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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4화)
제2화. 어느 푸른 날에(하) (3)


세피아가 옷자락을 잡으며 바짝 붙자 떨고 있는 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티르는 노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세피아에게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한 번은 만났어야 했으니까, 금화도 돌려줘야 하고. 내가 이야기해서…….”
“앞에!”
말하는 도중 세피아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기척에 민감한 감각을 지닌 자들이 사냥꾼이다. 티르는 세피아를 밀치는 한편 허리를 숙였다.
후웅!
바람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 위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다짜고짜 노인이 휘두른 지팡이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이 도둑놈아! 감히 어디서!”
“노인장, 잠깐만!”
티르가 말을 붙여 보려고 했지만 염소수염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왜소한 체구와 자글자글한 주름이 무색하게 지팡이를 무지막지하게도 휘둘러 댔다.
후웅! 후웅!
두어 번 간신히 피한 티르였지만 지팡이 공격이 세 번, 네 번 계속되자 더 이상 피하기만 하는 것도 무리였다. 무엇보다 대화를 하려면 어떻게든 이 노인을 제압해야만 했다.
티르는 지팡이를 피하다가 빈틈이 보이자 바로 달려들어 노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진정하라고요!”
지척인 데서 있는 대로 지른 고함이니 귀가 꽤나 멍멍할 터였다. 한데 뜻밖에도 노인은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어깨를 잡은 티르의 손목 붙들더니 옆으로 뿌리쳤다.
의외로 노인의 힘이 정말 세서 티르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그 상태에서 노인의 지팡이가 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위험하다!’
등골이 섬뜩하며 본능이 경고해 왔다. 자칫하면 세피아를 구하기는커녕 여기서 병신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안 돼!’
티르는 벌떡 일어나며 노인의 옷소매를 당겼다. 천만다행으로 노인이 비틀거리며 지팡이가 얼굴을 빗겨 갔다. 그 찰나에 티르는 옷소매를 더욱 힘껏 움켜쥐며 노인을 건물 쪽으로 내던졌다.
“흐아앗!”
퍽!
하지만 날아간 자리가 안 좋았다.
건물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튕겨 나 널브러졌는데 노인이 머리를 처박은 곳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허억, 허억.”
“티르, 괜찮아?”
“난 괜찮은데 문제는…….”
티르가 눈짓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진 노인을 가리켰다. 머리맡에 고이기 시작한 핏물이 어느새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하필 모서리에 부딪치다니.”
“주, 죽은 거야?”
“아마도.”
세피아는 뭐라고 하고는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을 벌린 채 뻐끔거리기만 했다.
티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노인의 시체를 보다가 세피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일단 벗어나야 해.”
“으응.”
흐르는 회색 구름이 달빛이 가려진 어둠을 틈타 티르와 세피아는 도시 밖으로 달렸다.

* * *

회색 구름이 흘러가고 약간 도톰한 그믐달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고르고스 여관 거리의 어느 건물 모퉁이 아래.
“…….”
검은 핏물이 가득 고인 한가운데서 핏발이 선 부릅뜬 눈이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핏발이 선 건 흰자위이고 검은자위는 이미 흐리멍덩한 것이 이미 산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착각이었을까.
검은자위의 테두리가 서서히 초점을 찾아가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핏물이 그리는 경계가 점점 줄어들었다. 얼마 후엔 검은 핏물이 완전히 사라져 노인이 쓰러져 있는 바닥엔 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제…… 엔 자앙……. 이…… 죽일 놈…….”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인이 쉰 목소리로 입을 뻐끔거렸다.
손으로 땅바닥을 더듬어 근처에 떨어져 있는 지팡이를 잡더니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감히 계집을 훔쳐 가는 것도 모자라서 나를 죽여? 이 쳐 죽일…….”
지팡이를 잡고 있는 뼈가 앙상한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관자놀이엔 흰자위의 충혈이 퍼져 나간 것처럼 핏줄이 섰다.
“딜크, 멍청이 같은 놈…….”
노인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쳐들더니 밤조차 깨 버릴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딜크으으으으으!”

* * *

나뭇잎에 가려 달빛조차 들지 않았다.
티르는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쳐 내고 다른 손으론 세피아를 끌며 산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티르, 나뭇가지 때문에 따가워. 길로 가면 안 돼? 더 빠르잖아.”
“이쪽으로 가야 안전해. 그리고 여기도 길이야.”
산에 익숙한 티르 역시 숨이 차는지 짧게 대답하면서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사실상 티르가 끌어 주고 있긴 하지만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든지 세피아는 가쁘게 숨을 내쉬더니 결국 다리를 접질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아!”
“괜찮아?”
“발목이 퉁퉁 부었어.”
세피아가 주저앉은 채 말했다.
티르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세피아의 발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 말없이 발목을 살피던 티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부었네. 이래선…….”
“미안, 티르. 나 때문에.”
“멍청아, 미안한 건 나야. 이 지경이 된 것도 모르고 끌고 다녔는데.”
“하지만 티르는 날 구하러 일부러 와 줬는걸. 그런데도 나 때문에…….”
세피아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티르는 그런 세피아를 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뒤로 돌아섰다.
“업혀.”
“응?”
“일단 업혀. 여기 오래 있으면 산짐승이 온다. 일단 몸 숨길 만한 곳까진 가야지.”
“하지만 티르도 힘들잖아.”
세피아가 주저하자 티르는 고개를 돌려 세피아를 보며 말했다.
“나도 힘드니까 멀리까진 갈 생각 없어. 산비탈도 거의 끝나는 곳까지 왔으니까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몸 숨길 만한 덴 있을 거야. 업히기나 해.”
“미안해, 티르.”
세피아가 목에 팔을 감고 업히자 티르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더니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구부렸던 다리를 펴며 일어섰다.
그러나 지친 탓인지 휘청거리며 산비탈 아래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근처에 있던 나무를 잡은 덕분에 굴러떨어지는 신세는 면했지만 묵직한 무게감은 여전했다.
세피아도 그런 느낌을 눈치챈 건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무거워?”
“살 좀 빼.”
“너무해.”
세피아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타고난 성격이 활달해선지 얼마 가지 않아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티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티르가 업어 주니까 예전 생각난다. 처음에 내가 티르 천막에 갔을 때도 내가 다리 삐어서 티르가 업어 줬었잖아, 그치?”
“힘드니까 일일이 대답 못해. 듣고 있으니까 그냥 계속 말해.”
“응. 사실 그때 나 가출했었거든. 그래서 막 돌아다니다가 길은 잃고 뱀한테 물리고…… 진짜 무서웠는데 티르가 나타나서 정말 기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산비탈을 내려가는 티르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걸렸다.
이야기를 들으니 어렴풋이 그때가 생각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5년 전에 세피아를 업었을 땐 정말 감당이 안 되는 무게였다.
하기야 열두어 살짜리 소년이 또래 소녀를 업고 산을 내려갔으니 오히려 기적에 가까웠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는 티르였다.
‘쳇, 그땐 용케도 해냈었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추억.
덕분에 잠시나마 힘든 것도 잊고 산을 내려가는데 그때 세피아가 나직이 티르를 불렀다.
“티르.”
“왜?”
“고마워.”
“뭐냐? 뜬금없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평소처럼 활달한 세피아의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헤헤, 그냥 갑자기 하고 싶어서.”
“실없는 녀석.”
그러나 실없고 재미없는 대화로 치부하면서도 왜인지 티르는 이 순간이 싫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아니, 차라리 영원히 계속됐으면.

산기슭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까지 와서야 티르는 세피아를 내려 주고 털썩 주저앉았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다가 품속을 뒤적거려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뭐야?”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세피아가 묻자 티르는 대답 대신 주머니를 풀어서 보여 주었다.
주머니 안에서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 금! 티르, 이거 진짜야?”
“아마도.”
티르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세피아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금화 하나를 꺼내더니 이로 깨물어 보고 있었다.
티르는 그런 세피아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팔고 나서 메링거가 받은 금화야. 원래는 돌려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됐네. 영감탱이, 그렇게 죽을 줄이야.”
금화를 들고 좋아하던 세피아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그런 세피아를 의식한 건지 티르는 부담감을 털어 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은 녀석한텐 필요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잘된 거지. 사람을 죽였으니까 여기서 사는 건 무리고 다른 곳에 가서 이 금화로 살면 되겠는데 혹시…… 같이 갈래?”
“응?”
티르는 쑥스러웠는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니, 뭐. 너도 원래는 팔려 간 처지인데 내가 무작정 데리고 나온 거니까 따지고 보면 도망치는 신세고 가르케 마을로 돌아가는 건 무리니까…….”
“따라가도 괜찮아?”
이번엔 티르가 의외였는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세피아를 쳐다봤다.
“티르 말대로 가르케 마을로 돌아가면 아버지나 카론이 곤란해질 테니까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 어디 갈 데도 없으니까.”
티르는 멍한 표정으로 세피아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귀찮겠지만 나 아니면…….”
“갈 데가 없기는!”
그러나 티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친 고함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티르는 단도를 꺼내 들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기슭 쪽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는 조그만 그림자가 보였다.
“웃기는 놈. 데려가긴 어딜 데려가? 저 아인 갈 데가 따로 있다.”
쉰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모습이 점차로 드러났다. 거리가 좁혀지며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자 티르의 표정이 경악의 빛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