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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1화)
제4화. 암굴에 흘러든 빛 (5)
하지만 티르는 벽에 등을 기대고 퍼질러 앉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그만둬. 어차피 안 속을 거니까.”
“속이는 게 아닙니다. 제가 구태여 이런 분장을 하고 간수를 기절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신을 속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야 모르지.”
티르가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자 에니스는 약간 난감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에니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직이 한숨을 쉬며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우사 하모니.”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청각이 예민한 티르는 에니스가 한 말을 들었다.
티르가 쳐다보자 에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우사 하모니. 진짜 이름입니다.”
“나우사 하모니?”
에니스, 아니, 나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적은 넬하크와 그 일당을 붙잡는 겁니다. 제 동료들이 며칠 후에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두 번째 말은 의외였는지 티르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우사를 쳐다봤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곳의 방어가 견고하더군요. 공격에 앞서 마법 방어진을 파괴하고 교란시켜야 하는데 저는 넬하크와 칸엘을 붙잡아야 합니다. 포섭한 자가 몇 있긴 하지만 당신이 도와준다면 이번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겁니다.”
“…….”
티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우사를 빤히 쳐다봤다. 이 여자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비밀치곤 너무 쉽게 말해 주는 거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나우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주먹을 펴자 알약 하나가 있었다.
“왜냐면 거절하면 당신을 죽일 각오를 하고 들어왔으니까요.”
“죽여?”
나우사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뒤이어 남은 손을 품속에 넣어 다른 것을 꺼냈다. 주먹을 펴자 이번엔 열쇠가 나왔다.
“하지만 절 도와주신다면 직접 세피아를 구하러 갈 수도 있을 겁니다.”
나우사가 티르의 바로 앞으로 걸어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각 알약과 조그만 열쇠가 있는 두 손을 티르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행동의 의미는 명백했다. 그녀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티르는 열쇠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나야 손해 볼 건 없으니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뭐가 말이죠?”
“너처럼 신중한 녀석이 내가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잖아. 지금은 도와준다고 해 놓고 나중에 맘이 바뀌면?”
티르의 반문에 나우사는 엷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그러지 못합니다.”
“왜?”
“당신이 배신하는 순간에 세피아는 제 손에 죽을 테니까요.”
“뭐?”
나우사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세피아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제겐 망설일 까닭도 여유도 없습니다.”
“…….”
나지막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냉정하고 무섭게 들리는 말에 티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게 진짜 협박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세피아를 두고 도박을 할 사람이 아니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약아 빠졌군.”
“그런가요?”
티르가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자 나우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티르, 당신은 지금 선택을 해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전 시간이 얼마 없거든요. 둘 중 어느 걸 택하실 겁니까?”
“어차피 정해진 거 아닌가?”
티르가 턱짓을 열쇠 쪽을 가리키자 나우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나우사는 티르에게 열쇠를 주고는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서 다시 내밀었다.
“당신이 할 일입니다. 읽고 나서 필히 없애 주셨으면 좋겠군요.”
티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우사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돌아서서 감옥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티르는 시선으로 나우사를 쫓다가 그녀가 쇠창살문을 나가기 전에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내가 세피아를 버릴 수 있다곤 생각 안 해 봤나?”
그 말에 나우사가 걸음을 멈추어 섰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천천히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뭐?”
티르가 어이없다는 듯 다시 물었지만 나우사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 * *
감옥 안에 며칠 갇혀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 엎드려 퍼질러 자고 있는 간수를 보며 아마 지금이 한밤이나 새벽쯤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밤이든 새벽이든 별로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간수가 잔다는 것이며 지금이 양피지를 읽을 절호의 기회란 사실이었다.
티르는 동물 사체 밑에 숨겨 두었던 양피지를 꺼냈다. 끈을 풀자 말려 있던 양피지가 저절로 펴졌다.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나왔다.
불이 밝을 땐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는데 오히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펼치자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글자가 나타났다.
‘이게 마법이란 건가.’
신기하긴 했지만 정신 팔려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간수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잠들어 있을 동안 다 읽어 둬야 했다.
눈동자가 양피자의 위에서부터 아래쪽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나흘 후 공격 개시. 임무는 교란. 최대한 소란스럽게. 단, 목에 파란 띠를 두른 자들은 방어진을 해체하는 아군이므로 제외. 양피지를 한 꺼풀 벗기면 마탑에 대한 간략한 지도가 있으므로 참고.
추신: 양피지에 마법을 걸어 글자의 빛이 점점 바래지다가 나흘 후에 완전히 사라지도록 해 두었음. 양피지의 일부를 찢어 시간 확인에 참고. 열쇠는 감옥 출구까지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으므로 참고.
‘나흘 후라.’
중얼거리며 티르는 양피지를 한 꺼풀 벗겨 냈다. 적혀 있는 대로 이곳의 지도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고 감옥에서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간단해서 한 번 보고 외울 정도로 충분했으므로 티르는 손바닥에 피를 내서 양피지를 문질렀다. 양피지가 소리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다만 시간을 알기 위해 나흘 후라는 문구만 찢어서 따로 가지고 있었다.
‘나흘 후.’
짐승의 사체 밑에 숨겨 둔 열쇠를 꺼내서 만지작거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우사의 제안을 받을 때는 몰랐는데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긴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티르는 열쇠를 주먹으로 꽉 쥐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언젠간 넬하크를 죽이고 세피아를 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긴장할 게 뭐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는데.
‘기다려라, 세피아. 반드시 구하러 갈 테니.’
어둠 속에서 티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제5화. 포식자 (1)
티르는 종이 쪼가리를 비비적거리며 간수를 쳐다봤다. 간수는 어지간히도 심심한지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으으음.”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간수가 쇠창살로 다가왔다.
“어이, 자냐?”
“…….”
“Bright.”
간수가 주문을 외자 천장에 박힌 마법 등에 불이 들어왔다.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티르는 여전히 손가락으로 종이 쪼가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네. 그러면 대답해야 할 거 아냐, 괴물 놈아. 뭐냐, 그건?”
간수가 종이 쪼가리에 관심을 보이자 티르는 검지로 양피지를 튕겼다.
양피지는 간수의 발치까지 날아가 떨어졌다.
“양피지잖아?”
간수가 손톱 크기의 종이 쪼가리를 집어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괴물. 이거 어디서…….”
우스스―
간수가 묻는데 벽과 천장이 흔들리면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티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더니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나흘 후. 진짜였네.”
티르가 무릎을 짚고 일어서더니 걸음을 옮겼다. 수갑과 족쇄는 오래전부터 고리가 풀어져 있었던 건지 더 이상 구속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간수가 놀라며 돌아섰지만 늦은 뒤였다. 티르의 손이 쇠창살 사이로 뻗어 나와 간수를 끌어당겼다.
“제, 우읍!”
티르의 오른손이 간수의 입을 막았다.
몇 초 후 아우성치던 팔이 축 늘어지더니 몸뚱어리가 쇠창살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티르는 나우사에게 받은 열쇠로 쇠창살문을 열고 나와 간수의 로브를 벗겼다.
로브는 품이 넓어서 티르에게도 잘 맞았다.
“오랜만이네.”
우두둑, 우두둑.
기지개를 펴자 관절이 상쾌한 비명을 질렀다.
말 그대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자유는.
하지만 공기도 그립고 땅도 그립지만 무엇보다 보고 싶은 건 사실 따로 있었다.
“세피아.”
한 번도 그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세피아를 구할 때가 드디어 왔다.
티르는 심호흡을 하곤 철문을 밀었다.
철컹!
그그그그그.
로브 자락을 날리며 티르는 철문 뒤로 곧게 뻗은 복도를 전력으로 달렸다.
* * *
티르가 갇혀 있던 곳은 지하 감옥의 가장 아래층에 있는 방이었다.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오자 이전에 딜크와 함께 갇혀 있던 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나우사가 뭔가 수작을 부렸는지 쇠창살문이 모조리 열려 있었고 갇혀 있던 미치광이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복도에 남아 있던 몇몇 흑마법사들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우성치는 미치광이들의 손에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티르가 막 계단 위로 올라온 순간에도 흑마법사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다가 티르를 발견하곤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어서 내려가! 주, 죽…….”
그러나 흑마법사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왔던 방향으로 그대로 다시 딸려 갔다. 미치광이들이 끌어당긴 것이었다.
수인을 맺으며 발악을 했지만 흑마법사는 미치광이들 속에 파묻혔고 잠시 후 처절한 비명 소리 끝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미치광이들이 시선을 돌려 티르를 쳐다봤다.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동시에 몰려왔다. 로브 때문에 흑마법사로 착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