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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7화)
제3화. 감옥 (3)
에니스의 보고에 칸엘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대로 데려온 게 맞나? 여태까지 그 정도로 건강한 아이는 없었는데?”
“저도 의심이 가서 확인해 봤지만 그 세피아는 명단에 적힌 그 아이가 맞습니다.”
“희한한 일이군. 잔병을 알았다가 나았다면 면역력이 있단 말인데…….”
칸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피 묻은 장갑을 벗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에니스는 그런 칸엘을 잠시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칸엘이 새 장갑으로 갈아 끼는 한편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들어올 때의 상태는 상당히 건강했습니다만 요 며칠 간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는 터라 상당히 수척해졌습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아? 왜? 그 애한테 뭐 소홀히 한 거 있나?”
돌연 칸엘이 고개를 들더니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으로 에니스를 노려보았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지만 에니스는 여전히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들을 데려온 날 함께 잡아 왔던 티르라는 사내아이 때문인 듯합니다. 티르란 아이를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죽을 거라면서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티르라면 그때 마당에서 넬하크의 마법을 버텨 냈던 그 녀석 말이냐?”
“예.”
에니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칸엘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만나게 해 줘.”
“하지만 넬하크 님이…….”
에니스가 망설이며 대답을 망설이자 칸엘은 깜빡 잊었다는 듯 소탈하게 웃었다.
“아, 맞아. 여기 책임자는 넬하크였지. 나는 그냥 실험이나 하면서 애들 상태나 좀 보고 치료해 주려고 얹혀 있는 처지였고.”
방금 전의 소탈한 모습은 단지 가식이었는지 이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만약 넬하크가 뭐라고 하면 그 즉시 모가지 날아갈 거라고 전해.”
칸엘의 거친 말에 에니스는 잠시 말이 없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하며 답했다.
“칸엘 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세피아란 아이가 그놈 만나러 갈 땐 에니스 네가 직접 챙겨.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에니스가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돌아서려는데 그때 문득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칸엘이 급히 에니스를 불러 세웠다.
“아, 참! 그리고 조만간 독체에 대한 실험을 할 거니까 장비들을 준비해 두도록 하고.”
“준비는 해 두겠습니다만 마땅히 실험 대상으로 쓸 수 있는 자가?”
에니스가 묻자 칸엘은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실험 대상은 티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다.”
“그자 말입니까?”
“그래. 놈이라면 잘하면 버틸 수도 있을 거야. 몸 안을 깨끗이 비워 둬야 실험에 유리하니까 알아서 조치해 두도록 하고.”
“예.”
지시가 끝나자 에니스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 실험인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4화. 암굴에 흘러든 빛 (1)
감옥에서의 시간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가지 않았다. 아니, 시간을 인식한다는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해나 달을 볼 수 없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나마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척도라면 배고픔과 빵 수레가 지나가는 빈도 정도. 아까 전에 빵 수레가 지나갔으니 어렴풋이 점심나절이 조금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하아, 이제 겨우 하루 지난 건가.”
티르와 딜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꼬르르르륵.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티르가 고개를 돌리자 딜크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배고프냐?”
“헤헤, 딜크, 배 조금 고프긴 해.”
사실 빵 수레가 지나가긴 했지만 티르는 빵을 받지 못했다. 실험 때문에 속을 비워 둬야 한다며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빵을 받지 못했는데 친구가 빵을 못 먹으면 자신도 먹지 않겠다며 뜻밖에 딜크가 빵을 던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 딜크를 보자 티르는 어쩐지 조금 미안해져서 넌지시 물었다.
“빵 먹지 그랬냐?”
“티르 안 먹으면 딜크도 안 먹어.”
하지만 의외로 녀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덩치만 봐선 먹을 거에 목숨도 걸게 생긴 녀석이.
‘바보 같은 녀석.’
티르는 딜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건 시커먼 천장뿐이다. 하지만 티르의 눈엔 다른 것이 보였다.
‘세피아.’
뒷모습만 보이는 한 소녀가 쾌활한 동작으로 돌아선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주황빛 머릿결이 도는 방향을 따라 찰랑거리며 굽이친다.
티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리나 싶더니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세피아까지 실험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세피아?”
딜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티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자 이를 갈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때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티르의 귓바퀴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뭔가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하지만 빵 수레는 얼마 전에 지나갔고 달리 누가 올 일은 없을 텐데?
티르는 미심쩍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쇠창살 가까이에서 땅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렸다.
“왜, 왜 그래, 티르?”
“쉿! 조용해 봐.”
티르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곤 땅울림에 집중했다.
타박(타박, 타박).
타박(타박).
각기 다른 템포로 섞여서 들렸지만 둘 다 사람의 발소리였다.
‘발걸음 소리? 두 명. 하나는 소리는 크지만 보폭이나 걸음걸이가 많이 느리다. 하나는 소리는 작은 것 같은데……. 간격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거 보니 큰 쪽이 작은 쪽에게 맞춰 주는 건가?’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수상했다.
추측대로라면 두 번째 발걸음 소리는 아이나 여자 혹은 노인의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나 여자, 노인이 지하 감옥에 올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설마 이놈들은 어린아이나 여자까지도 붙잡아 오는 건가.’
문득 든 생각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큰 쪽은 흑마법사고 발걸음 소리가 작은 쪽은 흑마법사에게 잡혀서 감옥에 들어오는 아이나 여자라고 가정하면.
“나쁜 놈들.”
그렇게 판단이 서자 티르는 땅에서 귀를 떼고 원래 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새로운 희생자가 갇히러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니 더 암울해졌던 것이다.
‘어린아이나 여자까지 가둘 정도의 놈들이면 세피아한테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서 탈출해야 하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발걸음 소리는 티르가 갇힌 감옥 가까이에 이른 듯 또렷하게 들렸다.
횃불의 불빛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마 여길 지나서 더 안쪽에 있는 감옥에 가둘 모양이라고 티르는 생각했다.
탁!
그렇게 생각했는데 뜻밖에 티르가 갇힌 감옥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티르?”
귀에 익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목소리에 티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귀에 익은 목소리는…….
“세피아?”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부르면서 티르는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쇠창살에 붙어 있는 실루엣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횃불의 불빛에 실루엣의 모습이 점차로 드러났다. 천장에 그렸던 환영과 일치하는 눈, 코, 입, 얼굴의 윤곽이며 주황빛 머리카락.
정말로 쇠창살 뒤에서 자신을 부른 목소리는 정말로 세피아였다.
“흐아아아앙, 티이이이일! 죽은 줄 알았어, 흐아아아앙, 흐끅!”
세피아가 쇠창살 사이로 팔을 뻗어 넣더니 티르를 부둥켜안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티르는 자신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애써 참았다.
‘젠장, 멍청아. 네가 그렇게 울어 버리면 내가 울 수가 없잖아. 하지만…….’
티르도 쇠창살 밖으로 손을 뻗어서 세피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무사한 것 같으니 다행이네. 놈들이 뭐 나쁜 짓 하거나 그렇진 않았지?”
“흐극, 끅, 응. 에니스 언니가 잘 돌봐 줘어, 흐으으으응.”
“에니스? 같이 온 잡혀 온 사람?”
티르가 묻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두 번째로 만나는군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정장의 여자가 세피아의 뒤에 서 있었다.
넬하크의 비서인 에니스였다. 하지만 티르는 에니스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경계심이 역력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마법사인가?”
“아니, 에니스 언니는 마법사 아니야.”
에니스 대신 세피아가 훌쩍거리며 답했다.
“에니스 언니는 마법사 비서래. 나한테 잘해 줘. 예쁜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티르를 만나러 올 수 있던 것도 에니스 언니가 데려와 준 덕분이야.”
“저 여자가?”
티르는 놀란 눈빛으로 에니스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면 세피아의 옷은 깔끔하고 혈색도 좋았다. 약간 여윈 것 같긴 하지만 그것이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란 건 티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에니스란 여자를 무한정 신뢰할 순 없었다.
세피아에게 잘 대해 줬다고 해도 결국 저 여자도 마법사와 한패다. 무슨 꿍꿍이속으로 세피아에게 잘 대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은발, 혹시라도 음흉한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면 가만 안 둔다.”
“…….”
에니스는 담담한 눈빛을 한 채 아무 말도 없다가 마법사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세피아를 창살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세피아 아가씨, 이만 가셔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다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제 왔는데…….”
“죄송합니다.”
검은 로브는 고개를 숙이고는 슬리핑 마법으로 세피아를 기절시키고는 데리고 나갔다.
“세피아!”
티르는 세피아를 잡기 위해 쇠창살 너머로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세피아아!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장 내려놔! 돌아와, 돌아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마법사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티르의 앞에는 에니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에니스는 잠시 동안 티르를 쳐다보고 있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후 실험이 있을 겁니다. 수백 번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사망하고 생존한 자들 역시 정신이상자가 되어 버린 위험한 실험입니다.”
“뭐?!”
갑작스런 에니스의 말에 티르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세피아를 계속 만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