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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0화)
제4화. 암굴에 흘러든 빛 (4)


자신의 처지…… 세피아를 구하려다 오히려 갇힌 신세가 되었단 걸…… 넬하크란 빌어먹을 작자의 공격 마법에 기절했단 걸…… 에니스란 여자에게 당해서 실험실로 끌려왔단 걸…… 지금 처지는 그 빌어먹을 실험 때문에 마취당해 기절한 상태란 것을…….

“하지만 당신이 그 실험에서 죽거나 설령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다고 해도 정신이상자가 된다면 더 이상 세피아를 만날 순 없겠죠.”

기억의 파편 속에서 문득 쇠창살 맞은편에서 자신에게 말하는 은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반드시 살아남으시길…….”

그때 했던 자신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

“응, 딜크는 믿는다. 티르는 안 죽어. 딜크도 안 죽었으니까 티르도 당연히 안 죽을 거야. 티르는 안 죽는다고 했으니까.”

울상이 된 딜크에게 자신만만하게 했던 말들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한데 자신은 그때의 의지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막상 시련이 앞에 닥치니까?
결코 아니었다.
티르라는 인간, 자신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의 감겨졌던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시야 가득한 암흑. 어느새 가르케 마을을 완전히 삼켜 주변은 어둠뿐이었다.
다만 무엇인지 모를 어렴풋한 불빛 하나가 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빛…….”
비틀거리며 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본능적으로 그 미약한 불빛에 이끌렸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정의 고통에 이어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크윽!”
처음엔 발.
어느 순간 발에 싸늘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발목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크흐흑!”
다음은 발목에서부터 정강이.
절정의 고통을 느꼈지만 그 다음으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강이가 사라졌으니까. 대신 허공에 떠 있는 무릎으로 암흑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시체가 벌레에 물어 뜯겨 사라져 가는 것처럼 몸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럴 때마다 빛의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유혹했다.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쓰러져 버리라고.
혹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티르는 조소하며 오히려 빛을 향해 한 걸음만큼 더 다가섰다. 이제 빛이 바로 저 앞에 있는데.
“포기할 리 없잖아!”
소리치며 다시 한 번 더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빛을 내는 물체의 윤곽이 명확히 보였다.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암흑 속에 검극에서부터 검신의 중간까지를 깊이 박고 있는 새하얀 한 자루의 검!
직감할 수 있었다.
검이 자신을 부르고 있노라고.

“……라.”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검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검과 그 배후의 암흑 속에서 마름모꼴의 붉은 점 두 개가 점차 선명해졌다.
그 붉은 점 두 개를 노려보며 티르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가슴부터 머리까지 사라지고 오른팔만 남았다. 어둠은 자신의 노력을 비웃듯이 자신의 몸을 계속 먹어 나갔다.
몇 걸음을 더 옮기자 붉은 점의 뒤로 어떤 윤곽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를 향해 볼록한 거대한 반원형의 윤곽. 그 한가운데 두 개의 거대한 붉은 점, 붉은 눈이 박혀 있었고 사이로 거대한 뿔이 솟아 있었다.
순백의 검을 호위하는 듯 버티고 서 있는 그 거대한 실루엣은 마치 투구벌레!
투구벌레 같았다.
하지만 투구벌레라는 모습을 취하고 있음에도 위압감만은 드래곤,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감을 내뿜는 아주 기이한 존재였다.

“……뽑아라.”

투구벌레가 정신으로 말했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투구벌레의 전음에 이끌리듯 티르는 다시 순백의 검을 향해 다가갔다. 가슴에서 목까지가 사라졌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는…….”

목에서 머리가 사라졌다.
오른쪽 어깨에서 뻗어 나온 팔이 유일하게 남아 어둠을 헤치고 검을 향해 다가갔다.

“……너는…… 또 하나의…….”

팔뚝에서 손목까지가 검게 변색된다.
마치 다 타 버린 재가 날려 가듯 까만 점으로 부서져서 흩어졌다.
남은 것은 손등에서부터 다섯 손가락.
하지만 손 하나가 남았을지언정 그것은 의지의 발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검과 거리는 불과 한 뼘 남짓.

“……또 하나의…….”

손가락이 아우성쳤다. 검지와 중지가 검병에 닿을 듯 말 듯, 스칠 듯 말 듯.
하지만 마지막 순간 손바닥이 다섯 손가락을 쫙 벌리더니 맹수가 사냥감에게 덮쳐 들 듯 검병을 향해 최후의 한 뼘을 삼켜 버렸다.
그 먼 거리를 뚫고 온 오른손이 마침내 순백의 검을 잡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더 깊은 어둠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더 깊은 어둠이지만 더 뚜렷하게 보였다.
투구벌레의 윤곽이 드러나고 거대한 목소리가 마침내 포효를 터트렸다.

“……나니까!”

우우우우우우우웅―!

포효와 동시에 공간이 울었다.
투구벌레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끝없는 어둠의 천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뒤이어 순백의 검에서 빛이 터져 나와 투구벌레의 뒤를 쫓아 하얀 빛의 기둥을 만들었다.
그것은 암흑의 공간을 완전히 갈라 버리는 절대의 검기였다.
공간이 갈라지고.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빼곡히 금이 가고 산산이 부서져서 아래로 하나, 둘씩 떨어졌다.
어둠의 파편들이 추락하고 난 공간은 여전히 검은색이었지만 달랐다. 암흑이지만 동시에 다른 느낌인, 빛이기도 한 암흑.
끈적끈적한 암흑이 삼켰던 어둠을 정화하며 마침내 빛이 기상한 것이었다.

* * *

깨어날 때부터 어둠 속이었다.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놈들이 집어넣는 짐승은 질리게도 죽였다.
쇠사슬에 양 손목과 발목이 구속당한 상태여서 처음엔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기우임을 깨닫게 되었다.
찢어진 상처. 배어 나오는 피. 그 피에 닿자마자 짐승들은 즉사해 버렸다.
‘독의 능력이라고 했던가.’
실험을 당하기 전에 에니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독이라.’
하지만 티르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자신도 그런 줄 알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달랐다.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이것이 그저 평범한 독이었다면 이런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치익―!
쇠사슬을 쥐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가느다랗게 올라왔다.
쇠사슬이 녹고 있는 것이었다.
그대로 계속 잡고 있었다면 쇠사슬을 완전히 끊을 수도 있었겠지만 티르는 손바닥을 풀었다. 소리 때문인지 간수가 졸고 있다가 깼기 때문이었다.
간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직도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 동안 보다가 조심스럽게 쇠창살 쪽으로 다가왔다.
“Bright.”
천장에 박힌 아티팩트에서 하얀 불빛이 퍼져 나가며 살풍경이 드러났다.
“욱!”
“멍청하긴.”
“닥쳐, 괴물아!”
간수가 소리치며 들고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하지만 티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히자 돌멩이는 벽에 부딪쳤다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것도 못 맞추냐?”
티르가 도발했지만 간수는 코웃음 치고는 다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불은 여전히 켜 둔 채로 우리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듯 티르를 보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등받이에 등을 기댄 꼴이 자못 거만하게 보였다.
“흥, 네가 아무리 흥분시키려고 해도 어차피 넌 갇혀 있고 난 간수라고. 알아듣냐, 응?”
티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돌려 철문을 쳐다봤다. 철문의 위쪽에 난 조그만 쇠창살 구멍으로 그림자가 보였다.
“내가 속을 줄…….”
철컥!
간수가 코웃음 치며 말하는데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더니 호리호리한 체구의 검은 로브가 들어왔다.
“벌써 교대 시간인가? 하지만 다음 교대는 스탠인데? 당신 누구?”
간수가 물었지만 호리호리한 체구의 검은 로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간수의 앞으로 걸어와 오른팔을 천천히 들었다. 옷자락에 가려져 있던 하얀 손이 드러나더니 그 순간 검지가 간수의 미간을 찔러 갔다.
파앗!
피할 틈이 없었다.
미간을 찔린 채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던 간수가 비틀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검은 로브는 간수를 의자에 앉혀 놓고는 쇠창살 앞으로 걸어왔다.
철컹!
쇠창살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티르의 두어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티르는 여전히 앉은 채로 놈을 올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티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지? 안에까지 들어온 걸 보면 나한테 용건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검은 로브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로 손을 가져갔다. 후드를 뒤로 넘기자 풍성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세피아?”
티르가 흠칫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후드 안의 얼굴은 뜻밖에 세피아였던 것이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티르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니, 그럴 리 없지. 세피아였으면 발걸음 소릴 못 들었을 리 없지.”
티르의 말에 세피아 얼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민감한 청각을 가졌군요.”
세피아가 말하며 손을 얼굴과 목 사이로 가져갔다.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뜻밖에도 허물을 벗듯 얼굴 가죽이 그대로 뜯겨져 나가는데 얼굴 뒤에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벗겨 낸 얼굴 가죽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가면이었던 것이다.
“은발?”
안의 얼굴은 에니스였다.
“무슨 짓이지? 너라면 이런 짓 안 해도 날 볼 수 있었을 텐데?”
“만에 하나 제가 이런 일을 했단 걸 들키면 곤란해지기에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인 겁니다.”
티르가 그래서 어쩌라는 듯 쳐다보자 에니스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사정상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습니다만 당신이 솔깃할 만한 제안이 있습니다. 성공하면 당신과 세피아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자유?”
에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