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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8화)
제4화. 암굴에 흘러든 빛 (2)
“무슨 소리야?!”
티르가 소리쳤지만 에니스는 여전히 무심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실험에서 죽거나 설령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다고 해도 정신이상자가 된다면 더 이상 세피아를 만날 순 없겠죠.”
“지랄하지 마! 내가 너희들 손에 죽을 것 같아? 난 세피아를 구할 거라고!”
티르의 말에 에니스는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짓더니 옆으로 돌아섰다. 왔던 길을 돌아 나가며 에니스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살아남으시길.”
이내 쇠창살 밖으로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림자마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티르는 한동안 쇠창살 앞에 붙어 있었다. 쇠창살을 쥐고 있는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에니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중얼거리며 티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 살아남아 주마. 꼭 살아남아 주마, 이 빌어먹을 놈들아.”
* * *
며칠이 흘렀다.
감옥은 여전히 음습하고 티르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나마 세피아가 가져다준 과즙이 아니었다면 여태 버티고 있는 것도 무리였을지 몰랐다.
하지만 티르에게 정말 힘이 되는 건 과즙 따위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자신을 보러 와 주는 세피아의 얼굴, 바로 그것이었다.
“올 때가 됐는데.”
티르가 쇠창살 앞을 서성거리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딜크가 물었다.
“매일 티르 보러 오는 그 여자 친구?”
“그래.”
“그 여자 친구, 예쁘게 생겼다.”
티르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주기만 하곤 다시 쇠창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넉넉히 잡아도 평소 세피아가 오던 시간은 훌쩍 지났다. 그런데 오질 않으니 초조해진 것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법사들이 세피아를 상전 모시듯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구태여 자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럴 리 없으니 마법사들이 세피아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면 왜 안 오는 거지? 어디 아픈가? 그래서 못 일어나서…… 치료는 잘해 주겠지.’
한숨을 내쉬며 쇠창살 반대편 벽으로 가서 등을 기대고 앉았다.
딜크는 티르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티르, 무서워?”
“뭐?”
티르가 쳐다보자 딜크가 다시 말했다.
“티르는 실험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표정이 좋지 않은 거다.”
“난 세피아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실험 따윈 별로 안 무서워.”
단순한 허세가 아닌 듯 티르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실험에 대해 말하고 보니 언뜻 궁금하기는 했는지 딜크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실험이란 거, 어떤 건지 알아?”
“응. 실험은 무섭다. 그리고 아파. 딜크 친구들도 그때 다 죽었어. 제레도 죽었고 리오도 죽었고 루시도 죽었고 전부…….”
딜크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그런데 이제 티르도 실험하러 간다고 에니스 님이 그랬으니까.”
딜크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팔로 무릎을 감싸고 웅크렸다.
티르는 굳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딜크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따악―!
시원스런 소리와 함께 딜크의 고개가 앞으로 확 숙여졌다.
“말했잖아. 난 안 죽는다고. 절대로 안 죽어. 그러니까 질질 짤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알았어?”
“티, 티르?”
딜크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딜크는 믿는다. 티르는 안 죽는다. 딜크도 안 죽었으니까 티르도 안 죽을 거다. 티르는 안 죽는다고 했으니까.”
딜크가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자 티르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쇠창살 쪽을 응시했다. 미미하긴 하지만 소리를 감지한 것이다.
타박.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한층 뚜렷해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세피아가 안 올 리가…….”
티르가 반색을 하며 급히 일어나 쇠창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티르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쇠창살 앞의 세 사람 중 세피아는 없었다.
“어이, 은발! 세피아는?”
“오늘은 전에 이야기했던 실험 날입니다. 세피아는 오지 않을 겁니다.”
에니스는 간단히 답하고 검은 로브에게 가볍게 눈짓을 했다. 검은 로브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쇠창살문의 자물통에 열쇠를 꽂았다.
철컥!
열쇠가 돌아감과 동시에 쇠창살이 덜컹 하고 흔들렸다. 검은 로브가 티르를 끌어내기 위해 쇠창살 안으로 들어왔다.
쇠창살문이 너무 갑작스럽게 그리고 쉽게 열리자 티르로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쉽게 열리다니.
하지만 감옥 안으로 들어오는 검은 로브를 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열리는 쇠창살문과 감옥으로 들어오는 검은 로브를 보자 순간적으로 공백이 되었던 머릿속에서 폭발하듯이 생각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탈옥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탈옥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피아를 구출할 수 있을는지, 만약 이대로 끌려가 실험을 당하면 돌아올 수 있을지.
수많은 생각과 계산들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것은 사냥꾼의 본능이었다. 행동해야 할 순간이 오면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으아아아아아!”
티르는 몸을 날렸다. 마법사가 당황해서 움찔하는 찰나 어깨로 복부를 들이받음과 동시에 양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마법사가 주먹으로 등을 때려 댔지만 티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와 놈을 맞은편 쇠창살에 처박아 버렸다.
철컹!
놈을 확실히 처리하려면 지금이 기회였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다른 마법사가 수인을 맺고 뭔 주문을 외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두 번째 놈이.’
급히 돌아섰지만 스파크는 절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달려들었다간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다름없을 터였다.
간신히 얻은 기회를 살리기 위해선 다른 선택이 필요했다.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마법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뭔가 다른 선택을!
찰나 티르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은발?!’
방금 전 짧긴 해도 대화까지 주고받았는데 왜 저 여자를 보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지금 봤으니까!
티르는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방향을 틀었다. 허리와 옆구리에 부담이 왔지만 억지로 참으며 에니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에니스의 아담한 어깨가 품에 안기듯이 딸려 왔다.
아니, 착각이었다. 순간 에니스의 팔꿈치가 티르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퍼억!
동시에 에니스가 손을 비틀어 오히려 티르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다리를 걷어찼다. 저항 한 번 못한 채 티르는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어서 바닥에 널브러지기 무섭게 에니스의 하박이 목을 내리찍었다. 티르는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렀지만 가녀려 보이기만 했던 에니스는 뜻밖에 요지부동이었다.
“으으으.”
그렇게 10여 초가 지나자 티르의 몸부림이 서서히 더뎌지더니 팔과 다리가 축 늘어졌다.
안색이 하얘지다 못해 새파래져서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가 돼서야 에니스는 티르의 목을 압박하던 하박을 풀었다.
“쿨럭! 하아, 하아.”
그제야 숨통이 트인 티르는 사지를 뻗고 쓰러져 겨우 숨을 내뱉었다.
“탈출 시도는 이번으로 끝내는 게 현명할 겁니다. 가능성도 없거니와 당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세피아가 걱정을 하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티르가 벽을 짚으며 간신히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에니스에게 다가갔다.
마법사가 티르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에니스가 손을 들어 제지시킨 덕분에 티르는 에니스의 앞에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죽인다. 세피아 건드리면.”
말과 함께 에니스의 멱살을 잡았지만 손에 힘이 없는 탓에 차라리 티르가 에니스의 옷깃을 잡고 매달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세피아가 당신을 걱정하는 만큼 당신 또한 세피아가 많이 걱정되시나 본데…….”
에니스는 티르의 손을 쳐 내고는 말을 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피아가 걱정된다면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니스는 어두컴컴한 복도 저편으로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이 자식.”
티르는 이를 갈며 에니스를 노려봤으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겨우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뒷모습을 노려보는 것.
인정하긴 싫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강하고 자신은 약하다. 그래서 자신은 그들에게서 세피아를 구할 수가 없다.
“젠장.”
티르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 둘이 양옆에서 팔을 잡아채자 티르는 거칠게 떨쳐 내고는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복수한다. 반드시!’
다짐하면서.
* * *
방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감옥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짙은 알코올 냄새는 감옥의 퀴퀴한 냄새와 전혀 달랐다.
물론 그래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방 가운데 있는 의자와 기이한 연장들은 한눈에도 결코 좋아 보이진 않는 것들이었다.
티르는 흰색 가운 하나만 걸친 채 그 이상한 장비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이젠 소란을 피우지 않는군요.”
돌아보니 에니스가 은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에니스는 티르를 지나쳐 쟁반을 의자 옆에 올려놓고 연장 가운데 가장 작은 칼날을 들고는 티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섬뜩하지 않나요?”
“전혀.”
티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호하게 답하자 에니스는 칼날을 쟁반 위에 내려놓고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티르의 앞에 서자 에니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열쇠였다. 에니스는 아무 말없이 수갑을 풀어 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티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에니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제야 스스로 처지를 자각한 것 같으니까 풀어 드리는 겁니다.”
그리곤 구석의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
순간 티르의 시선이 쟁반 위에 놓여 있는 연장을 향했다. 동시에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에니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로 매혹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꿈치를 떼고 있었으며 오른손이 쟁반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티르의 눈에 한순간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멈칫하더니 이내 티르는 오른손을 축 늘어뜨리고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