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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9화)
제4화. 암굴에 흘러든 빛 (3)
‘빌어먹을.’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설령 요행으로 성공하다고 하더라도 세피아를 구하기는 무리란 것 역시도.
티르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때 에니스가 돌아섰다.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세피아를 위해서나 당신을 위해서나. 칸엘 님 앞에서도 부디 그런 현명한 처신을 했으면 좋겠군요.”
에니스의 말에 티르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던 건가?”
“물론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내뱉은 티르였다.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그걸 알고 있었다니. 이건 마치 자신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시험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자책하지 않길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요. 특히나 세피아를 위해선.”
티르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여자에게선 기척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기척을 읽을 수 없는 야수야말로 사냥꾼 최악의 천적. 지금의 자신으로선 어떻게 해도 이 은발 여자를 벗어날 수가 없단 걸.
“네 말대로 도망치진 않을 거다. 널 상대론 할 수도 없을 거고. 그러니까 나한테 무슨 실험을 할지 말이나 해 줘.”
“모르는 게 더 이로울 수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알고 싶다.”
티르가 단호하게 말하자 에니스는 의외로 쉽게 입을 열었다.
“생물체의 체액을 포함한 모든 조직이 독성을 띠는 동시에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동시에 이전과 다름없이 생물체로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요지입니다.”
“독? 미쳤나? 어떻게?”
“수백 번의 착오를 거쳐 이론적으론 이미 완성되어 있고 실험도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다만 성공한 사례에 한해서 실험 대상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발작을 일으키거나 자살을 해 버린 탓에 완성체가 남아 있지 않은 것뿐이죠.”
“미친놈들.”
티르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에니스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 실험을 받게 될 거란 건 변치 않을 테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세피아를 다시 보고 싶다면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야 한단 겁니다.”
“절대로 일어날 거니까 가식적인 말은 집어치워. 반드시 일어나서 너희들이 집어넣은 독으로 오히려 너희들을 다 죽여 줄 테니까!”
“그런 정신에 눈빛이라면 확실히 다시 일어날 것 같긴 하군요. 그럼 칸엘 님이 오셨으니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지요.”
에니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말로 티르의 뒤편에 있는 문이 열리며 칸엘이 들어왔다. 실험을 보조하기 위해서인지 칸엘에 이어 검은 로브 네 명이 방으로 더 들어왔다.
“준비는 다 됐나?”
“예. 바로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세피아가 물으면 잘 둘러대고.”
“예.”
에니스가 나가자 칸엘은 테이블에 있는 두건으로 코에서부터 턱까지 감싸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이프를 하나씩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 앉아 있는 티르를 쳐다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칸엘이 티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마치 잘 아는 사이인 양 친밀하게 굴지만 절대로 그런 사이일 리가 없다.
티르는 어금니를 으드득 갈면서 고개를 들어 칸엘을 노려봤다.
“너희 놈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이 망할 놈아.”
티르의 말에 칸엘의 얼굴이 잠시 흠칫 굳어지더니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랬었지.”
그러나 그도 잠시. 돌연 웃음이 멈추더니 칸엘이 티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크헉!”
나동그라지며 티르가 뒤로 날아가 문에 부딪쳤다. 코에선 코피가 흘렀다.
그러나 티르가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검은 로브 넷이 동시에 달려들어 티르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꽉 붙잡았다.
“젠장, 비겁한 놈.”
“그래, 그 정신이다. 그 정도 깡이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칸엘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티르가 걸치고 있는 천을 확 잡아챘다.
지이이익!
천이 찢어지며 티르의 나신이 드러났다.
칸엘은 수염을 가다듬듯 두건 위를 쓰다듬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괜찮은 몸뚱이군. 그렇다면 나도 성심성의껏 실험을 해 주는 게 예의겠지?”
칸엘은 테이블로 가더니 액체가 들어 있는 가느다란 원통형의 연장을 집어 들더니 서서히 티르를 향해 다가왔다.
“꽉 붙잡아라.”
“예.”
검은 로브들이 대답하기 무섭게 칸엘은 원통형 연장의 끝에 달린 침을 티르의 목에 꽂아 넣고는 원통의 끝을 지그시 눌렀다.
티르는 저항하려 했지만 검은 로브들에 붙잡혀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원통에 들었던 액체가 주입되자 숨이 턱 막히더니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 제엔장…… 무…… 슨…….’
심지어 시야가 노랗게 되더니 의식이 혼몽해지기까지 했다. 그저 어렴풋이 칸엘의 콧노래와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자, 그럼 스케치를 시작해 볼까, 후후.”
쇠붙이가 신체에 닿으며 스윽― 스윽―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균형 감각조차 사라졌고 이젠 검은 로브들에 의지해 서 있는 형편이었다.
마지막 남은 감각은 시각이었지만 유일하게 보이는 건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칸엘이었다. 칸엘이 걸치고 있는 하얀 가운이 무슨 장막처럼 엄청나게 넓고 높아 보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흰 장막은 자신의 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커졌다.
더 높아지고 더 넓어졌다.
압도적으로 커져서 마지막 남은 시야를 집어삼키며 다가왔다.
마침내 시야가 암흑으로 완전히 암전되어 버리고 더 이상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 * *
암흑의 바다를 끊임없이 침잠한다. 한도 끝도 없는 어둠 속 어디쯤 가라앉았는지 짐작조차 안 되고 시간조차 인식이 없다.
그렇게 얼마나 가라앉았을까.
타악―
등으로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이어서 팔다리가 닿았다.
“다 가라앉은 건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가느다랗고 희미한 시야로 푸른색이 들어왔다. 암흑이 아니라 아름다운 푸른색, 푸른 하늘이었다.
“하늘?”
하늘뿐만이 아니라 유유히 흐르는 하얀 뭉게구름과 눈부신 태양이 있었다.
왠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팔을 들어 보았다. 손바닥이 태양을 가리며 빗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새어 나왔다.
“티르 이놈아, 거기서 뭐하냐?”
굵직한 목소리 하나가 티르를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한 5년은 들어 보지 못한.
“아버지?”
일어나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눈에 익은 광경, 가르케 마을의 정경이 들어왔다. 피혁 상점 앞에 아버지 가프와 피혁 상점의 주인인 그래인 영감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꿈이어서 일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인식은 없었다.
“웬일로 둘이 사이좋게 있는 거야?”
티르가 웃으며 가프와 그래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야, 티르!”
“티르!”
굵직한 목소리에 이어 이제 막 변성기에 접어든 것 같은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론과 제론이 서 있었다.
“너 또 세피아 어디로 빼돌린 거야? 얼른 데려와. 아빠한테 혼난다고!”
“혼난다고!”
카론의 말을 제론이 그대로 따라했다.
카론과 제론 형제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그랬듯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며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때 또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티르!”
카론과 제론에게 대답하려다 말고 티르는 뒤로 돌아섰다. 왜냐하면 방금 전 자신을 부른 목소리가 바로 세피아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피아?”
“또 나 버려두고 혼자 갔지!”
세피아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화났단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 듯 양 주먹을 허리에 얹고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늘 보다 못해 지겹도록 달라붙는 세피아였지만 지금 세피아를 보니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건 왜인지 알 수 없다.
“정말이지 티르는 배려라는 걸 할 줄 모른다니까! 나 늑대한테 잡아먹히면 책임질 거야?!”
“그땐 내가…….”
세피아가 오는 방향으로 마주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언젠가 똑같은 말을 했듯 그땐 자신이 구해 줄 테니 그만 징징거리라 말하려고.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서로 마주 다가가고 있는데 세피아와 자신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세피아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입만 벙긋거릴 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피아?”
티르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결국에는 달리기가 되었지만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어느새 세피아는 산 저편으로까지 멀어져 있었고 산은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암흑에 잠겨 가고 있었다. 그 끈적끈적한 암흑은 하늘과 산을 완전히 삼켜 버리고 세피아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뭔가 할 새도 없었다. 세피아의 이름을 부를 틈도 없었다. 출렁거리며 들어오는 암흑의 밀물에 세피아는 그대로 삼켜져 버렸다.
세피아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주변을 돌아봤을 때 마을은 이미 암흑에 삼켜져 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끈적끈적한 암흑에 오염된 광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세피아! 그래인! 아버지! 카론, 제론! 전부 어디 갔어?! 어디!”
온 힘을 다해 불러 보지만 대답이 없다. 오히려 암흑이 이제 자신마저 삼켜 오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액체는 발에 닿자 꾸물거리면서 무릎까지 휘감아 왔다.
“뭐, 뭐야, 이건?!”
티르는 발버둥을 쳤지만 그 끈적한 것들은 계속해서 올라왔다.
심지어 허공에서 주르르 떨어져 어깨에, 가슴으로,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축축하고 미끄덩한 굉장히 불쾌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불쾌한 감촉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 정강이, 어깨, 가슴, 팔뚝 등 액체에 닿은 부위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칼로 생살을 찢어 내고 핏줄과 심줄에 뭔가를 집어넣어 마구 헤집는 듯한 고통!
“흐하아아아악!”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티르는 사지를 오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고통은 멎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으로, 복부로, 허벅지로 부위를 더 넓혀 고통을 더 심화시켜 갔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미칠지언정 고통을 인식할 수 없는 낙원이 있다면 그곳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쇼크 덕분이었을까. 무의식을 헤매던 기억이 순간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