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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6화)
제7화. 새로운 시작 (2)
티르는 에넬을 따라 창고로 들어왔다.
창고엔 에넬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코트형 남색 제복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다른 한편엔 같은 색의 셔츠나 가죽 바지 등도 보였다.
잡동사니 속에서 에넬은 셔츠와 바지, 코트 등을 대충 고르더니 티르에게 내밀었다.
“입으세요. 나머지 장비는 입고 계시는 동안 찾아 드릴게요.”
티르는 에넬에게 옷을 받아 하나씩 갈아입기 시작했다. 바지나 코트는 내구도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은 상당히 꺼끌꺼끌했다.
마침 부츠와 허리띠 등을 찾아서 가져온 에넬은 그런 눈치를 챘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잘 적응 안 되실 거예요. 하지만 그런 옷이 아니면 얼마 못 가서 다 해지거든요. 여기 허리띠랑 부츠요. 장갑은 좀 더 찾아볼게요.”
에넬이 다시 잡동사니를 뒤적거리는 동안 티르는 부츠를 신고 허리띠를 맸다.
팔다리를 움직여 보니 천이 거칠긴 해도 움직이는 데는 상당히 편리했다. 전에 누가 입던 건지 코트는 물론 바지와 부츠에도 흙먼지가 잔뜩 묻긴 했지만 티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여전히 잡동사니를 뒤적거리고 있는 에넬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까 그분이 여기서 제일 높은 분인 것 같더군요. 당신은 그분의 비서쯤 되는 것 같고.”
“유니케 님이요?”
하이포아가 유니케라고 말했었는데 아까 그 중년 남자의 이름이 유니케인 모양이었다.
티르가 속으로 중년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유니케란 이름을 되뇌는 사이 에넬은 이어서 말했다.
“훈련소 소장님이시죠. 전 유니케 님의 비서고요. 집행자셨을 땐 엄청 날리셨다는 소문이 있는데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셔서 여기로 온 모양이시더라고요. 아마 그 일이 아니었으면 여기가 아니라 정식 훈련소의 소장님으로 가셨을 거래요.”
“정식 훈련소? 그럼 여긴 정식이 아니란…….”
“여긴 예비 훈련소죠. 정식으로 집행자가 되려면 여기서 우수한 성적을 받거나 아니면 보조 집행자로 활동하면서 공을 좀 쌓아야 할 걸요. 뭐 대부분은 그전에 죽는 형편이지만. 아, 찾았다.”
‘예비 훈련소라.’
잡동사니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결국 에넬이 가죽 장갑 한 켤레를 들이밀었다.
코트나 바지와 마찬가지로 까칠한 느낌이었지만 질긴 거 하난 진짜였다.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자 에넬은 창고를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기 훈련 만만하게 보면 안 돼요.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좀 드센 사람들이 많다 보니 교관님들이 좀 엄하거든요. 어차피 좀 있으면 보게 되겠지만…….”
창고를 나와 어디론가 데려가면서도 에넬은 훈련은 어떻고 교관은 어떠한지 등을 설명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티르는 에넬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면서 그 뒤를 따라 숲을 가로질렀다.
* * *
달칵.
컵이며 받침대 역시 나무여서 그런지 내려놓을 때 소리가 둔탁했다. 게다가 차 맛도 꽤나 썼는지 하이포아의 얼굴엔 씁쓸한 것도 생글거리는 것도 아닌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언제 맛봐도 여기 차 맛은 정말 독특하네요. 유니케 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존경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전 차를 마시지 않거든요. 대신 술을 마시지.”
중년 남자, 유니케가 씨익 웃으며 찬장 안에 있던 럼주 한 병을 꺼냈다.
“하이포아 님은 높으신 분이니 당연히 안 되고, 나우사 너도 안 마실 거지? 아, 그렇다고 나한테까지 마시지 말라거나 잔소리는 말아.”
유니케는 커다란 나무잔에 럼주를 콸콸 따르더니 하이포아와 나우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무잔을 직각으로 세우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한두 번 마셔 본 솜씨가 아니었다.
“크흐, 좋다. 이 맛에 버티는 거지. 그건 그렇고 하이포아 님이 직접 찾아오다니 꽤 의욉니다. 저번에 딜크랑 하스크란 녀석을 맡겼을 땐 오지 않았는데?”
“딜크랑 하스크를 보낸 건 제가 아니라 나우사였어요. 정확히 말해선 성당에서 그들을 발견하기 전에 빼돌린 거긴 하지만…….”
“하지만 이번엔 손수 빼돌리셨지요. 렘피카 성당의 대사제인 하이포아 님이 직접.”
유니케의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에 하이포아는 엷은 미소로 받았다.
“대사제이기도 하지만 교단이 내린 더 막중한 임무가 있으니까요.”
“그래, 하이포아 님은 심판집행위원회의 위원님이셨지. 그래서 더 궁금하단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열두 분밖에 되지 않는 위원 가운데 한 명이신데 굳이 어중이떠중이나 오는 예비 훈련소에 올 필욘 없잖아요. 시찰을 가도 정식 훈련소에 가지.”
유니케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곤 다시 럼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우사와 하이포아가 말이 없자 유니케는 씁쓸한 웃음을 띠더니 넌지시 물었다.
“아까 그 티르란 녀석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강한 사람이니까요.”
“넬하큰지 뭔지 하는 녀석을 죽였단 소식은 나도 듣긴 했지만…….”
“그리고 신념이 강한 사람이에요. 우리 편이 되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여기 오는 놈들은 전부 다 그렇습니다. 신념이 강하다고도 하고 고집이 세다고도 하고 말을 죽어라 안 듣는다고도 하고요. 다른 표현은 감히 대사제님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 자제하기로 하죠.”
“그런 거랑은 달라요.”
“아무려면.”
유니케는 어깨를 으쓱하곤 나무잔에 다시 럼주를 따랐다.
하이포아가 약간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던 나우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티르 그 한 사람 때문은 아닙니다. 위에선 딜크나 하스크에게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니까요.”
“높은 분들 사랑을 받고 있으면 정식 훈련소로 데려가서 정식 집행자로 키우시지 뭘 번거롭게 이쪽으로 보내실까. 윗분들은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하이포아 님은 빼고.”
“능력이 바로 실력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뭣보다 검증할 필요가 있기도 하고요.”
“그 녀석들을 안 믿는군.”
유니케가 럼주를 들이키며 피식 웃었다.
나우사는 그런 유니케를 쳐다보며 침묵하다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봉랍이 찍힌 검은색 봉투였다.
유니케는 봉랍에 찍힌 문장과 봉투의 검은색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듯 나우사를 쳐다봤다.
“집행 명령…… 나한테 내려온 명령이냐?”
“아뇨. 제게 내려온 명령입니다. 정확히는 제가 청해서 받아 낸 명령입니다.”
“청해?”
유니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나우사는 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당분간 여기 훈련소에 교관으로 임관할 겁니다.”
“교관?”
유니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자 나우사는 봉투의 내용물을 유니케에게 건네주었다.
따로 적혀 있진 않지만 정식 집행자에게 있어 허락된 조치가 살인까지 허가된 것임을 유니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펴보고 적의 첩자면 네 손으로 죽인다는 거군. 아니라면 훈련시켜서 높으신 분들의 개로 키워 보겠다는 거고. 아, 하이포아 님 미안.”
“말 좀 가려요.”
하이포아가 핀잔을 주었지만 유니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겨우 이런 일 때문에 널 보내다니. 젊은 세대에선 최고로 불리던 나우사도 슬슬 이름값 못하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면 뻣뻣하게 굴더니 결국 너도 윗분들께 미움받는 건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적 없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얼마 전에 입은 부상이 생각보다 깊어서 요양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부상?”
부상이란 말에 유니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여유롭던 태도에 비해 지금은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우사 너한테 요양을 해야 될 정도의 부상을 입혔다고?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만…… 뭐 아무튼 본론은 앞으로 네가 내 부하로 들어온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나우사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하자 유니케는 피식 웃었다.
“흐흐, 애송이놈들 고생 꽤나 하겠어.”
* * *
숲은 굉장히 울창했다.
마치 사방에서 높이 뻗은 거목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사냥꾼 출신인 티르였기에 이러한 숲의 거대함이 더 민감하게 느껴졌고 왠지 모르게 등이 서늘해지며 약간 오싹한 느낌도 있었다.
그렇게 에넬을 따라 한참 동안 가다 보니 어렴풋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언뜻 비명 소리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 기합에 가까웠다.
“거의 다 왔어요. 소리 들리시죠? 라임락 교관님이 훈련생들에게 격투술을 가르치는 소리예요. 제일 엄하신 교관님이라 훈련생들도 열심이죠.”
에넬이 웃으며 말했다.
티르는 에넬에게 뭔가를 더 물어볼까 싶었지만 순간 생각을 바꾸었다.
가만히 있어도 쉬지 않는 저 입에 말 한 번 잘못 걸었다간 얼마나 더 많은 말을 토해 낼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에넬이 혼자서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가자 산림 가운데 넓은 터가 드러났는데 낡은 제복을 입은 삼십여 명 훈련생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대련을 하고 있었다.
티르는 에넬이 말한 교관을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남쪽 대륙 출신인지 시커먼 피부에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훈련생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있던 것이다.
막 고함을 지르며 훈련생 하나를 넘어뜨리는 찰나에 티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단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순간 전신이 화끈하며 뜨거운 불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시커먼 교관 또한 티르가 버티고 선 것이 의외였는지 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곤 훈련생들을 밀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뭐냐?”
교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묻자 에넬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소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신병이라고…… 이름은 티르고 오늘부터 바로 훈련에 넣으라고 하셔서.”
“신병?”
교관, 라임락은 티르를 뚫어져라 보는 채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가 봐.”
“네? 하지만 소장님이…….”
“이 자식 말고 너 가 보라고, 너! 아니면 너도 훈련받을 거냐?”
“예? 예! 알겠습니다.”
라임락이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그제야 에넬은 기겁을 하며 내뺐다.
이제 남은 건 티르뿐이었다.
라임락은 고개를 돌려 티르를 노려보더니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걸 버티다니. 제법이군. 어디서 꽤나 날렸던 모양이지?”
“…….”
티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라임락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가 꽤 날렸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대개 그렇지. 입 처다물고 무게 잡는 거. 하지만 이제 잊는 게 좋을 거다. 여기서 넌 쓰레기 중 하나일 뿐이니까.”
“두고 보면 알 겁니다.”
막 돌아서던 라임락은 티르의 말을 듣고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티르를 다시 쳐다봤다.
얼굴 근육이 움찔하는 듯 기괴한 웃음을 짓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그만! 루시안! 루시안 있나?!”
훈련생들이 대련을 멈추고 라임락을 쳐다보는 가운데 누군가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며 나온 청년은 체구가 적당히 건장하고 머리칼이 금발이었다.
거친 생활을 꽤 했는지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피부가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귀족 같은 느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