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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2화)
제5화. 포식자 (2)
이래서야 뚫고 나가려면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 마법사들에게 붙잡혀 온.
최악의 경우엔 어쩔 수 없겠지만 무턱대고 죽일 순 없었다.
그러는 사이 미치광이들이 거리를 점점 더 좁혀 왔고 티르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는데 그때 미치광이의 인파 속에서 고함이 들렸다.
“티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인파 속에서 커다란 바위처럼 솟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딜크?”
거구의 정체는 딜크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딜크는 티르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퍼퍼퍼퍽!
무시무시한 돌진력에 치여 미치광이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순식간에 인(人)의 장벽을 뚫고 온 딜크는 티르를 보자마자 덥석 끌어안았다.
“티르다! 딜크 친구, 티르 찾았다. 딜크는 티르 죽은 줄 알았다.”
울먹거리는 게 딜크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반면 티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빠끔거리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숨 막히잖아.”
“미안. 딜크, 너무 기뻐서, 크응.”
그제야 딜크가 떨어져서는 검지로 콧물을 쓱 훔치는데 딜크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딜크, 이놈아. 거꾸로 가면 어떻게 하냐! 빨리 여길 빠져나가, 멍청한 놈아.”
“아, 맞다. 하지만 딜크 친구 티르가 있어서.”
“티르고 자시고 간에 먼저 여기서 나가라고. 그래야 우리도 살고 그 티르인지 하는 놈도 살 거 아냐!”
딜크의 뒤에서 나는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계속 듣다보니 누구 목소린지 떠올랐다. 고르고스에서 딜크와 함께 있던 염소수염 노인, 하스크였다.
아니나 다를까 딜크가 돌아서자 아낙네가 아기를 업은 것처럼 포대기에 감싸인 채 등에 매달린 하스크의 모습이 보였다.
염소수염에 주름은 자글자글한 노인네가 아기처럼 등에 매달린 꼴이라니.
분명 이 염소수염 노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을 터인데도 티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지 마, 이놈아!”
“당신 꼴을 보고나 말하시지.”
티르가 지지 않고 말을 받자 하스크는 지팡이로 딜크의 어깨를 때리며 괜히 화풀이했다.
“빨리 달려, 이놈아! 네놈이 안 달리니까 계속 이 꼴로 있어야 되잖아. 달려!”
“아, 알겠어요, 주인님. 티르도 잘 따라와. 딜크 이제 끝까지 달린다. 하나, 두울, 세엣!”
딜크가 몸을 작게 웅크리더니 셋을 외치는 순간 마치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맹렬한 기세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위력 역시 가히 인간 브레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딜크가 달리고 지나간 양옆으로 미치광이들이 튕겨 나가 버렸다.
딜크의 손맛을 몸소 체험해 본 티르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던지라 잠시 남의 일인 듯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딜크가 뚫은 길을 따라 앞으로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사이 어느새 출구가 바로 앞이었다.
입구는 단단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지만 딜크가 양손으로 앞을 교차하며 그대로 부딪치자 철문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투콰앙!
철문과 함께 흑마법사 두 명이 저 멀리 날아가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밖이다. 밖에 나왔다!”
바깥에 나오자 딜크가 어린애마냥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연로한데다 딜크의 초고속 질주 때문에 해롱거리던 하스크는 헛구역질을 하며 맥이 빠진 목소리를 겨우 짜내서 말했다.
“우욱! 이, 이놈아, 다 왔으면 내려. 나 죽는다.”
“헤헤, 네, 주인님!”
딜크가 웃으며 포대기를 풀자마자 하스크가 옆으로 굴러떨어져서는 풀밭에다 토를 했다.
방금 막 감옥에서 나온 티르는 토악질을 해 대는 하스크를 보자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멀미냐?”
“젠장, 닥쳐, 애송…… 우웨엑!”
티르에게 소리치려다가 하스크가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으며 토악질을 했다.
티르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로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지만 분위기가 워낙 어수선해 다행히 이쪽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방어막이 번쩍거리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법의 포격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는 형국인데 이쪽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 없다.
‘뭐, 덕분에 세피아를 찾는 데 더 유리하니까 잘된 셈이지.’
나우사와 약속대로 흑마법사들을 죽이며 교란시켜야 하기도 하지만 티르 입장에서 그 일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었다.
티르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세피아였다. 흑마법사들을 교란시키는 건 세피아를 찾다가 만나는 녀석들만 족쳐도 충분할 터였다.
“그럼 고마웠다, 딜크. 다음에 보자.”
티르가 딜크에게 인사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그때 하스크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불렀다.
“어이, 꼬마, 잠…… 우웁!”
“왜?”
하스크는 끈끈한 침이 흐르는 입가를 소매로 훔치며 티르에게 걸어왔다.
“너도 에니스 님, 아니 나우사 님께서 하신 이야긴 들었겠지?”
“나우사? 그럼 너도?”
순간 티르의 머릿속에서 뭔가의 끝과 끝이 연결되었다. 생각해 보니 탈출하는 타이밍에서 딜크가 거기 있던 건 너무 공교로웠다.
“그게 다 나우사 님께서 계획하신 거다, 꼬맹아. 나우사 님 말씀만 아니었으면 네놈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멀리 도망쳤을 거다.”
티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뒤로 돌아섰다.
“나중에 나우사 보면 내가 너무 고마워하더라고 말이나 전해 줘, 그럼.”
“어딜 가려고. 나우사 님께서 네 녀석 데리고 나오면 같이 다니면서 뭘 좀 하라고 시킨 일이 있단 말이다. 우린 같이 가야 돼.”
“나중에.”
티르는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하스크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혼자 돌아다니면 세피아를 구하기는커녕 찾지도 못할 텐데?”
그 말에 티르가 우뚝 멈춰 섰다.
“어디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티르가 달려들어서 하스크의 멱살을 잡아 끌어 올렸다.
“커, 커읍! 내가 아니라 나우사 님이…….”
“티, 티르, 그러면 주인님 아프다.”
딜크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지만 티르는 오히려 멱살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말해!”
“나우사 님이, 크읍!”
“그만하죠, 티르. 하스크가 그렇게 말한 건 제가 시킨 겁니다.”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티르는 하스크의 멱살을 놓고 뒤로 돌아섰다. 검은 로브를 입은 나우사가 서 있었다.
“역시 와 줬군요.”
“세피아는?”
티르가 물었지만 나우사는 엶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세피아는?”
소리치며 티르가 나우사의 멱살을 잡아챘다. 한데 뜻밖에 나우사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세피아는 훨씬 중요한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일이 터지니 세피아부터 빼돌리더군요.”
“뭐? 그럼 설마?”
“아직 이 안에 있을 겁니다. 지금 방어진의 상태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지만 안에서 밖으로도 못 나가니까요. 다만……”
“다만 뭐?”
티르가 윽박지르자 나우사는 고개를 들어 저편의 건물 한 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피아를 구하려면 넬하크를 쓰러트려야 할 겁니다. 당신이 할 수 있을는지…….”
“넬하크?”
나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티르는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넬하크 놈이라면 환영이다. 안 그래도 그 미친 마법사는 박살 내려고 그랬었으니까. 어디지? 놈이 세피아를 데려간 데가?”
나우사는 대답 대신 시선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시선이 향한 곳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티르는 나우사의 멱살을 놓고는 곧바로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원은 공방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인데다 검은 로브를 입은 덕분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건물까지 갈 수 있었다.
티르가 무사히 건물에 들어가자 나우사는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티르를 대할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안색으로 보였는데 지금 나우사의 미간 사이엔 깊은 세로 주름이 패여 있었다.
“나우사 님?”
나우사가 화가 났다고 지레짐작한 하스크가 움츠러들어서 한 발자국 물러서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나우사가 옆구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
처음 보는 나우사의 약한 모습에 딜크뿐 아니라 하스크마저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나우사의 눈치를 살피던 하스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혹시 넬하크와 싸우셨습니까?”
나우사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야 약간 숨이 가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넬하크가 아니라 웬 여자였습니다.”
“예?”
나우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티르가 들어간 건물을 쳐다봤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야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하스크, 딜크. 약속 내용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티르가 넬하크를 묶어 두는 동안 마법진 파괴에 주력해야겠습니다.”
* * *
티르는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세피아를 찾았다.
과감한 방법인 듯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폭음이 터지는 등 소란스러워서 티르의 목소리는 금방 묻혔던 것이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티르는 으슥한 곳에서 기다리다가 흑마법사 하나를 잡아채자 일단 아랫배부터 한 방 갈겼다.
“왜, 커억!”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흑마법사는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티르는 주저앉으려는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는 소리쳤다.
“세피아는 어디 있냐?”
“무슨?”
“주황색 머리 여자애!”
티르가 흑마법사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소리쳤다.
그 기세에 이제 겨우 스물이 된 듯 보이는 흑마법사 녀석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사, 삼층에 오른쪽 복도 끝으로 가면 여자애들 머무르는 방이……”
“삼층 오른쪽 복도 끝?”
흑마법사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흑마법사의 몸을 뒤져서 단도 한 자루를 빼앗아서는 그대로 계단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