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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20화)
제8화. 재회 (4)


묵묵히 벌을 계속 서고 있는데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앞에 섰다. 노인은 구부정하게 앉더니 티르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아침에 훈련생 한 놈 머리 박살내 놨다는 신병이 너냐? 너지?”
“…….”
티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유도 없긴 했지만 체력을 거의 다 소모한 터라 말할 기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서 그런 티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신병 이름이 티르라던데 혹시 세피아란 여자아이 쫓아다니던 그 티르냐?”
‘세피아?!’
그런데 뜻밖에도 노인의 입에서 세피아란 이름이 나왔다. 순간 티르는 힘든 것조차 잊고 온몸의 살이 떨리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벌을 서는 걸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조차 잊고서 티르는 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염소수염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노인은…….
“하스크?”
바로 하스크였다.
가르케 마을에서 세피아를 잡아갔고 마탑에선 나우사를 도와 방어진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던 바로 그 하스크였다.
한데 하스크가 어떻게 여기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하스크는 자신과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훈련생이란 말인데?
티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계속 쳐다보고만 있자 하스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혹시 나나 딜크에 대해선 아무 이야기도 못 들은 거냐? 나우사 님도 같이 오셨기에 뭔가 알고 온 줄 알았더니만.”
“딜크도 여기 있는 거냐?”
“여기 있지. 근데 그 덩치 큰 녀석이 훈련 빼먹으면 티가 너무 나잖아. 그래서 나 혼자만 와 본 건데 혹시나 하긴 했지만 정말 너였다니. 솔직히 네 능력은 너무 위험하잖아. 그런데…….”
하스크가 별일 다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놀란 걸로 따지면 티르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하스크와 딜크를 만나게 되다니. 특히 딜크는 마탑에 갇힌 동안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붙인 상대였다.
사실 훈련소에 온 이후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로웠는데 딜크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문득 가슴 한편이 찡해진 티르였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랑 딜크는 몇 조인 거야?”
“3조다. 근데…….”
하스크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급히 입을 다물었다.
티르는 뭐냐고 물으려다가 하스크의 시선이 자신의 뒤로 향하고 있단 걸 눈치챘다. 돌아보니 라임락이 거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흥, 근성 있는 놈인지 알았더니 제법 농땡이도 피실 줄 아시는구먼? 어제는 혼자서 뭐 있는 척 갖은 폼은 다 잡더니 말이야.”
라임락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억울했지만 변명할 말이 없었다. 직전까지 머리를 박고 있다가 지금 잠시 일어선 것이라 해도 어쨌거나 자기 마음대로 벌을 그만둔 게 아닌가.
라임락이 저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티르는 무거운 표정으로 라임락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머리를 박았다.
“저녁까지 박고 있겠습니다.”
“됐어.”
뜻밖에 라임락은 발로 티르의 옆구리를 밀어서 넘어뜨리며 말했다.
“일어나라. 오전은 내 훈련 시간이어서 마음대로 시켰지만 다른 교관의 훈련 시간을 뺏을 순 없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넘기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너! 3조 하스크였나?”
라임락이 매서운 눈빛으로 하스크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하스크는 위축되기는커녕 늙은이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훈련하다 뻗어서 회복실에 갔다 나오는 길이요. 노인네가 훈련을 하면 얼마나 하겠소.”
하스크의 말에 라임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하스크는 겉보기에 일흔 정도는 된 노인처럼 보였다. 그런 노인네가 이곳 훈련소에 온 것 자체가 교관들에겐 의문이었을 것이다.
“젠장, 소장님은 대체 저런 노인네를 어디 쓸 데가 있다고 받아 준 거야. 빌어먹을.”
라임락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하스크를 노려보다가 이내 관심을 거두고 본관으로 가 버렸다.
하스크는 시선으로 라임락의 뒤를 쫓다가 그가 건물에 들어가고 나서야 피식 웃었다.
“여기서 제일 성깔 더러운 놈이 저놈이지. 뭐 그래 봤자 나한텐 아무 소리 못하지만. 크크, 건 그렇고 저 인간이 돌아온 걸 보면 오전 훈련은 끝난 모양이군. 슬슬 점심시간인 모양인데.”
하스크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자 티르도 지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머리를 박고 있던 탓인지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졌다.
나무를 짚고 간신히 일어서긴 했지만 몸이 덜덜 떨려서 걷기 힘들 정도였다.
하스크는 그런 티르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옆에서 부축해 주며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좀 꾀도 부릴 줄 알아야지 대체 얼마나 하고 있던 거냐?”
“꾀 부려서 얻는 게 뭔데? 쉬는 거? 겨우 그런 거 때문에 자존심까지 팔긴 싫어.”
“그게 혼자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녀석 입에서 나올 말이냐?”
“됐어. 혼자 걸을 수 있어.”
혼자 가려 했지만 뜻밖에 하스크는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있는 티르의 팔을 놔 주지 않았다.
“혼자 걷긴 뭘 걸어. 일단 회복실로 가자. 거기서 내가 좋은 거 줄 테니까.”
중얼거리며 하스크는 티르를 부축해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건장한 티르에 비해 하스크는 체구가 왜소하고 허리도 꼬부라져 있어서 걷는 게 쉽진 않았지만 더디게라도 둘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연병장을 반쯤 지나오는데 뭔가가 티르와 하스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어, 티르!”
고개를 들어 보니 루시안 패거리가 앞에 서 있었다. 그중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 라이언도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끼어 있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우리가 부축해 줄까? 아무려면 노친네보다는 젊은 우리가 낫겠지.”
루시안이 턱짓을 하자 패거리 중 체구가 큰 한 녀석이 나서서 하스크의 팔을 잡아챘다.
“어이, 영감. 당신은 같이 다니는 그 덩치 큰 저능아하고나 놀라고. 쓸데없이 4조 일에까지 간섭하지 말고. 3조 스콜스가 루시안한테 무릎 꿇은 거 알고 있지?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꺼져.”
덩치 큰 녀석이 인상을 험악하게 쓰자 하스크는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하스크의 그런 반응을 티르가 모를 리 없었다. 티르는 스스로 하스크의 어깨에 걸친 팔을 빼내며 말했다.
“됐으니까 가 봐, 하스크. 나도 이딴 녀석들 상대하는데 남에 힘 빌리고 싶진 않으니까.”
하스크는 안 그래도 주름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루시안을 힐끔거렸다.
루시안 패거리의 표정은 정말로 끝장이라도 볼 것 같이 험악해 보였다.
그에 비해 티르는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이대로 티르를 내버려 둔다면 틀림없이 당하게 될 터였다.
린치를 당하진 않더라도 교묘한 방법으로 티르를 곤경에 처하게 할 게 빤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남아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젠장, 딜크 이 자식은 꼭 필요할 때 없더라니.”
“이봐, 영감탱이 갈 거야, 안 갈 거야? 너도 우리 부축 좀 받아 보려고?”
라이언이 앞으로 나서며 이죽거리자 하스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바람에 티르 혼자 앞으로 나서 있는 꼴이 되자 라이언은 시익 웃으며 앞으로 나서서 티르를 부축하려는지 손을 내밀었다.
하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더니 뜻밖에 티르가 라이언의 손을 쳐 냈다.
“부축 따윈 필요 없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앞장서라.”
강하게 나오는 티르의 말에 라이언은 오히려 당황해서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루시안 역시 티르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신만만하군.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 따라와.”
루시안이 돌아서서 본관과는 맞은편에 있는 숲으로 걸어가자 티르는 그 뒤를 따랐다.
이어서 루시안 패거리들이 도망치려는 걸 막으려는 듯 그 뒤를 따랐고 연병장엔 하스크 혼자 남겨져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 * *

루시안은 본관의 맞은편 숲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가고 난 후에야 멈추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거목들이 곧고 높게 솟아 있고 녹음이 드리워 그늘이 짙게 깔린 곳이었다. 루시안 패거리들이 아지트로 쓰는 곳인지 의자 용도로 쓰일 법한 바위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루시안과 티르가 멈춰 서자 라이언 등 패거리는 포위하듯 빙 둘러섰다.
티르는 주변을 스윽 훑어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뭐?”
“할 거면 확실하게 하라고.”
“이런 미친 새끼가!”
루시안의 오른팔인 듯한 덩치 큰 녀석이 주먹을 불끈 쥐며 앞으로 나섰다.
그대로 한 방 갈기려는 듯한 기세였으나 티르는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여느 때와 달리 독기를 잔뜩 머금은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라고! 지금 날 굴복 못 시키면, 장담하는데 이후에 하나씩 차례대로 박살나는 건 너희가 될 테니까!”
한순간 뻗어 나온 위압감에 주눅이 든 건지 녀석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티르는 때려 보라는 듯 가드조차 올리지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녀석은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주먹을 날리진 못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치를 보기만 할 뿐 선뜻 나서지 못했다. 루시안은 그런 녀석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덩치 큰 녀석을 밀치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멍청한 녀석들. 비켜 봐, 베넷.”
덩치 큰 녀석, 베넷이 비켜서자 루시안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다짜고짜 티르에게 주먹을 날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티르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티르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아 내고는 루시안을 올려다보며 조소했다.
“겨우 이 정도냐?”
“닥쳐!”
소리치며 루시안이 가슴팍을 걷어찼다.
티르는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고 루시안은 패거리들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봤지? 이 자식은 아무것도 못해. 허세란 말이다. 일어서 있는 게 고작이라고. 라이언! 뭐해? 그렇게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거냐?”
라이언은 처음엔 용기가 나지 않는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서 티르의 머리를 걷어찼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나며 티르가 옆으로 굴렀다.
그 모습을 보자 라이언은 뭔가 희열을 느낀 건지 요상한 웃음을 짓고는 다시 달려들어 티르의 옆구리를 짓밟고 걷어차기 시작했다.
하나가 달려들자 나머지들이 달려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내 다섯 놈이 엎어져 있는 티르를 빙 둘러서더니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몸통과 다리를 위주로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