 경계심 많은 동물이지만 운이 따라 준 건지 티르는 하루 만에 다람쥐 가죽 두 장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며칠 전에 설치해 둔 덫에 다람쥐가 걸려 있었던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산에 오른 지 고작 한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을 때 여우 한 마리를 사냥했는데 그 입에 다람쥐가 물려 있던 것이었다.
활시위를 당겼고 명중이었다. 덕분에 여우와 다람쥐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살다 보니 나도 이런 날이 있네.”
티르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여우와 다람쥐를 삼태기 안에 챙겼다.
“이만 내려갈까.”
사냥꾼 사이엔 큰 건수를 올렸음에도 욕심을 부리면 횡액을 당한다는 미신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나카이안 잎 때문이었다.
면전에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잘랐지만 내심 신경 쓰고 있던 것이다.
“아무튼 귀찮게 한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티르는 나카이안 잎이 자라는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꽤 돌아서 가야 하는 길이었음에도.
그러고 보면 가르케 마을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메링거랑 자식들은 왜 그렇게 세피아를 싫어하는 거야. 어차피 자식이고 동생 아냐.’
아버지가 죽은 뒤 혼자가 된 티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미워도 결국엔 그리워지는 게 가족인데…….
“아무튼 세피아 녀석 운도 왜 그렇게 없는 건지. 뭐, 남 말할 처진 아니지만.”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천막에 이르러 있었다. 티르는 인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인기척이 무색하게 천막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