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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3화)
제5화. 포식자 (3)


계단을 세 칸씩, 네 칸씩 뛰어올라 순식간에 3층까지 올라왔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티르는 오른편으로 돌아 전력으로 달렸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세피아!”
그러나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침대, 탁자, 서가 등 가구만 휑하니 있었다.
“젠장, 어디로?”
그때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티르는 곧바로 달려가서 창밖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 세피아가 보였다. 세피아가 웬 검은 로브 여자와 칸엘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세피아!”
티르의 외침에 세피아가 뒤돌아보았다.
“티르?!”
세피아가 몸을 틀었지만 검은 로브 여자의 팔을 뿌리치진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갈 테니.”
티르가 뛰어내리려고 창틀에 다리를 올리는데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위험을 감지하고 옆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화염 덩어리가 벽을 때렸다.
콰아아앙!
벽이 무너지며 불꽃과 벽돌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큭!”
직격을 피하긴 했지만 충격에 휘말린 바람에 3층 높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쿨록, 쿨록.”
무너진 벽돌 더미 속에서 티르가 몸을 일으키는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티르!”
고작 10브람 정도 남짓한 앞에 세피아가 검은 로브 여자에게 붙잡혀 있었다.
“세피아. 지금 구하러 갈 테니까 조금만…….”
그러나 채 두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3층에서 누군가 뛰어내려 티르의 앞을 막았다.
가로막은 이는 커다란 덩치에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무릎을 구부리며 착지한 그가 천천히 일어서며 고개를 들었다.
거구의 정체는 넬하크였다. 아마 3층에서 파이어볼로 기습한 이도 넬하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다음이었다. 세피아를 붙잡고 있던 검은 로브 여자가 부르자 넬하크가 머리를 조아린 것이었다.
목소리를 들어선 기껏해야 세피아와 동갑이거나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소녀일 터.
그런데도 넬하크가 저 정도로 예를 갖추는 것이다. 적이 바로 앞에 있는 상황인데도.
넬하크나 칸엘을 이곳의 대장으로 알고 있던 티르로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검은 로브 여자가 담장에 손바닥을 대는 모양새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감이 적중했다.
손바닥이 닿은 벽면이 녹색으로 점멸하더니 타원형의 구멍이 뚫렸다.
“뒤처리는 확실히 하도록.”
“알겠습니다.”
검은 로브 여자는 한마디 남기고는 칸엘과 함께 세피아를 데리고 타원형 통로를 넘어갔다.
“세피아!”
티르는 쫓아가려 했지만 넬하크가 가로막는 바람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넬하크가 소매를 가볍게 떨치자 가볍게 쥔 주먹의 손가락 사이로 실험 때 보았던 단도가 튀어나왔다.
두건에 여러 자루의 단도. 마법사라기보다 암살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넬하크가 스산한 웃음을 흘리더니 돌연 티르를 향해 덮쳐 왔다. 순식간에 수 브람을 가로지르며 넬하크가 팔을 휘둘렀다.
세 자루 단도가 은빛을 번뜩거리며 날았지만 티르가 옆으로 구르자 단도는 허공을 빗겨 갔다.
티르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단도를 뽑으며 넬하크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고작 두어 걸음 거리에서 티르와 넬하크가 서로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넬하크의 왼손이 먼저 티르의 목을 노렸지만 베이기 직전 티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몸을 숙이며 피한 것이었다.
파앗―
티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간 비어 있는 넬하크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쳤다.
서걱하는 느낌. 제대로 벤 손맛이었다. 넬하크의 옆구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넬하크는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아픈 내색조차 없이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O‘ryrihc.”
넬하크가 작게 중얼거리자 기적처럼 출혈이 점차 멎어 들었다.
‘젠장.’
티르로선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승기를 잡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순간에도 세피아는 잡혀가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하앗!”
다시 힘껏 땅을 박찼다. 넬하크가 조금이라도 덜 회복되었을 때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넬하크는 빳빳하게 선 채 티르를 향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세 자루의 단도가 은빛을 번뜩이며 날아왔지만 티르는 몸을 한쪽으로 비틀며 피했다. 넬하크가 조준을 잘못한 건지 원래부터 궤도가 어긋나 있어서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됐다!’
단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착각이었을까? 넬하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Kap cos azmirg.”
이어지는 넬하크의 영창.
순간 땅바닥에 박혔던 세 자루 단도의 은빛 날이 거무튀튀한 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그림자와 발바닥 사이에 검고 끈끈한 무언가가 늘어지면서 다리를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티르는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뭐야, 이거?’
땅바닥에서 다리를 떼려 했지만 발바닥은 지면에 붙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그사이 넬하크가 소매를 휘두르자 어느새 양손에 다시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티르가 단도를 휘둘렀지만 넬하크는 뒤로 물러서며 가볍게 피하곤 단도를 던졌다.
푸푸푹!
“크윽!”
세 자루의 단도가 티르의 허벅지에 박혔다가 주문을 외자 넬하크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파핫―!
허벅지에서 세 줄기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흐아악!”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 넬하크는 웃으며 다시 단도를 뿌렸다.
얼굴로 날아오는 건 간신히 피해 스치는 정도에 그쳤지만 어깨와 팔뚝에 단도가 박혔다. 어깨와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티르는 단도마저 놓치고 말았다. 손을 뻗어 단도를 다시 쥐려고 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줄이 끊겼나?’
억지로라도 다시 단도를 주우려 했지만 그 순간 넬하크가 주먹이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퍼억―!
이마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핏물이 튀며 넬하크의 로브에 묻자 흰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좀 있으면 멜리사 님을 다시 봬야 하는데 옷이 더러워졌잖아!”
넬하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발을 들었다 내리찍었다. 부츠의 굽에 뒤통수를 찍히며 티르의 이마가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다.
“크윽!”
그것만으론 분이 안 풀리는지 넬하크는 티르의 뒤통수와 어깨를 무차별적으로 짓밟았다.
“더러운 실험체 자식이!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불어 대기나 하고 말이야!”
티르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기만 했다. 역전시키기 위해선 반격을 해야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출혈이 심해지면서 의식을 잃지 않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그나마 지금 억지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건 세피아 때문이었다.
세피아의 얼굴을 생각하며 남은 힘을 모두 짜내서 왼손을 움직였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단도를 향해 티르의 왼손이 조금씩 다가갔다.
‘기회는 한 번이다.’
왼손이 마침내 단도에 닿았다.
그러니 넬하크가 그 모양을 보고는 티르의 왼손을 짓밟았다.
뿌드득!
“아직도 포길 안 했나? 하기야 그러니까 실험에도 살았겠지만.”
넬하크가 발을 높이 들더니 티르의 머리통을 내리밟았다.
뿌드득.
“하지만 이번에는 죽어 줘야겠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던 티르의 머리통이 다시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두 개나 부러졌지만 그래도 티르는 단도를 잡았다.
넬하크의 발길질이 등과 머리통을 짓밟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서 억지로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걸로 찌르겠다고?”
소리치며 넬하크가 티르의 어깨를 짓밟았다.
티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발길질을 버텨 내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넬하크가 움찔 놀라자 티르는 이를 꽉 문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을 베는 건 칼이 아니라…….”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낀 건지 넬하크가 뒷걸음질 치려 하는 순간 티르가 소리쳤다.
“내 피다!”
외침과 함께 단도가 선을 그었다.
그러나 벤 것은 넬하크가 아니라 티르 자신이었다. 스스로 손목을 그어 버린 것이었다.
푸아아아앗!
이어 티르는 손목을 휘둘렀고 독기를 품은 검은 핏줄기가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동시에 넬하크가 땅을 박차고 물러서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 버린 것이었다.
‘아…….’
고개를 들 기력조차 없어진 티르는 무릎을 꿇은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간신히 숨을 내쉬는데 넬하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땅바닥을 짚고 있는 손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넬하크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끝인가.’
티르는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넬하크를 노려보려는 것이었다.
한데 고개를 들었을 때 티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지막 공격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몇 걸음 앞에서 우뚝 서 있는 넬하크가 검은 피를 흥건하게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로브에서 흰 연기가 올라오고 넬하크의 얼굴 반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죽일 노오…….”
넬하크가 앞으로 한 걸음 디디기 위해 발을 뗐지만 다시 내딛지 못했다.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면서 땅바닥에 처박혔다.
쿠웅.
전신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기 속에서 넬하크는 더 이상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이겼나.”
티르는 왼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티르 역시 그대로 무너지면서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던 것이었다.
‘젠장,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나 생각일 뿐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피아…….’
힘겹게 한마디를 중얼거린 후에 티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제6화. 제안 (1)


체스판처럼 검정과 하양이 교차하는 대리석 바닥은 윤기 있게 빛났다.
나우사는 열주가 늘어선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보니 품이 넓은 옷을 입은 소녀가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하이포아 님?”
“이제야 찾았네.”
하이포아라고 불린 소녀는 걸음을 옮겨 나우사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으으응, 괜찮아. 사제 회의에서 나우사를 호출했었잖아.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다고 들었는데. 다친 데는 괜찮아?”
“예, 카멜 님이 치료해 주셔서 완치됐습니다.”
“다행이네.”
하이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다친 거 회의에선 사고 때문이었다고 그랬지만 사실은 아니지?”
“예.”
나우사가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