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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4화)
제6화. 제안 (2)
“마탑 안에 웬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 본 여자였는데 넬하크보다 강하더군요. 만약 그녀가 끝까지 절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마 지금 여기 있지 못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
하이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의 때 보고하지 않았던 건 그 여자도 그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예.”
“의외의 성과네.”
하이포아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외에는 별 다른 거 없었어? 넬하크나 칸엘에 대한 거라거나 아니면 그날 공방에 관한 거?”
“하스크와 딜크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곳 실험 결과 각각 괴력과 자연치유능력을 얻게 된 자들인데 마지막에 저를 돕는 대가로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기에 풀어 주었습니다.”
“순전히 약속의 대가 때문에?”
하이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나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능력이 성당에 구속되어 있지 않는 편이 저희에겐 더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었습니다. 지금쯤 유니케 님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역시 그랬구나.”
문득 무슨 생각이 든 건지 하이포아가 나우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혹시 티르라는 사람 알아?”
“티르…… 말입니까?”
티르의 이름이 나오자 나우사의 표정에 놀람의 기색이 스쳤다.
“아는가 보네.”
“예.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부상을 입은 탓에 넬하크를 제압하는 게 힘들게 돼서 어쩔 수 없이 넬하크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해 이용했던 자입니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죽은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반응에 하이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 살아 있는데?”
“예?”
“우리 쪽 사제들이 거의 죽기 직전 상태에서 발견했다던데. 그 옆에 넬하크로 짐작되는 녀석도 죽은 채로 발견됐고.”
하이포아의 말에 나우사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넬하크를 죽였단 말입니까?”
“정황상으론 그렇겠지.”
하이포아의 말에 나우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예기치 못한 강적을 만나서 부상을 입은 탓에 자신이 직접 넬하크를 제압하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상태였다.
때문에 티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희생시켜서 넬하크의 발을 묶어 두고 자신은 하스크와 딜크를 이용해 마법진의 파괴에 주력했다.
덕분에 마법진을 다 파괴할 때까지 넬하크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게 티르가 넬하크를 이겼기 때문이었다니.
“나우사?”
“예.”
하이포아가 부르고서야 나우사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그 티르라는 애한테 가 볼 건데. 어떡할래? 같이 가 볼래?”
나우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가겠습니다.”
* * *
울타리가 둘러친 공간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다. 둘레를 따라 걸으면 대략 마흔 걸음 정도에 완전히 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좁은 공간 안에 조그만 집이 한 채가 있고 마당엔 잡초만 무성했다.
티르는 잡초를 깔아뭉개고 앉은 채 울타리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기엔 늙은 사제 하나가 나무 밑동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이, 이보세요. 진짜 제 말 모른 척할 겁니까? 이보세요.”
티르가 소리쳤지만 사제는 느릿하게 책장을 넘길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아. 하필 귀머거리라니.”
티르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울타리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 판때기로 얼기설기 이어 놓은 울타리는 겉보기엔 허술해 보였지만 티르는 울타리를 빤히 쳐다볼 뿐 넘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쳐다보고 있은 후에야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움직였다.
파짓!
하지만 티르의 손이 울타리를 넘어가려는 순간 푸른 벽이 번쩍거리며 손을 튕겨 냈다. 짜릿한 충격을 느끼며 티르는 급히 손을 뺐다.
“역시 안 되나.”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울타리가 위치한 곳은 산의 중턱이어서 아래쪽으로 성당과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그뿐.
마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일정적인 선을 넘으면 그대로 튕겨 내는 울타리 때문에 티르는 좁은 공간 안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울타리 밖에 앉아 있는 늙은 사제와 말이라도 통하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오히려 답답함만 가증되었다.
“하아, 미치겠다, 진짜!”
그대로 잡초 위로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세피아도 무사히 구해졌겠지.”
푸른 하늘에 세피아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제발 살아서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사락.
그렇게 상념에 젖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때 풀 밟는 소리가 들렸다. 티르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녕하세요, 티르 씨라고 불러도 되죠?”
품이 넓은 푸른색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사제복 여자의 뒤에는 은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티르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은발 여자는 바로 나우사였다.
“나우사!”
“살아 있었군요.”
나우사가 목례를 하며 인사했지만 티르는 인사보다는 일단 다그쳐 물었다.
“세피아는? 세피아도 무사히 구해진 거지?”
“…….”
하지만 나우사는 답이 없었다.
“구했지? 응?”
“…….”
“구했잖아? 대답을 해 보라고. 구했다고 말하라고!”
티르가 재차 묻자 그제야 나우사는 편치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죄송합니다.”
“죄송?”
드디어 나온 대답.
하지만 티르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나우사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뭐가? 뭐가 죄송하단 건데?”
“…….”
“아니잖아. 그렇게 잘난 척했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건데?”
나우사의 어깨를 움켜진 티르의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나우사는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 건지 가만히 있었지만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서 안색이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티르의 반응이 점점 더 격해지자 결국 사제 복장의 소녀가 말리며 말했다.
“티르 씨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세피아란 아이에 대해선 저희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제가 보고 들은 정보대로라면 나우사만 탓할 것도 아니에요.”
티르는 자신의 손목에 얹혀 있는 하얀 손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제 복장의 소녀가 티 없이 깨끗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피아가 순수한 맑음이라면 이 소녀는 고결하게 맑은 느낌인데 왠지 모를 기품이 있어 티르는 계속 성질을 내기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훌훌 털어 버리기엔 감정의 골은 너무나 깊었다.
망설이는 사이 소녀는 티르의 양손으로 티르의 손을 잡아 나우사의 어깨에서 조심스럽게 떼어 내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전 이곳 렘피카 성당의 대사제인 하이포아라고 해요. 며칠 전 마탑을 공격한 것도 저희 성당의 소관이었고요.”
티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더 변명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빛, 일종의 항의 표시인 셈이었다.
“저흰 부당하게 구금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어요. 그 일을 위해 나우사는 자기 목숨을 걸고 무려 1년을 잠입해 있었고,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냈어요.”
“하지만 세피아는 구하지 못했어.”
티르가 항변하자 뜻밖에 소녀가 강경한 어조로 바로 반박했다.
“아니오. 세피아를 구하지 못한 건 당신이죠.”
“뭐?”
“나우사는 넬하크를 놓쳤어요. 하지만 그녀는 작전을 변경해서 결국 마탑의 방어진을 뚫는데 성공했죠. 그 뒤로 넬하크를 쫓은 건 당신이고요. 그렇지 않아요? 제 추측대로라면 세피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나우사가 아니라 당신이었을 거예요.”
소녀는 잠시 침묵하다 덧붙였다.
“아님 당신은 자신이 실패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인가요?”
소녀의 말에 티르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세피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자신이니까.
반박할 말이 없어 주춤하는 사이 소녀는 결정적으로 말을 더 보탰다.
“세피아를 구할 찬스가 있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약해서 그 아일 구하지 못한 걸 나우사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 부당하지 않나요?”
“…….”
이번에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그때 자신이 세피아를 구하지 못한 건 자신이 약해서다.
자신이 강했다면 넬하크를 쓰러트리고 계속 추적해서 세피아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젠장.”
티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넬하크나 나우사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강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조였다.
티르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들어 나우사를 쳐다봤다.
“그래, 맞아. 세피아를 잃은 건 내가 약한 탓이지. 네가 세피아를 구한다는 건 약속에 포함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미안하다.”
나우사는 언제나 그렇듯 무반응이었다.
티르는 나우사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하이포아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할 거다. 그러니 이만 날 내보내 줘.”
“그건 안 됩니다.”
나우사가 소리치는 동시에 하이포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어쩔 수 없이 나우사는 침묵했고 티르와 하이포아만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사아아아―
산들바람을 따라 구름만 흐르는 가운데 하이포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렌리 사제님.”
귀머거리인 줄 알았는데 하이포아의 부름을 듣자 울타리 밖의 늙은 사제가 시선을 돌렸다.
늙은 사제와 나우사 둘 다 설마 하는 표정인 가운데 마침내 하이포아의 명령이 떨어졌다.
“결계를 풀어요.”
“하이포아 님!”
나우사가 강한 항의를 표했지만 하이포아는 뜻을 거둘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서요.”
하이포아가 재차 명령하자 늙은 사제는 어쩔 수 없이 손바닥을 땅에 대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반구형으로 푸른빛이 선명해졌다가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 정말 결계가 해제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푸른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하이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계는 해제됐어요.”
설마 이렇게 쉽게 결계를 해제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오히려 당황한 티르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보아하니 나우사나 결계를 펼친 사제는 자신을 풀어 주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떠날 수 있을 때 이곳을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