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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5화)
제6화. 제안 (3)
“이만 가 보도록 하지.”
티르는 간단히 목례를 하곤 돌아섰다.
한데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뒤에서 하이포아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고 해도 당신 혼자선 절대로 세피아를 구할 수 없을 거예요. 세피아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나요? 세피아를 데려간 자들이 누군지는? 그전에 당신과 세피아가 갇혀 있던 곳이 어디쯤 있는 곳인지도 모르지 않아요?”
그 말에 티르는 자신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무지하다. 어디서부터 세피아를 찾아야 할지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했다.
허탈감에 망연히 하늘을 보고 서 있자 하이포아가 뒤로 다가왔다.
“우린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당신도 우릴 도울 수 있을 테고요. 가려면 가셔도 되지만 그래도 전 당신과 이야길 한 번 나눠 보고 싶어요.”
하이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티르의 정면에 서더니 생긋 웃으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만 시간 내주실래요?”
* * *
하이포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아마 성당의 응접실쯤 되는 곳인 모양이었다.
넓긴 하지만 화려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가구에 손때가 묻어 있고 남향인 창문으로 햇살이 넉넉히 비추는 것이 아늑한 맛이 있었다.
티르는 아무 말없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기품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녀는 바로 대사제 하이포아였다.
티르는 하이포아가 뭔가 말을 하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차를 홀짝이고는 그 맛을 음미하는 듯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하이포아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거 아세요? 여기 앉아서 가만히 차 맛을 음미하고 있으면 그쪽 자리에 앉은 분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어요.”
티르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포아는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고는 생긋 웃으며 비스킷 하나를 집어 들었다.
“티르 씨하고 마주 앉아 있으면서는 큰 강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 넓고 깊어서 마치 호수처럼 잔잔해 보이는 강이요.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힘이나 흐름 같은 게 느껴지죠.”
티르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에 대한 설교는 흥미 없습니다. 본론을 말하시죠. 세피아에 대한 정보를 주는 대가로 제가 당신들을 위해 싸우길 원하는 겁니까?”
“대가요?”
하이포아는 씁쓸히 웃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용병의 일이죠. 하지만 제가 당신께 제공하고 싶은 건 그런 거래가 아니에요. 전 세피아를 돕고 싶은 것일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도요. 지금 당신 몸이 어떤 상태인 줄은 알고 계시겠죠?”
몸 상태란 건 아마도 실험으로 인해 독을 뿜게 된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티르는 하이포아를 노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했다.
“그 몸은 위험해요. 그자들의 실험체가 된 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특히 티르 당신은 더요. 지금 당신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론 능력이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당신 자신마저 해치게 될 거에요.”
“그래서 내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다만…….”
하이포아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망설였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다만 저희가 그 힘을 다스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당신은 그 힘으로 넬하크 같은 자들을 단죄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단순히 거래 같은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요.”
“정의?”
하이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가만히 하이포아를 응시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심지어 유치하게마저 들릴 법한 말이었지만 하이포아의 표정에선 그 순수한 진심이 느껴졌다.
하나 그 진심 어린 표정에 감화되어 판단을 내릴 정도로 티르는 무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포장이 다르다 뿐이지 그녀는 자신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능력, 아직 미숙한데도 넬하크를 쓰러트릴 정도니 탐낼만도 하겠지. 나도 이들의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고.’
사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답은 나와 있었다. 오히려 세피아를 잡아간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주는 조건이라면 자신이 먼저 나서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태 혼자 살아온 티르였다. 조직에 속한다는 것. 그것이 혹여 세피아를 찾는데 자신을 속박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더군다나 신앙과 관계된 조직이라면? 엄격하고 신실하기를 생명으로 여기는 그들의 하나로 속하게 되었을 때 혹시 세피아를 구하기는커녕 그들의 대의를 위해 희생만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건 절대 사양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세피아에 대한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이 이들밖에 없어. 뭣보다 가장 확실한 정보이고.’
티르는 고민하며 하이포아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나우사를 슬쩍 쳐다봤다. 감옥에서 자신을 제압하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들이라면 실력도 최고니까. 결국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던 건가.’
티르는 쓰게 웃었다.
이러한 티르의 표정에서 뭔가를 짐작한 건지 하이포아는 일어나며 말했다.
“대충 마음은 정하신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결정하실 필욘 없어요. 머무시면서 하루 동안 생각해 보시고 내일 답을 주세요.”
하이포아는 티르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곤 방에서 나갔다.
나우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더 남아 있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이포아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티르는 시선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쫓다가 이내 방에 홀로 남게 되자 쓰게 웃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을……. 세피아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악마나 혹은 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함께할 테니까.’
제7화. 새로운 시작 (1)
길이 꽤 험한지 마차가 덜컹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승차감이 별로란 이야긴 아니었다. 오히려 덜컹거릴수록 티르는 이 고급 마차의 쿠션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밖을 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일부로 그런 것이라 커튼을 젖힐 수도 없었다.
해서 오랜 시간 가는 동안 티르가 한 일이라곤 쿠션에 기대고 잠을 자거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도 몇 시간이나 하고 나니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
티르는 맞은편에 앉은 나우사를 쳐다봤다.
처음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른 자세에 눈은 지그시 감고서 한 치도 흔들림이 없는 모습. 그야말로 인내심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티르는 내심 감탄하는 한편 나우사의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렘피카 성당의 대사제인 하이포아가 서류를 들춰 보고 있었다.
하이포아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뒤늦게 시선을 의식하곤 생긋 웃었다.
“한 번 볼래요? 당신과 관련된 서륜데?”
“나하고?”
티르가 혼자 중얼거린 소릴 들었는지 하이포아가 고개를 끄덕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공식적으로 당신을 사망 처리한 서류에요. 원래 이쪽으로 투신하는 분들 대부분이 사망한 걸로 서류 작업을 해 두긴 하지만 특히 티르 씨의 경우에는 마탑에서 실험체였던 만큼 사망처릴 하지 않고선 몸을 빼낼 수가 없었거든요.”
“죽었다라…….”
티르는 중얼거리며 서류를 들춰 보았다.
사냥꾼이긴 하지만 틈틈이 글을 배워 뒀던지라 어설프게나마 읽을 순 있었다.
렘피카 성당에 구금하고 있던 중 체내의 독이 발작을 일으켜 죽었단 내용이었다.
시체는 독에 녹아내려 남아 있지 않았다고.
티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이포아에게 서류를 도로 건네주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걸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떳떳한 조직은 아닌가 보군요.”
“음지에서 하는 일이라고 정의를 위한 일이 악이 되는 건 아니에요. 물론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유니케 님이나 나우사의 말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수단이라고 하더군요.”
‘유니케?’
처음 듣는 이름이다. 티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차가 점점 느려지더니 멈추어 섰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 나우사와 하이포아가 먼저 내리고 티르는 마지막으로 내렸다.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장벽처럼 둘러쳐 있는 울창한 산림이었다.
‘또 숲인가.’
그 녹색의 장벽 가운데에 넓은 터가 있고 조촐한 건물 몇 동이 있는 것이 넬하크의 마탑과 언뜻 비슷하단 느낌이 있었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곳은 왠지 절도 같은 것이 느껴진단 점이었다.
‘훈련소 같은 곳인 모양이군.’
티르가 둘러보며 중얼거리는데 그때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코트형 남색 제복을 걸친 중년 남자가 반가운 기색으로 나우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나우사. 하이포아 님도 같이 오셨군요. 시찰하러 오셨습니까? 하하하.”
“그런 것도 있구요.”
하이포아는 중년 남자의 말을 가볍게 받고는 티르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편지로 말씀드렸던 바로 그 사람이에요.”
“티르란 친구 말이군요.”
중년 남자는 고개를 돌려 티르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기가 어딘진 알고 있나?”
“저 사제님 말씀으론 음지라더군요.”
“음지? 훗, 그렇긴 하지.”
중년 남자는 다시 한 번 티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뒤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바로 훈련에 넣는다. 뭘 해야 하는지 설명할 필요 없겠지, 에넬?”
“물론입니다.”
중년 남자의 비서, 에넬은 고개를 끄덕하고는 티르에게 다가왔다. 에넬이 따라오라고 하자 티르는 하이포아와 나우사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이포아는 뭔가 느꼈는지 웃으며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예요. 당신이 집행자가 된다면 세피아와 그들을 잡아간 이들에 대해 정보를 드릴게요. 대신 당신도 반드시 훈련 과정을 버텨 주세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믿겠습니다.”
티르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에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에넬과 티르가 저만치 멀어지자 하이포아가 고개를 돌려 중년 남자를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세워 두실 거예요?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잔 주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