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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18화)
제8화. 재회 (2)


아무튼 어둠 속에서 백여 명의 인원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티르는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줄 서! 줄!”
“왜 이렇게 느려!”
교관들이 소리 지르기 시작하자 어설프긴 해도 오와 열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그때 누군가가 티르의 어깨를 붙잡아 홱 젖혔다.
“어서 안 움직이고 뭐해? 아직도 정신 못 차리나? 응? 뭐야, 네놈이냐?”
격투 훈련의 교관인 라임락이었다.
“그거 얻어맞았다고 멍청해진 거냐? 어리바리하게 있지 마! 야, 거기!”
“예!”
라임락이 지목하자 왜소한 체구의 실루엣 하나가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왔다.
“이름이 뭐야?”
“4조의 에밀리 스프링입니다.”
왜소하다 싶더니 목소리가 당차긴 해도 톤이 높은 게 여자인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이 녀석 옆에 붙어서 일과와 훈련에 대해 설명해 줘라. 내일부터 이 녀석이 멍청하게 굴면 네 녀석도 같이 죽는다. 알겠나?”
“예!”
“대답은 잘하는군. 너, 뭘 쳐다봐? 줄이나 제대로 서! 새벽 기도가 장난인 줄 아나?!”
라임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라지자 에밀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티르에게 다가왔다.
“신병이죠? 어제 루시안과 격투하는 거 나도 봤어요. 일단 지금은 새벽 기도 시간이니까 제 옆에 서세요. 비로이 사제님이 기도문을 암송하면 듣고 계시다가 마지막 구절만 따라하면 돼요.”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에밀리는 티르의 손목을 잡고 대열의 가장 뒤로 이끌었다.
에밀리와 티르가 자리를 잡았을 쯤 사제복을 입고 옆구리에 책을 낀 초로의 노인이 연단에 올라섰다. 저 노인이 비로이 사제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비로이 사제가 책을 들추더니 기도문을 외기 시작하자 교관들까지 포함해서 백여 명의 인원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가르케 마을에 정착한 후 사냥꾼으로 살며 미신에 더 익숙했던 티르였다. 기도 같은 걸 해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옆에서 에밀리가 하는 걸 보고 따라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비로이 사제의 기도문을 듣다가 훈련생들이 기도문을 외면 대충 그걸 따라서 몇 마디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새벽 기도는 비로이 사제가 성호를 긋고 연단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조회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잠시 후 훈련소 소장인 유니케가 연단에 올라오더니 뒤이어 나우사가 유니케의 옆에 섰다.
어느덧 슬슬 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드디어 유니케가 입을 열었다.
“어제부로 새로운 교관이 왔다. 이름은 나우사 하모니. 3조와 4조의 검술을 가르칠 거다. 1조와 2조는 기존대로 빌란드 교관이 가르친다. 음, 또…… 이봐 나우사, 뭐 할 말 있나?”
유니케가 쳐다보자 나우사는 한 발 나서더니 훈련생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우사 하모니입니다. 훈련이 고되더라도 크게는 신의 뜻에 봉사하기 위해, 작게는 당신들의 생존을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 잘 버텨 주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쫓는 신념을 위해서라도.”
나지막하지만 사방이 조용해서인지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다는군. 이상이다. 그럼 제군들, 오늘도 열심히 훈련에 임해 주길 바란다.”
유니케도 그 이상 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곧바로 해산을 선언했고 각 조는 조장의 인솔을 따라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만 티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연단 위의 나우사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우사 또한 그 자리에 선 채 티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그때 부드러운 감촉이 티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 서 있으셔도 돼요. 조회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서도 이것저것 정리할 일도 있고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손목을 잡아끄는 이는 에밀리였다.
마침 나우사도 몸을 돌려 연단에서 내려가고 있어서 티르도 에밀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훈련은 세 가지가 있어요. 체력 훈련이랑, 격투 훈련이랑, 검술 훈련이요. 체력 훈련은 에릭 교관님이 가르치시고 격투 훈련은 어제 보셨죠? 라임락 교관님이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검술 훈련은 지금까진 빌란드 교관님이 지도하셨는데 새로운 교관님이 3, 4조를 가르친다고 하니 오늘부터 그 교관님께 배우겠네요. 그리고 훈련은 아니고 훈육 시간이 있는데 그건 아까 새벽 기도 때 비로이 사제님께서…….”
복도를 걷는 동안 에밀리는 옆으로 따라 걸으며 훈련과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티르는 일일이 대꾸하진 않았지만 에밀리의 설명을 통해 훈련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대충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단 세 가지. 신앙과 훈련 그리고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에밀리의 설명대로라면 훈련 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실전은 어떤지 몰라도 기본기만은 제대로 훈련, 아니 각인시키는 모양이었다.
아울러 비로이 사제가 담당한다는 신앙 훈육은 알게 모르게 훈련에 지친 훈련생들의 심신을 위로해 주는 효과가 있어 훈련생들이 고난을 견디고 신앙심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다만 어릴 적부터 홀로 생활한 탓에 티르는 그런 말을 듣자 신앙이란 명목하에 훈련생들을 세뇌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에밀리의 설명을 계속해서 들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조 별로 할당된 일을 해요. 채소 가꾸기나 청소, 벌목이나 사냥 등등. 아무튼 대충 이런 정도이고 좀 있다 일과가 시작되면 그때마다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그런데…….”
에밀리는 한참 설명을 하다가 뭔가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
티르가 쳐다보자 에밀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라임락 교관님은 뭐랄까…… 자기가 인정한 상대가 아니면 대우를 잘 안 해 주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제 생각엔 신병…… 님이 라임락 교관님께 잘못 보인 것 같아요.”
“찍혔단 말이군요.”
“그런 게 아니라…… 네, 그 말이었어요.”
에밀리는 괜히 자기가 미안해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래 여기저기서 찍히면서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신병님은 말이 이상하니까 그냥 편하게 티르라고 불러요.”
“네, 티르 씨. 티르 씨도 그냥 편하게 에밀리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존대는 안 하셔도 돼요. 저는 그냥 입에 벤 거라서.”
“그래. 그럼 편하게 에밀리라고 부를…….”
“어이, 신병!”
티르가 대답을 하는데 그때 가까운 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병이라고 불릴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터였다. 티르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문이 나란히 있고 모두 활짝 열린 상태였는데 그중 하나에서 대여섯 정도의 훈련생들이 으스대며 나오고 있었다.
그 무리 중 가장 가운데 서 있는 금발 청년은 티르로서도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루시안이라고 했었나?’
어제 격투 훈련 때 자신과 겨루었던 바로 그 금발 청년이었다.
어제 봤을 땐 꽤 성실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건들거리면서 몰려다니는 걸 보니 그다지 좋지 못한 부류란 생각이 들었다.
티르가 루시안과 패거리를 훑어보는 사이 루시안은 간격을 좁혀 왔다. 이윽고 두어 걸음을 마주 보고 서자 루시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 기억하지?”
“루시안이라고 했었나?”
“맞아. 기억하는군. 넌 티르라고 했던가?”
티르가 고개를 끄덕하자 루시안은 피식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제 보니 제법이더군.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지. 난 루시안이라고 한다.”
어제 체면을 구긴 보복으로 한판 하러 온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루시안이 내민 손은 분명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티르가 손을 맞잡으려 하자 루시안의 뒤에 서 있던 패거리 중 하나가 키득거리며 내뱉었다.
“이봐, 티르. 저런 반푼이 년보다는 우리랑 어울리는 게 너한텐 더 어울린다고.”
반푼이 년?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티르의 손이 도중에 멈추었다.
대신 티르는 말을 내뱉은 녀석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루시안에게로 돌렸다. 무슨 말이냐고 해명하라는 뜻이 내포된 눈빛이었다.
“라이언 말이 맞아. 저 반푼이 년은 너하곤 어울리지 않아. 우리랑 같이 다니는 편이 너한테도 좋을 걸? 적어도 사람은 사람이랑 같이 다녀야지.”
설마 했는데 루시안조차도 면전에서 에밀리를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비록 라임락이 시켜서긴 해도 에밀리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 준 사람이었다.
더구나 저쪽은 다수고 에밀리는 한 사람이다. 티르가 강한 불만을 띤 표정으로 노려보자 루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 티르. 물론 너도 남자니까 이해한다고. 처음엔 저 반푼이 년 얼굴 반반한 걸 보고 전부 다 헬렐레했었으니까. 그런데 저년은 사람이 아니라고. 저년 하프 엘프야. 그래서 반푼이 년인 거지.”
“하프 엘프?”
티르가 시선을 돌려 에밀리를 쳐다봤다.
여태까지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에밀리는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콧날은 오뚝하며 커다란 눈망울 속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뭣보다 에밀리의 금발은 루시안의 탁한 금발과 달리 봄날 햇빛처럼 환한 빛깔이어서 더욱 돋보였다.
훈련소의 거친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외모이니 만약 꾸민다면 몇 배는 더 예뻐질 터였다. 하프 엘프라는 루시안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하프 엘프란 사실이 비난받을 일이던가?
아니,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엘프의 피가 반이나 섞였다면 존경까진 아니어도 친절한 대우를 받을 만하지 않나?
티르는 루시안과 패거리 하나하나를 훑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프 엘프라고 해서 반푼이 년이라고 놀림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티르, 전 괜찮아요. 그냥…….”
에밀리가 수습하려는지 나섰지만 티르는 오히려 에밀리를 가로막고 섰다.
루시안은 그런 티르의 모습이 언짢았는지 표정을 찌푸리다가 같잖다는 듯 웃었다.
“정의의 사자도 좋은데 선택 잘하라고, 티르. 딱 한 번만 더 기회 준다. 저 반푼이 년 몇 대만 갈기면 우리 쪽에 들어오게 해 주지.”
“갈기라구?”
티르는 고개를 돌려 에밀리를 쳐다봤다.
에밀리는 때리면 기꺼이 맞겠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티르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제론이나 카론이 때리는데도 가만히 맞고만 있던 세피아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티르는 고개를 돌려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완전 쓰레기였군. 이런 놈인지 알았으면 어제 완전 묵사발을 만들어 놓을 걸 그랬는데 조금 후회된다.”
“뭐, 뭐? 이 자식이!”
루시안이 발끈 하며 달려들었다.
거리가 좁은 탓에 멱살을 잡혔지만 티르도 지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