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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6화)
제3화. 감옥 (2)
우두둑―
“흥, 그래? 그걸 버텼단 말이지? 그럼 이것도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노인은 미치광이 같은 미소를 짓고는 손바닥을 들고 뭔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이 격앙되어 갈수록 손바닥 위로 모여든 섬전이 압축되는 것이 한눈에 봐도 심상찮아 보였다.
이대로 저 마법을 맞으면 즉사일 터. 그러나 티르는 저항은커녕 아까 전 마법을 맞은 데미지에 노인에게 목을 짓밟혀 숨이 막히는 바람에 널브러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마법이 완성되고 노인은 그대로 티르의 안면을 향해 마법을 날리려는 찰나, 그때 뒤에서 손 하나가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뭐라니? 칸엘이다.”
노인의 손을 붙잡은 사람은 흰 가운을 걸치고 부스스한 모습의 젊은 남자였다.
한데 의외인 것은 노인이 그를 보자 방금 전까지 안하무인이던 태도와 달리 급히 마법을 거두고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칸엘 님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칸엘이라 불린 젊은 남자는 노인의 사죄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곤 땅바닥에 쓰러진 티르의 상태를 살피더니 노인을 보며 이죽거렸다.
“이거 내 실험을 위해 가져온 거라던데. 내 물건에 손도 대고 넬하크 많이 컸네?”
칸엘의 말에 노인, 넬하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할 녀석이면 실험도 버티지 못할 테니 제가 미리 시험을 한 번 해 본 거였습니다.”
“호오, 그래? 그럼 시험은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데려가도 되겠지?”
“예, 물론입니다.”
넬하크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칸엘의 조수로 보이는 검은 로브는 티르를 들쳐 메서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로브와 티르의 모습이 저편의 건물로 사라지자 칸엘은 넬하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 * *
티르는 자꾸만 내려가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신이…… 어? 바, ……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정신이 흐리멍덩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앞에 있는 사람이 손바닥을 들어서 티르의 뺨을 때렸다.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커흑!”
손바닥 힘이 무지막지했다. 겨우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할 뻔했다.
“……서…… 정신을, 려어? ……구…….”
그러나 손바닥의 주인은 정작 자기 손바닥의 위력을 잘 모르는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왕복으로 티르의 뺨을 때려 댔다.
찰싹! 찰싹! 이 아니라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티르의 고개가 좌우로 번갈아 가며 젖혀졌다.
‘젠장, 죽일 생각인가.’
티르는 힘을 다해서 오른손을 들어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허억, 허억. 그, 그만!”
온몸에 기운이 없던 터라 고작 오른손을 드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미안하다, 친구. 딜크가 때린 데 많이 아파? 주인님이 시켜서…… 고르고스에선 그냥 살짝 기절시키려고만 했었는데.”
티르는 간신히 일어나 앉다가 고르고스란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고르고스? 기절?”
딜크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정말 미안. 딜크는 하기 싫었다. 하지만 주인님 명령은 어길…….”
“자, 잠깐만! 그러니까 고르고스에서 그 염소수염 영감탱이 옆에 있던 덩치가 너란 말이냐? 그때 바위 위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날 팬 게?”
“딜크, 미안하다.”
잠시 말이 없더니 딜크가 다시금 사과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개자식아! 너 때문에 세피아가!”
“미, 미안.”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딜크의 멱살을 붙잡고 반대편 벽까지 밀어붙였다.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론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
그러나 잠시 동안 딜크를 노려보더니 티르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주먹을 내려놓았다.
움켜쥐고 있던 딜크의 멱살도 풀어 주고 한쪽 벽으로 가서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딜크는 티르가 밀어붙인 벽에 여전히 붙어 있다가 티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티르는 녀석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됐다. 그만해라. 사과받아서 뭐하냐, 이미 이 지경인데.”
딜크는 티르의 옆에 무릎을 모으고 쪼그리고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티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딜크라고 했냐? 너 여기가 뭐하는 덴 줄 아냐?”
“응. 딜크 알고 있다.”
티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던 건지 딜크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 숲이다. 숲 한가운데. 주인님의 주인님들이 숲 가운데 집 만들었다. 주인님이랑 딜크랑 다른 사람들은 집 밑에 땅굴 파서 살고 있다.”
“주인님이라면 그 염소수염 영감탱이 말하는 거지? 그 영감탱이도 감옥에 있다고?”
“주인님은 우리 방 옆으로 하나, 둘, 셋, 네 번만큼 떨어진 방에 있다. 하지만 주인님은 주인님의 주인님들이랑 친해서 자주 나갔다 오는데 가끔 딜크 데리고 나갈 때도 있다.”
딜크가 계속 뭐라고 이야길 했지만 티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금 물었다.
“혹시 그 주인님의 주인님이란 녀석들이 검은 로브 입고 있는 녀석들?”
“응. 주인님의 주인님들은 항상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 그 옷 멋있다. 딜크도 입고 싶지만 딜크는 입으면 안 돼. 주인님의 주인님들은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 옷을 입는 거니까.”
‘마법?’
딜크의 말에 순간적으로 찌릿한 감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기절하기 전에 봤던 흰 수염의 노인은 분명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게 마법이었던 건가.’
태어나서 마법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번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결코 평범한 인간 따위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티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눌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따위 분풀이가 고작이었다. 세피아는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그 사실이 너무나 화가 났다.
“젠장.”
살기에 이글거리는 티르의 눈빛에 겁먹었는지 딜크가 움츠러들어선 조심스럽게 티르를 불렀다.
“친구…….”
그러나 티르의 눈에선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살기 어린 푸른색 눈동자는 야수의 안광보다 무섭게 번뜩거렸다.
* * *
특이한 느낌의 방이었다.
알코올 냄새가 잔뜩 풍기고 사방이 밀폐된 탓에 냄새는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말 특이한 것은 방의 가운데 있는 의자와 어떤 장치였다. 단언컨대 이런 특이한 의자는 누구도 본 적이 없을 터였다.
마치 침대를 의자처럼 만들어 놓은 것처럼 뒤로 젖힐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데 골격이 철제로 되어 있어서 매우 튼튼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의자를 내려다보는 천장에는 이것저것이 달려 있었다.
꽃잎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백색광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감긴 송곳’이나 ‘원반형 톱날’ 등 연장들이 거미 다리처럼 뻗어 나간 철 막대 끝에 달려 있어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이한 연장들이 내려다보는 곳엔 오크 한 마리가 의자에 눕혀져 있고 그 뒤편으로 방 한쪽엔 가운을 걸친 누군가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책상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다 찾았는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네모난 은쟁반을 들고 돌아서는데 가운을 입은 남자는 바로 칸엘이었다.
그리고 쟁반엔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게 생긴 쇠붙이 연장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지만 칸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오크의 옆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시작해 볼까.”
손에 착 달라붙는 흰 장갑을 끼더니 연장 하나를 집어 드는 칸엘.
한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에니스입니다. 아이들의 상태에 대해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에니스는 바로 넬하크의 비서인 은발 여자의 이름이었다. 칸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연장 가운데 가느다란 칼날을 집어 들며 말했다.
“들어와.”
철컥.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에니스가 서류철을 옆구리에 낀 채 들어왔다.
칸엘은 그런 에니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미 실험에 몰입하고 있었다.
마치 밑그림을 그리는 듯 가느다란 칼날로 오크의 몸통에 어떤 모양을 새기고 나서야 위에 달린 원반형 톱날을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해 봐, 보고.”
칸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에니스는 서류를 펼치더니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지금까지 탑으로 데려왔던 아이들 가운데 생존했었던 두 명, 레이와 앤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레이가…….”
지이이이잉―
푸확!
하나 그때 에니스가 말하는 도중에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나기가 내리는 듯 검붉은 피가 방 곳곳으로 뿌려졌다.
피는 바로 오크의 배에서 뿜어져 나왔다. 원반형 톱날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오크의 배를 파고들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칸엘은 밑그림을 따라 원반형 톱날을 움직이고 있었고 절개 부위가 확장될수록 피는 더욱 뿜어져 나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
에니스는 잠시 침묵했으나 이미 이런 일엔 익숙한 듯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를 이어 갔다.
“레이의 경우 사인은 작년부터 앓고 있었던 폐렴이었습니다. 7일 전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서 이틀 전 결국 사망했습니다. 앤의 경우는 아직 정확한 사인은 안 밝혀졌지만 부검 중이니 조만간 보고 드릴 내용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두 녀석 다 죽었구나. 레이 녀석 좀 귀여웠는데……. 새로 온 애들은?”
“총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이전부터 앓고 있던 병으로 어젯밤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셋 가운데 둘도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어서 조만간 사망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 기껏 처방해 줬더니만.”
그러나 불쌍하다는 듯 말하는 것과는 달리 손은 오크의 절개 부위에 넣고 마구 휘젓고 있었다. 검붉은 피가 흰 가운에 온통 튀었지만 칸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명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하나가 남았단 말인데?”
“예, 세피아라고 한 아이가 있습니다. 다른 세 명과 달리 생각보다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여태까지 저희 탑으로 데려온 아이들 중 그 아이보다 건강한 아이는 없었다고 보셔도 될 겁니다.”
“그래?”
오크의 뱃속을 휘젓던 손이 멈추었다. 칸엘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확하게 어느 정도 건강하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잔병 좀 앓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치열도 고르고 신체의 발육 상태 또한 훌륭합니다. 음식물의 섭취 또한 별도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가능한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