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독왕 티르 1권 (19화)
제8화. 재회 (3)


그러나 본격적으로 맞붙으려는 찰나 복도 저편에서 라임락의 고함이 들렸다.
“이 느려 터진 놈들아. 밥은 그냥 나오나? 아침 처먹고 싶으면 얼른 튀어나와서 청소해라, 청소! 복도에서 노닥거리지 말고 튀어나와!”
루시안의 어깨 너머로 복도를 가로질러 오며 소리치고 있는 라임락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안도 돌아서서 그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눈빛엔 여전히 적대심이 가득했다.
“후회할 거다, 멍청한 놈. 가자!”
루시안이 으르렁거리며 말하곤 돌아서자 패거리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 * *

청소가 끝난 뒤 티르는 에밀리의 안내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마당의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이 식당이었는데 나무로 된 식판에 배식 당번으로부터 배식을 받는 방식이었다.
4조가 첫 번째인 까닭에 식당은 꽤나 한산했다.
티르는 에밀리와 함께 식당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빵과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식기가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에밀리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기.”
“왜?”
티르가 쳐다보자 에밀리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저 때문에 그렇게 나설 필요까지 없었는데……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잖아요.”
뭔가 했더니 루시안과 충돌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티르는 남은 빵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그런 놈들하곤 어울릴 생각 없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그 자식 좋아하냐? 내 앞에서 자꾸 그 자식 이야기하지 마. 재수 없는 면상이 떠올라서 짜증 나니까.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티르는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넌지시 물었다.
“하프 엘프라며? 그게 딱히 미움받을 이유가 되는 건가? 오히려 반대일 거 같은데.”
“…….”
예상하고 있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던지 에밀리의 표정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밝은 기운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티르는 왠지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나 싶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에밀리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 애들 말대로 반푼이니까요. 엘프처럼 완전히 고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들하고 완전히 같지도 않은…… 신성시하기에도 애매하고 똑같이 대하자니 뭔가 꺼림칙한…….”
“좀 불편할지 몰라도 그런 걸론 미움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아.”
티르가 항의하듯 말하자 에밀리는 고개를 들어 티르를 쳐다봤다. 촉촉이 젖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왠지 모르게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아뇨, 돼요. 감히 엘프한테 요구할 수 없는 걸 그나마 만만한 반푼이한텐 요구할 수 있으니까.”
“요구?”
티르가 잠시 생각하다가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자 에밀리는 씁쓸히 웃었다.
“설마?”
“맞아요. 남자들은 저와 같이 잠자릴 함께하기 원하죠. 바깥에서도 그랬고……. 루시안이나 다른 훈련생들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한 번도 그런 짓 한 적 없으니까.”
“쓰레기로도 모자라 더러운 놈들이었군. 널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 때문인 거냐?”
“그것도 있고요. 또 엘프의 피가 반은 섞인 덕분에 보통 사람들보다 체력이나 운동신경이 좋으니까요. 보통은 노력해서 조금씩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걸 전 너무 쉽게 갖고 있으니까.”
“질투하고 있단 말이군. 참 알면 알수록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마음에 담아 두진 마세요. 어쩌면 저 혼자 추측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분위기가 어두워졌다고 생각한 건지 에밀리는 애써 밝게 웃음 짓더니 한 입도 먹지 않은 빵을 티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배고프시면 이것도 드실래요? 전 스프랑 샐러드만으로도 배가 차거든요.”
“하지만 훈련을 버티려면 그거론 안 돼.”
“전 괜찮아요. 반은 엘프라서 그런지 조금만 먹어도 별로 허기가 안 져요. 자, 받으세요. 약소하지만 아까 때리지 않은 보답이에요.”
에밀리가 미소 지으며 티르의 손에 직접 빵을 쥐어 주었다.
티르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하면 에밀리가 무안할 것 같아서 빵을 반으로 나누어 반쪽만 가지고 나머지 반쪽은 도로 내밀었다.
“그래도 먹어 둬. 반은 인간이라며. 그러면 빵도 반은 먹어 둬야지.”
뜻밖의 말이었는지 에밀리는 커다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며 티르를 쳐다보다가 작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빵을 받았다.
“고마워요. 저한테 그런 농담 해 준 사람은 티르가 처음이네요.”
“농담 아닌데?”
“농담 아니라도 고마워요.”
에밀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고는 조그만 입으로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티르도 빵을 먹으려다가 문득 빵을 먹고 있는 에밀리의 얼굴이 보자 세피아가 떠올랐다. 어디서 배는 곯고 있지 않은 건지…….
세피아 생각에 걱정과 한탄, 자괴감이 밀려오며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데이트 중이신가?”
뒤로 돌아보니 땅딸막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웬 녀석이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루시안 패거리 중 하나였다. 처음에 에밀리를 보고 반푼이 년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그놈.
“뭐야?”
티르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실어서 묻자 녀석은 히죽 웃었다.
“아니, 통성명이나 하자고. 난 라이언이다. 잘 지내 보자고, 티르. 흐흐.”
땅딸막한 녀석, 라이언은 기분 나쁘게 웃더니 갑자기 식판을 앞으로 기울였다.
덕분에 철철 넘치게 담겨 있던 스프가 그대로 티르의 머리로 쏟아졌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스프를 거의 반이나 넘게 쏟은 후에야 라이언은 식판을 바로 들더니 짐짓 미안한 체하며 말했다.
“아, 이런. 실수했네. 젠장, 아까운 스프를 흘리다니. 어이, 괜찮아? 티르?”
미안한 척 묻고 있으면서도 입가 한쪽엔 히죽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티르는 머리에 스프를 뒤집어쓴 채로 라이언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티르의 위세에 라이언은 순간 움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체하며 말했다.
“어, 화난 거야? 실수였다고. 이런 걸로 화내면 곤란한데? 주먹질이라도 했다간 교관들이…….”
“내가 고작 스프 좀 쏟은 거 가지고 화낼 좀생이로 보이냐?”
“뭐, 뭐?”
티르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무감정하게 말하자 라이언이 당황한 표정으로 쭈뼛거렸다.
그사이 티르는 식판을 들더니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라이언의 싸대기를 후려갈겼다.
빡!
소리와 함께 식판은 두 동강이 나고 라이언은 테이블을 엎으며 나동그라졌다.
“티르!”
갑작스런 소란에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에밀리의 깜짝 놀란 목소리만 식당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티르는 반 토막 난 식판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라이언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끌어 올렸다.
“스프 쏟은 걸론 화 안 내. 하지만 사람 마음에 상처 준 건 좀 화를 내야겠다.”
“무, 무슨?”
“사과해라. 아까 에밀리한테 반푼이 년이라고 한 거.”
“지, 지랄…….”
라이언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순간 티르의 손이 라이언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내려찍었다.
퍽!
“악!”
소리가 나며 라이언의 머리가 테이블에 처박혔다가 튕겨서 다시 올라왔다. 이마엔 가로로 줄이 선명히 나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뒤늦게 고통이 오는 건지 라이언이 아파 죽는다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티르는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을 한 채 라이언에게 말했다.
“사과해라.”
“씨발! 이 개 같은.”
퍽!
라이언은 욕지거릴 내뱉으려다 티르의 공허한 눈빛과 마주치자 왠지 모를 공포를 느낀 건지 움찔하며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 알았어. 할게. 미, 미안하다. 아까 전에 반푼이 년이라고 놀린 거…….”
“앞으로도 하지 마라. 걸리면 진짜 반푼이가 뭔지 체험하도록 해 줄 테니까.”
“아, 알았다. 그러니까 이거 좀…….”
라이언이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사정하며 말하자 티르는 그제야 라이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거칠게 놓아 주었다.
라이언이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티르는 고개를 돌려 에밀리를 쳐다봤다.
“…….”
방금 전 일 때문에 놀란 건지 에밀리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눈에 띌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 내쉬고 있었다.
뭣보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까지 약간 맺힌 게 어지간히 놀란 듯 보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티르는 그런 에밀리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스스로도 반푼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보여 주도록 해.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저 자식들이 계속 만만하게 보는 거야.”
“하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내서 에밀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티르는 식당을 나가고 있었다.

* * *

훈련소의 규율은 엄격하고 또한 상당히 거칠었다. 티르는 그 점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식당을 나온 뒤 머리에 묻은 스프를 씻어 내고 있는데 라임락 교관이 나타났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뭔가 처벌을 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임락은 연병장에 머리를 박고 있으라고 시켰다. 그러고 난 뒤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처음에 같이 머리를 박고 있던 라이언은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어디론가 실려 간 지 오래였다. 이제는 티르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똑같은 상황이 오면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 졸렬한 놈들이 앞에서 으스대며 설치고 다니는 꼴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다만 몇 시간이나 이러고 있으니 머리에 피가 쏠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젠장, 라임락…… 까먹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자신이 까무러치는 꼴을 보기 위해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굳어 가는 티르였다.
하나 그런 생각이 들수록 오히려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몸은 죽을 만큼 힘들지만 마음속에선 오기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에.
죽더라도 머리를 박은 채로 죽겠다는 각오를 하며 티르가 다시금 허벅지와 발끝에 힘을 주는 그때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뒷모습이 비슷한 거 같은데? 진짜였나?”
늙수그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왠지 귀에 익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늙은이는 몇 되지 않는데?
아니, 그전에 훈련소에 늙은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한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박고 있는 상태에서 돌아볼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