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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7화)
제7화. 새로운 시작 (3)


“네가 4조에서 개인 격투술이 가장 세다지?”
“4조에선 그렇습니다.”
“그래?”
라임락은 루시안이라 불린 금발 청년의 어깨를 붙잡아 홱 돌리더니 거친 동작으로 등을 떠밀어 티르와 마주 서게 하며 소리쳤다.
“신병이다. 대련해라. 저놈을 못 쓰러트리면 오늘 4조는 저녁 없다.”
훈련병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다가 교관이 내던진 뜻밖의 선포를 듣고는 불만 어린 목소리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했는지는 몰라도 루시안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 혹은 격려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티르를 향해선 야유를 퍼부어 댔다.
티르는 양옆으로 훈련생들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면에 서 있는 금발 청년을 쳐다봤다. 루시안이란 이름의 금발 청년은 어느새 두 주먹을 가슴께에 올리고 싸울 자세를 잡고 있었다.
“초면인데 험하게 인사를 나누게 됐네. 험한 꼴 봐도 악감정은 없으니까 미워하진 말라고. 애들이 밥 못 먹으면 눈이 뒤집히거든. 하압!”
루시안은 자기 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땅을 박차며 주먹을 뻗어 왔다.
티르는 곧바로 반응하며 뒤로 물러서며 피했지만 그럼에도 주먹이 코끝을 스쳤을 정도로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이렇게 빠른 공격을 하는 와중에 루시안의 자세는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흐름 속에서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반격은커녕 간신히 피하기만 하며 물러서고만 있는 그때 루시안의 주먹이 지나치게 깊이 찔러 들어와 순간 비스듬히 옆구리와 등이 보였다.
‘빈틈!’
사냥꾼의 본능으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세를 낮추었다가 루시안의 옆구리를 향해 어깨로 그대로 들이받아 갔다.
하나 그 순간 루시안은 피하기는커녕 주먹을 날렸던 방향으로 가속까지 붙이며 빙글 돌았다. 티르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땐 루시안의 팔꿈치가 눈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퍼억!
강력한 충격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충격에 코피가 뿜어져 나와 루시안의 옷에 튀었다.
그걸 보며 티르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피는 약간 지글거리기만 할 뿐 루시안의 옷이 녹거나 타들어 가진 않았다.
그제야 훈련소에 오기 전 하이포아가 신성력으로 체내의 독을 중화시켜 줬던 일이 떠오른 티르였지만 루시안이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비틀거리는 찰나 루시안의 주먹이 연이어 턱과 인중을 때렸고 무릎을 걷어차나 싶더니 가슴 한복판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티르는 그대로 날아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하늘과 땅이 몇 번이나 뒤바뀌고 나서야 사지를 뻗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순간 멍해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티르였다. 드러내진 않았어도 내심 반사 신경에 자신 있었는데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다니.
물론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며 방심한 탓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욱하는 마음이 든 건지 티르는 곧바로 일어섰다.
하나 그건 마음이었을 뿐. 티르는 일어서자마자 비틀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 얻어맞은 충격 때문인지 무릎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무, 무슨?’
“제법 하는 줄 알았더니 겨우 그 정도냐?”
“…….”
티르는 손바닥을 보고 있다가 라임락 교관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주먹을 쥐며 일어섰다.
달리 말은 하지 않았지만 라임락을 노려보는 티르의 눈빛엔 강한 항변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수 년 동안 온갖 독종을 경험했던 라임락이 저 눈빛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라임락은 코웃음을 치더니 팔짱을 낀 채 루시안에게 소리쳤다.
“4조에서 제일 세다더니 겨우 그 정도냐? 신병 하나 못 이길 정도라면 여태껏 한 달 동안 내가 가르쳐 준 건 귓구멍으로만 처들은 거냐?”
“아닙니다!”
“그러면 제대로 보여 주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라임락 고함을 질러 대자 루시안은 자세를 잡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아까 전에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는지 이번엔 주먹과 발차기가 더 빨라져 있었다. 그렇잖아도 관자놀이를 맞은 충격 때문에 골이 흔들리던 차에 티르는 루시안의 공격을 반 정도만 간신히 피하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티르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흙바닥을 몇 번이나 뒹굴면서 코트에는 피와 흙이 섞여서 끈적거렸다.
오히려 때리던 루시안이 지쳐서 싸움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정도이니 1분 남짓한 동안 얼마나 맞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헉, 헉. 야, 웬만하면 이제 그냥 쓰러져. 계속 맞으면 너만 다쳐.”
지친 와중에도 점점 승부욕이 오르는 건지 루시안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하지만 티르 또한 오기가 발동한 건 마찬가지였다. 여태껏 맞으면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건 분명히 깨달았지만 그래도 이대론 분했던 것이다.
단지 맞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도 자신을 응원하지 않고 루시안만 응원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세피아를 구해야 할 자신이 고작 훈련생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단 사실이 분해서였다.
그것도 계속 얻어맞기만 하고 한 대도 때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솔직히 말해서 몇 대 더 맞으면 버티고 서 있을 자신도 없었다.
‘젠장. 내가 이렇게 약했었나…….’
자책하며 중얼거리는 사이 루시안이 간격을 좁히며 다시 공격해 왔다.
분한 마음에 티르는 주먹에 마지막 남은 온 힘을 실어 루시안을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루시안은 고개를 숙여 간단하게 피해 내곤 티르의 텅 빈 옆구리를 향해 무릎을 앞세워 온몸을 날렸다.
루시안도 지쳤는지 이 무릎치기 일격으로 끝장내려는 것으로 보였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티르로서는 루시안의 무릎치기를 피하는 건 무리로 보였다.
일방적인 형세로 이어져 온 싸움이 드디어 이렇게 끝을 맺나 보다 하고 모두가 마음을 풀어 놓는데 그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파앗!
루시안의 무릎치기가 적중하는 순간 티르가 주먹을 날린 방향으로 가속하여 몸을 돌리더니 팔꿈치로 루시안의 턱을 가격한 것이다.
퍽! 퍽!
둔탁한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무릎치기를 맞은 티르가 뒤로 날아가 널브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의외인 것은 티르의 팔꿈치를 맞은 루시안 또한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단 것이었다.
훈련생들은 물론이고 라임락 교관 또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지 아무 말도 못하는 그때 널브러졌던 티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일어서 있는 것이 고작인 듯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도 몸을 일으켰던 것 자체가 섬뜩할 정도였다.
전율을 느낀 건지 라임락조차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 순간 간신히 버티고 섰던 티르가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다시 쓰러졌다.
“…….”
불과 몇 초에 불과하지만 어쩐지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몇 초.
라임락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야 욕을 하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게 너희들의 수준이다. 조에서 제일 강하단 놈이 고작 신병과 비슷한 수준이란 말이다!”
하지만 고함을 치는 와중에도 라임락의 시선은 티르를 향하고 있었다.
‘간만에 진짜 독종이 왔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 *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걸까.
티르는 두통과 함께 온몸이 쑤시는 걸 느끼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칙칙한 천장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디지?’
애써 쓰러지기 전의 일을 떠올리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대련을 하다 쓰러진 겁니다.”
그제야 루시안에게 일격을 먹이고 직후에 곧바로 쓰러졌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방금 말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티르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한 여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나우사?”
여인은 바로 나우사였다.
“아직 여기 있었나?”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교관이니까.”
“교관…… 인가.”
티르는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문득 나우사에게 물었다.
“넌 얼마나 상대할 수 있지?”
나우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티르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걸 스스로 초라하게 느꼈는지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며 다시 물었다.
“루시안 같은…… 훈련생들이 덤빈다면 넌 몇이나 상대할 수 있냐고?”
“전부.”
나우사가 짧게 답했다.
티르가 쳐다보자 나우사는 벽에서 등을 떼며 몇 마디를 더 보탰다.
“그럴 린 없겠지만 만약 몰살 명령이 떨어진다면 교관까지 포함해서 하루 안에 몰살시킬 수 있을 겁니다. 유니케 소장님은 예외로 치면요.”
“난 고작 그 정도였군.”
티르는 씁쓸히 웃었다. 초라하고 약한 자신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자신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수백 명 중 하나에 불과하다니. 세피아를 잡아 간 녀석들은 저 나우사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인데.
‘젠장!’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우사는 그런 티르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려는데 티르는 급히 그녀를 불렀다.
“나우사!”
나우사가 돌아보자 티르는 아까 전의 자조적인 눈빛과 달리 강렬하고도 결연한 의지, 심지어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강해지고 싶다. 너만큼…… 아니, 너 이상으로! 그러니까 격투술이든, 검술이든, 뭐든 좋으니까 가르쳐 줘. 이대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
나우사는 문간에 서서 잠시 동안 쳐다보기만 하더니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를 띠었다. 입가에 살짝 걸렸을 뿐이지만 분명 미소였다.
대답을 구하며 티르가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나우사는 문고리를 돌렸다.
“강해지고 싶다고!”
티르가 다시 소리쳐 묻자 나우사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그러기 위해 여기 남은 겁니다.”



제8화. 재회 (1)


땡, 땡, 땡―
양동이를 때리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스럽게 들렸다.
주변에서 훈련생들이 구시렁거리며 일어나는 가운데 티르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제 맞은 곳이 쑤시고 골통이 흔들려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패배자처럼 누워 있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옆의 훈련생이 하는 걸 따라서 대충 침구를 정리한 티르는 무리에 섞여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예상대로 밖은 캄캄했다.
아무리 숲속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밤인지 새벽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넓은 터 가장자리에 몇 개의 화로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다만 화로가 있다곤 해도 마당이 넓고 빛은 희미해서 옆 사람 얼굴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