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독왕 티르 1권 (21화)
제8화. 재회 (5)


티르로서는 웅크린 채 맞고 있기만 했다. 체력이 고갈되어 반격도 할 수 없었거니와 지금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걸 모두 다 하고 난 뒤 그때여야 했다.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떨 때 확실히 박살내야 했다.
바로 그때를 위해 티르는 팔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린 채 맞고만 있었다.
칸엘의 실험도 견딘 자신인데 고작 이런 애송이들의 린치를 버티지 못할 리 없었다. 이런 건 그냥 버티면 될 뿐. 옆구리가 욱신거리고 숨이 턱 막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얼마 정도가 지나 녀석들도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지 발길질하는 힘도 속도도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때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만! 그만해요!”
때 아닌 불청객의 출현에 루시안 패거리들이 발길질을 멈추고 그쪽을 쳐다봤다.
티르도 간신히 몸을 뒤척여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뜻밖에 에밀리가 한 손으로 나무를 짚고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만해요. 그런 식으로 여럿이서 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너무하잖아요! 더군다나 티르는 하루 종일 벌을 받고 있었는데.”
“뭐? 그래서 네가 대신 맞기라도 하려고?”
루시안이 이죽거리며 묻는데 뜻밖에 에밀리가 단호히 소리쳤다.
“원래 당신들과 저 사이의 일이었어요. 티르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티르는 보내 줘요.”
전에 보지 못한 에밀리의 당찬 반응에 루시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씩 에밀리에게 다가갔다.
고작 한 발자국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마주 서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그새 저 자식이랑 붙어먹기라도 한 거냐? 저 자식한테만 너무 친절한 거 아냐? 우리는 처음에 그렇게 잘 대해 줘도 쌀쌀맞더니만, 응?”
“그런 일 없어요.”
“아무려면 어때. 어차피 네년도 제대로 한 번 손봐 주려고 했으니까.”
루시안은 중얼거리다가 기습적으로 에밀리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놓으세요!”
에밀리는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민첩성이나 체력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근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루시안과 실랑이하는 사이 어느새 루시안 패거리는 에밀리를 둘러싸더니 덩치 큰 두 녀석이 양옆에서 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루시안은 꼼짝 못하는 에밀리의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익 웃으며 티르를 쳐다봤다.
“이봐, 티르. 어떻게 할까? 발가벗겨 놓으면 상당히 볼 만한 구경거리일 것 같지 않아?”
눈빛이 음흉한 것이 단순한 장난 같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분위기에 치우쳐 어느새 루시안 패거리들은 서서히 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티르는 직감적으로 그런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만둬. 그 이상 했다간 내가 아니라 교관들이 너흴 가만두지 않을 거다.”
교관이란 말에 루시안 패거리들이 움찔했다. 그제야 이성이 다시 깬 모양이었다.
하지만 허세인지 아니면 자존심인지 루시안만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 교관들이 알 게 뭐야? 이년도 쪽팔려서 교관들한테 말 못할걸? 설령 안다 해도 우리가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 좀 하고 만진 걸로 죽이기야 할까.”
“뭐라고?”
순간 티르는 할 말을 잃었다. 쓰레기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루시안이 손을 슬금슬금 에밀리의 가슴으로 가져가자 티르의 눈빛엔 살기마저 드리우기 시작했다. 저건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손 치워라. 안 그러면 한 가지 확실히 약속하지. 조만간 그 더러운 손목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해 준다고.”
살기가 잔뜩 어린 티르의 말에 루시안이 손을 멈추더니 티르를 쳐다봤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선 협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오히려 루시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마저 짓고 있었다.
“뭐? 없애? 웃기고 있네. 그래, 해 봐. 난 내 할 일을 할 테니까.”
“그만두라고 했잖아!”
티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은 에밀리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데 그 순간 티르가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파팟!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던 티르가 순식간에 수 브람을 가로질렀고 어느새 티르의 손이 루시안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흡!!”
예기치 못한 사태에 루시안은 물론 티르 자신조차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켜보고 있던 에밀리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거의 순간 이동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다니!
하나 이는 마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이포아가 독을 중화시키긴 했지만 새로 분비된 독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결과 티르는 빠르게 움직일 필요를 느꼈고 그 욕망에 반응하여 모종의 독성분이 분비되었다. 그 효과로 근육이 압축, 강화된 것이었다.
“손 치우라고 말했지.”
티르가 루시안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 압도적인 스피드 때문인지 아니면 기백 때문인지 루시안은 아무 말도 못했다.
밀어붙이려면 확실히 밀어붙여야 했다. 티르는 루시안의 멱살을 붙잡아 거칠게 잡아당겼다. 거의 코끝이 마주칠 정도의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 대고서 티르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라. 지금 당장 저 쓰레기들 데리고 꺼져!”
티르는 루시안의 멱살을 놓으며 가슴팍을 거칠게 떠밀었다.
그 바람에 두어 걸음이나 밀려난 루시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티르를 쳐다보다가 라이언 등이 뒤척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두고 보자.”
분하긴 하면서도 감히 덤빌 순 없었는지 루시안은 한마디 남기곤 돌아서 버렸다.
라이언 등 패거리들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에밀리를 놓아 주곤 루시안을 따라 황급히 숲을 나섰다.
이윽고 루시안 패거리들이 사라지자 돌연 티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티르?”
에밀리가 놀라며 티르를 부축하려 했지만 티르는 됐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육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누가 부축해 준다고 걸을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던 것이다.
루시안의 손목을 붙잡을 때부터 그랬으니 오히려 몇 초라도 내색하지 않고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왜, 왜 그래요?”
에밀리가 걱정하며 물었지만 티르는 다리를 감싼 채 신음만 흘렸다. 고통에 대답할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저 다리를 감싸고 고통을 참고만 있자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신 답했다.
“그렇잖아도 만신창이인 몸에 아까의 움직임으로 과부하가 걸려서 그렇게 된 걸 겁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티르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우사?”
“나우사 교관님?”
유유히 걸어오는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나우사였다.
이어서 그녀의 뒤로 크고 작은 한 쌍의 그림자가 따라 나왔는데 바로 딜크와 하스크였다.
“티르!”
딜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티르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어느 틈에 움직인 건지 나우사가 티르와 딜크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지금은 그냥 가만 놔두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티르, 아픈데…….”
“칸엘의 실험도 버틴 나야. 이 정도로 안 죽으니까 죽을상 하지 마.”
슬슬 고통이 사그라지는지 절뚝거리며 일어선 티르는 하스크를 쳐다봤다.
“당신이 데리고 온 거야?”
“훈련소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교관님께 알리는 건 훈련생의 의무니까.”
하스크의 말에 티르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저런 녀석들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얻어맞고 있었냐?”
“일부로 맞은 거였어.”
“흥, 말은…….”
어느 순간부터 티르와 하스크가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나우사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걸어가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티르, 딜크, 하스크. 할 말이 있으니 점심식사 후에 제 집무실로 오십시오.”
“저, 저는요?”
나우사의 뒷모습에 대고 에밀리가 다급히 물었다.
나우사는 잠시 돌아서서 에밀리를 쳐다보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오셔도 됩니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다만 저도 오늘 일은 묵과할 테니 괜히 쓸데없는 소문이 돌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쉽게 말해 그냥 조용히 있으란 말이었다.
자신만 소외돼서인지 에밀리는 서운한 표정이었지만 감히 교관한테 항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에밀리가 답하자 나우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하더니 고목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제9화. 특별 훈련 (1)


나우사의 집무실은 본관 1층 구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까닭인지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풍겼지만 가구나 집기 등은 대충 정리되어 있어서 나름 집무실다운 느낌이 나긴 했다.
나우사는 서류를 훑고 있다가 티르, 하스크, 딜크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으세요.”
하스크와 딜크가 나우사의 눈치를 보며 앉자 티르도 남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부른 이유가 뭐지?”
“당부해 두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나우사는 답하며 티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일단 한 가지부터 분명히 해 두고 가죠. 개인적인 자리에선 상관없지만 지금 당신과 저는 교관과 훈련생 관계입니다. 경어를 써 주었으면 좋겠군요.”
늘 하던 것이라 아무 생각 없이 반말을 했었는데 나우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제 실수였습니다. 시정하죠. 그러면 이제 본론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나우사는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 가지 설명부터 하고 넘어가죠. 티르 당신의 능력에 대해서요.”
‘내 능력?’
“마탑에선 간단히 독에 관한 능력이라고 했지만 사실 당신의 능력은 응용하기에 따라 폭넓게 확장이 가능합니다. 의식하고 한 건 아니라 해도 이렇게까지 빨리 해 낼 줄은 몰랐기에 아무 말도 안 한 거였는데…… 이렇게 된 이상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군요.”
하스크와 딜크도 금시초문이었는지 눈만 끔뻑거리며 티르를 쳐다봤다.
“추측입니다만 아까 순간적으로 근육을 압축시키는 어떤 독성분이 분비됐었을 겁니다. 비슷하게 다른 방향으로도 응용이 가능할 거고요.”
“그런?”
티르가 놀란 듯 쳐다보자 나우사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마 하이포아 님의 신성력이 강해서 당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눌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독성분이 대책 없이 분비됐을 거고 어쩌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됐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
이어지는 나우사의 말에 티르는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