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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2화)
제1화. 어느 푸른 날에(상) (2)
여느 때 같으면 세피아가 천막에서 놀고 있을 시간인데. 어디 숨었나 싶어도 좁은 천막 안에서 그런 데가 있을 리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갔나? 모처럼 나카이안 잎 따 가지고 왔더니만.”
티르는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천막은 산 중턱에 있어서 가르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차피 다람쥐 가죽을 전해 주려면 마을에 내려가야 했으니까.’
속으로 생각하며 오솔길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그때 뒤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갯짓 소리!
티르는 화살로 손을 가져가며 뒤로 돌아섰다.
까악까악―
그러나 새는 이미 나뭇가지를 박차고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어차피 시위를 당겨 봤자 닿지 않을 거리였기에 티르는 화살을 거두었다.
발걸음을 다시 오솔길로 돌리는데……. 검은 새의 울음소리가 뇌리에 남는 것은 왜인지.
* * *
마을에 내려오자 티르는 먼저 그래인의 피혁 상점을 향했다. 그래인은 개 먹이를 주다가 티르가 들어서자 문간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래인이 흠칫하는 느낌이었지만 티르는 개의치 않고 다람쥐 가죽부터 꺼냈다.
“여기 다람쥐 가죽 두 개요.”
“음, 그래? 질은 확실히 괜찮군.”
“돈은요?”
그래인은 허리를 수그렸다 일어나더니 티르에게 조그만 주머니를 건넸다.
“가죽 한 장당 은화 두 개. 거기에 일찍 가져다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은화 두 개 더해서 총 은화 여섯 개다. 그런데…….”
그래인은 티르의 안색을 힐끔 쳐다보더니 낮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사실 들어올 때부터 그래인 영감의 이상한 낌새는 눈치챈 티르였다. 하지만 영감 개인적인 문제려니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티르는 그래인을 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들어올 때부터 좀 이상하더니만.”
티르가 묻자 그제야 그래인은 낮게 한숨을 쉬곤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냐?”
“뭐가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자 그래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허탈해하며 웃었다.
“그래, 네 녀석이 그걸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죽이나 팔고 돈 챙기는 놈이 아니지.”
“그걸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예요? 마을에 무슨 일 있어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란 직감에 티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록 산에서 천막을 치고 살긴 하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이 가르케 마을이고 더군다나 세피아가 사는 마을이었다. 뭔가 일이 있다면 티르로서도 무관심할 순 없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가 남도 아니고 마을에 온 지도 7년이 넘었다고요.”
재차 추궁하자 그제야 그래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을 문제는 아니다.”
“그러면요?”
“세피아가 팔려 갔다.”
“예?”
티르를 마주 보고 말하긴 미안했던지 그래인은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오전에 마차가 왔었는데 그게 아가씨들을 사는 마차였던 모양이다. 웬 노인네가 메링거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세피아를…….”
“무슨 말이에요?! 세피아는 오전엔 내내 천막에 있었다고요. 팔려 갔을 리 없잖아요?”
“카론이 데리고 오더라. 그리고 마차에 태워서 바로 가 버렸다.”
“말도 안 돼. 그런 이야기 전혀 못 들었다고요!”
“티르야.”
그래인이 나직이 불렀지만 티르의 가슴에 붙은 불을 진정시키기엔 너무나 미력했다.
“젠장, 메링거, 카론. 이 개자식들!”
티르가 이를 으드득 갈더니 그대로 피혁 상점을 뛰쳐나갔다.
“티르야!”
그래인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티르는 이미 문을 박차고 나간 후였다.
피혁 상점에서 나오자 티르는 거리를 내달렸다. 달음박질이 멈춘 곳은 푸줏간 앞이었다.
티르는 단도를 뽑아 들며 푸줏간 문을 박찼다.
“메링거!”
살기가 깃든 고함.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메링거는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날이 선 단도를 보자 메링거는 반사적으로 작업대 위의 식칼에 손을 가져갔지만 티르가 식칼을 쳐 낸 것이 한발 빨랐다.
치잉―
식칼이 벽에 부딪쳤다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티르의 살기 어린 눈빛뿐.
메링거는 잔뜩 겁에 질려서 한 걸음 물러섰다.
“티, 티르. 갑자기 왜 이러는…… 으악!”
하나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티르가 단도가 은빛을 번뜩였다.
타앙―!
메링거가 기겁을 하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지만 단도가 내리친 건 메링거의 머리가 아니라 작업대에 놓여 있는 주머니였다.
천이 잘리자 뒤늦게 주머니 모양이 흐트러지면서 내용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휘황한 금빛.
내용물은 꽤 많은 양의 금화였다.
이 많은 금화가 무엇의 대가인지 짐작한 건지 티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겨우 이딴 금 쪼가리들이 탐나서 딸을 판 겁니까?”
결국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조차 풀린 건지 티르가 메링거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작업대 위로 메링거의 육중한 몸이 끌려 나오자 티르는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소리쳤다.
“제가 사냥했던 짐승들도 제 자식은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하는 짓은 딸을 파는, 고작 이런 겁니까?!”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퍽―!
메링거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다시금 몇 번이나 주먹이 메링거의 머리통을 갈겼고 이내 메링거의 입술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링거는 저항하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고만 있었다.
“무슨 변명이라도 좀 해 보십시오. 당신 딸자식을 판 이유를요!”
티르가 주먹질을 멈추고 소리쳤다.
그런데 의외로 잠시 침묵 후.
“나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처박은 채 중얼거리더니 이내 메링거가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나도 이딴 금화 따위에 세피아를 팔기 싫었다고! 어차피 놈들이 다시 올 거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더러운 기분일 줄은 몰랐단 말이다. 그래서 정을 안 들이려고 그랬었는데, 흐으, 젠장.”
그러나 소리치면서 시작했던 말은 점점 흐려지더니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소리만 남았다.
메링거의 흐느끼는 소리에 티르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메링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온통 묻은 핏물이 섞였지만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그것이 눈물이란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메링거…….”
“흐으으, 젠장.”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이미 세피아는 팔려 가고 없다. 대신에 한 줌의 금화만 여기 남은 것을.
티르는 어금니를 깨물고 금화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메링거를 쳐다봤다.
“그래서 그렇게 슬퍼서 넋 놓고 멍하게 있으면서 울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싫었으면 세피아를 지켰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젠장, 넌 몰라! 그 자식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자식들은 괴물이다.”
“괴물이건 뭐건 정말로 지키고 싶었으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켰어야죠. 변명만 늘어놓고 있으면 겁쟁이란 증거일 뿐입니다!”
“내겐 세피아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도 있단 말이다. 노라나 카론, 제론을…….”
“변명하지 마세요. 세피아는 제가 찾아올 겁니다. 금화 돌려주고 제가 되찾아 올 겁니다.”
티르는 나카이안 잎을 작업대 위에 다 털어놓고는 삼태기에 금화를 쓸어 담았다. 그리곤 푸줏간에서 나가려다 문간에서 멈춰 섰다.
“그 나카이안 잎은 세파아가 부탁했던 겁니다. 당신에게 잘 보이겠다고.”
한마디를 남기곤 푸줏간을 나가 버렸다. 문만 힘없이 앞뒤로 흔들거릴 뿐.
“…….”
메링거는 나카이안 잎을 내려다보다가 거기에 고개를 처박았다.
커다란 등의 들썩거림.
소리 없는 울음만이 좁은 푸줏간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제2화. 어느 푸른 날에(하) (1)
마차를 뒤쫓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마차가 다닐 만한 큰길은 어차피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냥꾼인 티르에게 바퀴 자국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해서 반나절쯤 지나서 도착한 곳은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인 고르고스였다. 자경단원이나 상인들에게 물어서 마차의 행방을 추적해 마침내 티르는 한 여관 앞에 서게 되었다.
고르고스의 밤
대문 위에 붙은 간판은 크고 묵직하고 4층에 이르는 외형이 네모반듯해서 견고한 느낌이었다. 티르는 잠시 동안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문을 밀어젖혔다.
뗑그렁― 뗑그렁―
문에 매달린 조그만 종이 두어 번 울리자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행자님. 혼자세요? 식사만 하실 건가요, 아니면 방도 빌리실 건가요?”
“혼자입니다. 일단은 식사만 하고 방은 좀 있다가 결정하겠습니다.”
“네에, 이쪽으로 오세요.”
티르는 웨이트리스를 따라 1층 식당의 안쪽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뭐가요?”
입으로는 반문하지만 탁자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이는 걸 보면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만 암묵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티르는 은화 한 닢을 웨이트리스의 손가락 끝으로 밀어 주곤 다시 물었다.
“혹시 젊은 아가씨 네다섯 명 정도 태우고 다니는 마차 봤어요?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찬데 한 마리는 얼룩이 있는 검은 말이고 나머지 세 마리는 갈색 말이었을 텐데.”
“아하! 그 마차라면 여행자님이 오기 세 시간 전에 와서 저희 여관에 머무르고 있죠. 그럼 메뉴는 뭐로 하시겠어요?”
“몇 번 방에 묵고 있죠?”
티르는 급한 마음에 물었다.
하지만 웨이트리스는 대답은 않고 메뉴판 마지막 줄의 메뉴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여기 이 메뉴를 주문하면 기억날지도 모르겠는데.”
제일 비싼 메뉴였다.
“알았으니까, 마차 주인이 몇 번 방에 묵고 있는지나 가르쳐 줘요.”
“3층 오른쪽 복도 끝에 마차 주인과 마부가 묵고 그 바로 옆방에 아가씨들이 묵고 있어요. 자, 그럼 주문은 고르고스 새끼 양 구이하고 에페른 포도주로 드리면 되는 거죠?”
웨이트리스는 눈을 찡긋 하곤 주방으로 갔다.
티르는 웨이트리스의 태도가 짜증 났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겨우 세피아를 데려간 놈들을 따라잡았고 이제 집중할 일은 세피아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단 세피아를 빼돌린 다음에 마차 주인을 만나서 금화를 돌려주면서 협상하는 게 낫겠지. 필요하다면 협박을 해서라도.’
어차피 그들에겐 세피아가 아니라 소녀가 필요한 것일 테니 금화만 돌려주면 무난히 해결되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들은 금화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소녀를 다시 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