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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5화)
제2화. 어느 푸른 날에(하) (4)


“죽은 거 아니었나?”
“너 같은 애송이한테 죽을까 보냐!”
노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티르와 세피아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머리에서 피를 그렇게 쏟았는데. 게다가 여기까진 어떻게?’
티르는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단도를 더욱 꽉 쥐었다.
죽었던 노인이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이 정도면 단순히 깡다구 좋은 노인으로 치부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 노인에겐 뭔가 있다. 야수보다 더 위험하다. 사냥꾼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 드리운 음흉한 미소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졌다.
“세피아, 도망쳐라. 지금 바로.”
“응?”
“도망치라고!”
긴장이 역력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렇지만 정작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못 알아듣고 염소수염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지랄을 떤다.”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점점 다가왔다.
거리는 채 네 발자국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반격할 준비를 하는데 뜻밖에 노인은 티르를 그냥 지나쳐 세피아에게로 갔다.
티르는 노인의 팔을 잡아채려 했지만 노인은 여전히 세피아를 향해 가며 소리쳤다.
“딜크! 뭐하냐? 이 멍청한 놈아!”
‘딜크? 무슨?’
딜크라니?
뜬금없는 외침이지만 당황할 틈도 없었다. 돌연 옆에서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든 것이다.
후웅―
이어서 묵직한 바람 소리!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커먼 것이 날아들었다.
정체를 분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시야가 사라지더니 무지막지한 위력이 턱에 작렬했다.
“커헉!”
퍽!
십여 브람(1브람=1미터)은 떨어진 곳에 있던 나무에 부딪쳐 널브러졌다.
‘젠장, 대체 뭐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지만 티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게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시야 한가운데 노인이 세피아를 부축하고 있는 게 보였다. 세피아는 정신을 잃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세피아…….”
하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노인의 옆에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땅을 박차더니 이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젠장.’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 브람에 이르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오는 돌진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시야가 옆으로 틀어졌다.
퍼억―!
티르는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가 몇 바퀴 구른 후에야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젠장, 세피아를.’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있는 시야마저 위아래가 검은색으로 덮여 가기 시작했다.
‘지켜야 하는…… 데…….’
그것이 마지막 생각이었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의식을 잃었다.



제3화. 감옥 (1)


덜컹!
공간이 튀어 올랐다.
등을 부딪친 충격에 티르는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떴음에도 시야는 여전히 어둠뿐.
‘여긴?’
팔이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도 뭔가에 묶여 있는지 단단한 죄임이 느껴진다. 거기다 온몸을 쑤시는 고통까지.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티르는 우선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왜 자신이 여기 처박혀 있는 거지?
집중하자 어렴풋이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세피아를 부축하고 있는 노인. 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덩치. 무너지는 시야.
‘젠장, 그 망할 영감탱이 마차인가.’
세피아를 구하기는커녕 자신까지 마차에 실려 가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이대로 갈 순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몸을 비틀어 댄 덕분에 밧줄이 조금씩 헐렁해졌지만 그때 바깥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히이이잉!
갑자기 마차가 정지하자 몸이 앞으로 굴러가 짐짝 사이에 처박혔다.
“크흑!”
안 그래도 여기저기 쑤셨는데 처박히면서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통증 따위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마차가 정지했단 건 도착지에 이르렀단 말이었다.
어서 밧줄을 풀어야 했다.
‘젠장, 망할 놈의 밧줄. 좀 풀리라고!’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지만 여태 안 풀리던 밧줄이 단번에 풀어질 리가 없었다.
밧줄이 느슨해지기도 전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짐칸의 문이 위로 열렸다.
빛이 쏟아진다.
“윽!”
어두운 곳에 너무 오래 있은 탓인지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옮겨!”
외침에 이어 여럿이 짐을 옮기는 기척이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뜰 수 있게 됐을 쯤 두어 명의 덩치가 양팔을 붙잡고 짐칸에서 끌어내렸다.
티르는 마차에서 끌려 나오며 아직은 잘 보이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회색 담장이 넓은 공간을 가두고 있고 그 너머로 무성한 녹음이 보였다.
‘숲?’
틀림없이 숲이었다. 이 정도 녹음은 깊은 숲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
‘사창가로 가는 마차가 아니었나? 어째서?’
티르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발에 쇠고랑을 차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 그들을 감시하는 검은 로브들. 그리고 2, 3층 높이의 회색빛 우중충한 건물이 몇 동.
대체 뭘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은 사창가가 아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쩌면 사창가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곳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설마 세파아도?!’
다급한 마음에 티르는 주변을 살폈다.
쇠고랑 찬 이들과 검은 로브의 모습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두 눈동자는 오로지 세피아를 찾기 위해서만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좌우로 검은 로브들의 감시를 받으며 동편의 건물로 향하는 네 명의 소녀. 그중 가장 뒤에 있는 소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주황색 머리카락은…….
“세피아!”
분명 세피아였다.
티르는 두 덩치를 떨쳐 내곤 세피아를 향해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을 뿐이지 실제론 무릎이 묶인 탓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티르!”
뒤늦게 세피아도 이쪽을 봤지만 검은 로브들에 의해 동편 건물로 붙잡혀 가고 있었다.
“세피아!”
멀어져 가는 세피아를 보며 티르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두 덩치가 어깨와 뒤통수를 억세게 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놔! 놓으라고!”
그렇게 흙바닥에 처박혀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냐, 이놈은?”
목소리에 깃든 위엄이나 말투로 보아선 꽤 높은 자인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중후한 목소리에 대답했다.
“이번에 데려온 아이와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험체로 쓸 만할 것 같아서 데려왔다고 합니다.”
“또 실험인가.”
중후한 목소리가 이죽거리더니 뭔가 신호를 보냈는지 두 덩치가 티르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티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목소리에 걸맞게 풍채가 좋은 노인이었다. 특히 풍성한 흰 수염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노인의 뒤에는 비서쯤 돼 보이는 정장 차림에 은발을 뒤로 묶은 여자가 있었다. 아까 노인에게 대답한 여자인 모양이었다.
티르는 노인을 보는 순간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노인과 협상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떼려는데 그 순간 노인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실험은 없다. 알아서 잘 처리해.”
“예.”
비서가 고개를 숙이자 노인은 미련조차 없이 곧바로 돌아서 버렸다.
당황스러운 건 티르였다.
처리라니?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비서의 손에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비수가 서서히 목을 향해 다가온다. 죽음이 한 뼘씩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죽는 건가?’
아니,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세피아를 구하기는커녕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는 게 말이 되는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티르는 고개를 쳐들고 은발 여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듯 그 너머로 검은 로브 노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세피아를 풀어 줘!”
하나 노인은 반응이 없었다.
티르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노인의 뒤에다 대고 온갖 협박을 하며 소리쳤다.
“당장 세피아를 풀어 줘! 안 풀어 주면 가죽을 벗긴 다음 각을 떠서 개먹이로 던져 주겠어!”
처음엔 무시로 일관하던 노인이었지만 죽이겠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멈춰 섰다. 얼굴에 띤 미소엔 가소롭다는 빛이 역력했다.
“웬만하면 곱게 보내 주려고 했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노인은 비서에게 손짓을 해서 물러나게 하고는 티르의 앞으로 다가왔다.
“Gnuch o‘gonoez!”
커다란 손바닥을 들어 티르의 머리통을 한 손에 움켜잡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파지지지지짓―!
그 순간 손바닥에서 검은 섬전이 일어나더니 티르를 집어삼켰다. 방금 전 읊조림은 단순한 중얼거림이 아니라 마법 주문이었던 것이다.
섬전은 워낙 거칠어서 티르를 붙잡고 있던 두 덩치조차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초 정도가 지나서야 섬전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던 티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노인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 돌아서려는 그때 뜻밖에 뭔가가 노인의 발목을 거세게 붙잡았다.
텁!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 노인의 발목을 붙잡은 건 바로 티르의 손이었다.
노인조차 당황하여 멍청히 서 있는 사이 티르는 노인의 로브 자락을 붙잡고 힘겹게 일어서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 전의 데미지가 적지 않았는지 티르의 눈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하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눈빛에 깃든 살기와 기백이었다.
“세, 피아…… 세피아를 풀어 줘.”
티르의 입술 사이로 힘겹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제야 티르의 기백에 질려 있던 노인은 정신을 차리곤 자신의 로브 자락을 붙잡고 있는 티르의 손을 쳐 내고 티르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퍽!
티르가 맥없이 뒤로 자빠지자 노인은 방금 전 한순간이나마 압도당했던 자신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던 건지 그대로 티르의 목을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