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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3화)
제2화. 어느 푸른 날에(하) (2)
“미친 세상. 돈만 주면 사람도 살 수 있다니. 그깟 금화가.”
낮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건지 티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금화?”
인륜적으론 사람을 돈 주고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소녀를 사는데 금화를 한 주머니나 줄 필요가 있나?
아직 세상 물정에 대해 잘 모르는 티르였지만 적어도 시골 처녀 몸값이 금화 한 주머니 가치엔 결코 못 미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러나 티르의 고민은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양고기 구이 나왔습니다.”
“에페른 포도주도 대령입니다.”
웨이트리스 둘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온 것이었다.
꾸르르으윽―
세피아 생각에 잊고 있었는데 푸짐한 음식을 보자 허기진 배가 아우성이었다.
‘그래, 일단 세피아부터 구하고 보자. 중요한 건 세피아 구하는 거니까. 금화건 은화건 녀석들에게 돌려주면 그만이고.’
의구심을 일축해 버리곤 숟가락과 포크를 들었다.
지금은 세피아를 구하기 위한 일전에 앞서 체력과 영양분을 보충할 때였다.
* * *
여관, 고르고스의 밤. 3층 복도 끝의 방은 점심나절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방 안에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두루마리를 펼쳐 보고 있는 왜소한 늙은이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청년이었다.
“흐으음.”
늙은이는 턱 끝에 길게 뻗은 수염을 배배 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하게 됐어. 고르고스만 빼고 다 돌았는데도 살아 있는 녀석은 고작 넷이라니.”
늙은이는 난감한 듯 중얼거리며 두루마리를 내던졌다. 두루마리엔 열을 맞춰서 뭔가 빽빽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동그라미도 있긴 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늙은이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렀다.
“딜크!”
덩치 큰 청년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딜크!”
그러나 지능이 좀 떨어지는지 한참 뒤에야 눈을 끔뻑거리며 반응했다.
“네?”
“애들한테 약은 제대로 먹였겠지?”
“물론이죠, 헤헤. 딜크가 점심 때 음식에 뿌렸거든요. 지금 다 자고 있어요.”
늙은이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점심 먹고 뻗었으면 쉴 만큼은 쉬었군. 나갔다 올 테니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둬. 이번에 출발하면 탑까지 바로 간다.”
“에에, 벌써 돌아가는 건가요? 딜크는 바깥이 더 좋은데.”
딜크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노인은 대뜸 지팡이를 들어 딜크의 어깨를 후리며 소리쳤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채비나 해! 가기 직전까진 쓸데없이 애들 깨우지 말고. 알았냐?”
“네에.”
딜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갔다.
늙은이는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딜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
* * *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티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차 주인이 방을 비우면 바로 알려 준다는 조건으로 방을 빌리고 있는 티르였다. 그 웨이트리스가 아니면 달리 노크할 사람은 없다.
“저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웨이트리스의 목소리였다. 티르는 문을 열자마자 물었다.
“나갔습니까?”
“잠시 실례할게요.”
티르가 막기도 전에 웨이트리스는 요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건 또 뭔 상황인가 싶어 티르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웨이트리스는 방문을 닫자마자 오히려 티르를 책하며 말했다.
“그렇게 문 열자마자 대뜸 물어보면 어떻게요. 복도에 다른 사람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일하는 거 엄연히 불법이라고요.”
“알았으니까 나갔습니까?”
티르가 재차 묻자 웨이트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요. 하지만 주인은 멀리 간 것 같은데 마부는 근처에 있어요.”
“근처라면 어느 정도를?”
“마구간요.”
마구간 정도면 세피아를 데리고 나오는데 충분한 거리였다. 티르가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웨이트리스가 앞을 막아섰다.
웨이트리스는 미소 지으며 열쇠가 가득 달린 열쇠고리를 흔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한데 티르가 손을 뻗자 웨이트리스는 열쇠를 슬쩍 뒤로 빼면서 다른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그냥 주는 건 아니죠. 한 번 사용하는데 은화 두 닢이에요.”
“…….”
돈에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중요한 건 세피아였다. 돈 때문에 실랑이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티르는 웨이트리스에게 은화 두 개를 던져 주곤 곧장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서 두 번째 방.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열쇠를 꽂아서 옆으로 돌렸다.
철컥!
잠금 장치가 풀리기 무섭게 티르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침대와 방바닥에 각각 두 명의 소녀가 배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 있었다.
네 명 중에 세피아를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티르는 침대에 누워 있는 세피아에게 다가가서 살살 흔들었다.
“세피아, 세피아!”
그러나 세피아는 반응이 없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마 약을 먹였을 거예요. 찬물을 끼얹던가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날 걸요.”
티르가 뒤돌아보자 웨이트리스는 어서 나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오래 있을 시간 없어요. 그 마차 주인 영감탱이나 마부가 아니라도 다른 손님들도 있다고요. 구하려는 아가씨만 업고 나와요.”
웨이트리스의 말에 티르는 세피아를 업고는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방문을 도로 잠그자 웨이트리스가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하며 앞서 걸었다.
웨이트리스는 기역 자로 구부러지는 모퉁이를 돌더니 반대편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휭 불어 나왔다.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이건 또 은화 몇 닢이나 줘야 되는 겁니까?”
티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뜻밖에 웨이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애프터서비스에요. 사랑하는 아가씨를 구했으니 돌아가서 잘살라는 선물이요.”
의외라는 듯 쳐다보자 웨이트리스는 약간 새치름하게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돈을 받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도와준 게 어딘데. 보아하니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처지에도 좋아하는 아가씨 구하겠다고 나선 모습이 뭐랄까…….”
굳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웨이트리스가 호의에서 자신을 도와줬단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시시콜콜하게 그런 이야기를 다 들어 줄 시간은 없었다. 티르는 간단하게 목례를 하곤 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가씨 데리고 잘살아요. 고생시키지 말고.”
웨이트리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티르는 최대한 빨리 걸음을 옮겼다.
문으로 나오자마자 티르는 일단 으슥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세피아를 업은 채 도망가는 건 무리였다. 체력보다도 주변 눈이 문제였다.
티르는 골목의 벽에 세피아를 앉혀 놓고는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세피아.”
부르면서 계속 흔들었지만 세피아는 고개만 덜렁거릴 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들이 먹인 약이 잘못된 게 아닐까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그런 걱정은 단번에 날아갔다.
“음냐.”
흔들던 손을 떼자 티르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곤 잠꼬대로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닭다리 찌임.”
어눌한 발음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
할 말이 없었다.
남은 기껏 걱정하고 있는데 잠꼬대로 닭다리 찜이나 찾고 있다니.
티르의 이마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으음, 닭…….”
“일어나라, 세피아.”
아까와 달리 나지막한 소리로 부르며 세피아를 밀쳐 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퍽! 소리가 나게 벽을 들이받았다.
“꺅! 아야야.”
소리는 좀 요란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벽에 부딪친 뒤통수를 감싸며 끙끙거리긴 해도 확실히 정신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세피아는 뒤통수의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자신이 웬 뒷골목에 나앉아 있단 걸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티르?”
두리번거린 후에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티르와 눈이 마주쳤다.
“팔려 간 녀석이 참 속도 편하다. 졸면서 닭다리 찜이나 찾고 있…….”
“흐아앙, 티르으으―!”
말하는 중 갑자기 세피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양팔로 목을 꼭 끌어안고는 얼굴을 파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미미한 떨림만이 감촉으로 전해져 왔다.
티르는 난처한 표정으로 세피아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정쩡하게 들었던 손으로 세피아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게 바보같이 메링거가 판다고 그대로 팔려 가냐. 그렇게 싫었으면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아무튼 하는 짓 하곤.”
“흐으으응, 티르…….”
어깨가 눈물, 콧물에 젖어 축축해졌을 쯤에야 세피아는 콧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었어, 티르. 얼마나 무서웠는데.”
“무서웠단 녀석이 잠꼬대냐?”
“잠꼬대?”
눈물을 닦아 내면서 반문하는 세피아였다.
아마 꿈에 대한 기억은 없는 모양이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데 어쩌겠는가.
티르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 여관 바로 옆이니까 빨리 벗어나야 해.”
티르는 세피아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가다 급히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턴 대로로 나가야 했다. 바깥을 살피는 동안 세피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영감이 우리 쫓아오고 있는 거야?”
“그 영감?”
“응. 나 데리고 간 사람. 쪼글쪼글하고 허리 구부러지고 성격은 막 고약하고.”
티르는 대로로 나가며 쓰게 웃었다.
“그딴 일하는 녀석들 성격이야 빤하지.”
“그딴 일? 무슨 일?”
티르는 흠칫 멈추며 세피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세피아는 정말 모르고 물어본 눈치였다.
“됐어. 그런 게 있어. 일단 지금은…….”
설명하기 난감했던지 티르가 대충 얼버무리곤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세피아를 잡아끌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때 세피아가 등 뒤로 바짝 붙으며 소곤거렸다.
“그 영감이야.”
“그 영감?”
물어본 직후에야 세피아를 사 간 작자를 가리킨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디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늙수그레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염소수염의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