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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25화)
제10화. 습격 (3)
다행히 티르 일행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으나 진짜 상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바로 비상 상황이 선언되어 훈련생들이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티르, 에밀리, 하스크도 물론 각자의 조로 돌아가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딜크는 예외였다.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교관 회의가 소집된 상태였고 심문을 위해 딜크는 불려 간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적이 정확히 몇 명이었다는 거냐? 한 명이야, 여러 명이야?”
라임락 교관이 다그치듯 묻자 딜크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 여러 명이었어요. 하지만 사부님과 싸운 사람은 한 명…….”
“그러면 나머진 뭘 했는데?”
“디, 딜크도 모르겠어요. 그 여자는 너무 세서 사부님도 어려워서…….”
“여자? 거기다 그 한 명이 여자라고? 그러니까 소장님이 고작 여자한테 당했다고?”
끄덕끄덕.
라임락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자인 나우사가 바로 앞에 있었지만 그다지 안중에 두진 않는 듯한 태도였다.
반면 나우사는 딜크의 말을 듣자 순간 뭔가 번뜩 떠올랐는지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였다.
회의에 참석한 교관들이 저마다 추측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연장자인 비로이 사제만큼은 그러한 나우사의 기색을 눈치채고 나직이 물었다.
“나우사 교관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로이 사제의 말에 교관들의 시선이 나우사에게로 향했다. 하나 나우사는 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딜크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납니까?”
“조, 조금.”
나우사가 말해 보라는 쳐다보자 딜크는 기억을 되새기는 듯 인상을 오만상 찌푸리고 있다가 떠듬떠듬 한마디씩 흘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검은색 옷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보라색이고…… 나이는 티르랑 비슷했어요.”
딜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우사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빈약한 정보이긴 하지만 정황상 이 정도만으로도 추측하기엔 충분했기에.
넬하크의 마탑에서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바로 그 여자일 터!
어느 때나 침착한 나우사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책상 아래 내려가 있는 나우사의 손이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반면 라임락이나 비로이 등 다른 교관들은 딜크의 말에 또 다른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니케 소장을 궁지로 밀어붙였다는 한 명의 적이 고작 티르 또래의 여자아이라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무래도 쇼크를 받아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명이 왔다는데 고작 한 명만이 소장님을 상대했다는 것도 그렇고 또 그 한 명이 스물도 안 된 여자아이라니.”
여태 침묵하고 있던 검술 교관 빌란드가 말하자 체력 훈련 교관 에릭도 곧바로 수긍했다.
“제가 보기에도 딜크는 안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만 돌려보내지요.”
라임락, 에릭, 빌란드 세 교관은 비로이 사제를 쳐다봤다. 소장인 유니케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결정권자는 최고 연장자이자 이곳 훈련소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비로이 사제인 까닭이었다.
비로이 사제도 다르지 않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말석에 있던 에넬이 딜크를 부축해서 나가자 회의장은 정적에 빠졌다.
그렇게 얼마쯤 침묵이 흐르다가 마침내 비로이 사제 다음으로 오래된 라임락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어쨌거나 적이 습격했단 거나 유니케 소장님이 공격을 받았고 실종 상태란 것만큼은 확실하니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비로이 사제가 어떻게? 라고 묻는 듯 쳐다보자 라임락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들도 어느 정도 훈련을 받았으니 무장시켜서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 사악한 놈들에게 확실히 보여 줘야 합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됩니다!”
“음, 소장님이 실종됐을 정도면 어지간히 강하단 건데 애들한테 위험하지 않겠나?”
비로이 사제가 걱정하며 말했으나 라임락의 반응은 여전히 강건했다.
“온실에 화초를 키우는 게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이런 실전은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살 놈들은 결국 살아남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싸우는 기척이 들리면 저희 교관들이 곧바로 가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간 희생은 있겠지만 확실히 저희에게 유리한 싸움입니다.”
“유니케 소장님도 실종됐는지 어쩐지 확실하지도 않지요. 어쩌면 역으로 놈들에 대해 캐고 있으신 건지도 모릅니다.”
에릭과 빌란드가 라임락의 주장을 옹호하고 나서자 비로이 사제는 고개를 돌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인 나우사를 쳐다봤다.
나우사는 잠시 고민하며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하나 그것이 비로이 사제처럼 훈련생들을 걱정하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결한 성품과는 별개로 대의를 위해 조그만 것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은 누구보다 확고한 나우사였다.
훈련생들을 위해 눈앞의 적을 놓아 주는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나우사가 고민하는 것은 적의 저의가 무엇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그 여자가 왔을 정도라면 분명 굉장히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였을 터. 하지만 이런 작은 훈련소, 그것도 예비 훈련소에 불과한 여기에 그런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찾아낸 이유가 두 가지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유니케 소장님을 노리고 왔다는 것. 좌천당한 처지여도 한때 요직에 계셨던 만큼 알고 있는 정보도 많고 뭣보다 여차하면 즉시 전력감이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바로 티르, 딜크, 하스크였다. 실험에 성공한 그들을 버리기 아까워서 회수하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였다.
하나 나우사는 이내 후자에 대해선 그럴 리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 고작 그 세 사람을 위해 이렇게 무리할 리가 없을 테니까.
‘결국 소장님이 목적인 건가.’
나우사는 속으로 한숨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적의 의중을 파악한 이상 자신의 선택지는 이미 결정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유니케 소장을 구하든가 아니면 유니케 소장의 납치를 막을 수 없다면 그를 죽이던가. 어느 쪽이든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마침내 나우사도 고개를 끄덕여 라임락 등과 같은 뜻임을 밝혔다. 이로써 비로이 사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셈이었다.
“교관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비로이 사제가 묻자 라임락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일단 훈련생들로 조를 나누어서 수색을 해야 합니다. 적을 발견하면 교전하기보단 신호를 보내는데 주력하도록 하면 저나 다른 교관들이 놈들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동안 교관들도 각자 구역을 맡아 수색을 해야겠지요.”
“알겠네. 실전에 있어선 자네가 가장 나으니 라임락 자네가 맡아서 하게.”
“예. 그럼 비로이 사제님은 에넬과 함께 여기서 대기해 주십시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훈련생 몇 명을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비로이 사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라임락은 성큼성큼 걸어서 회의장을 나갔다. 이미 결정이 내려진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는지라 빌란드나 에릭 역시도 라임락을 뒤이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나우사도 회의장을 나서려는데 그때 비로이 사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조심하게. 왠지 오늘은 예감이 좋지 않구먼. 정말로 좋지 않아.”
나우사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비로이 사제를 바라보다가 성호를 긋고는 방에서 나왔다.
* * *
“젠장! 지, 진짜 적이 쳐들어온 거야?”
누군가 불안히 중얼거렸다. 하나 이 한마디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숱하게 이야기를 들어온 이단이나 이교도 혹은 흑마법사와 맞서게 되는 건 먼 훗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훈련소를 나가기도 전에 그날이 찾아오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었다.
진검까지 지급된 걸 보면 비상 훈련 같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더구나 피투성이가 된 딜크가 귀환하는 모습을 본 훈련생들도 적지 않은 편이어서 이런 불안을 수위를 더해 갔다.
과연 이 상황이 진짜인지? 진짜라면 적이 대체 누구인지? 어느 정도인지?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나마 자신들에 비해 조금 더 알고 있을 법한 훈련생이 있기는 했다. 피투성이가 된 딜크와 함께 귀환한 티르와 에밀리가 바로 4조이기 때문이었다.
평소 티르의 독종 같은 이미지 때문에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마침내 누군가 나서서 티르의 앞으로 걸어갔다.
“야, 티르!”
티르를 부른 이는 뜻밖에도 루시안이었다.
첫날 이후로 두 사람이 대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게 오늘 깨진 것이었다.
“뭔가 알고 있지? 말해. 대체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어떤 놈들이 쳐들어온 거냐고?!”
언제나 허세에 찌들어 있던 녀석이 이 상황에선 불안해진 것일까? 평소 모습과 달리 잔뜩 흥분해선 소리쳤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멱살이라도 잡아 붙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티르는 이런 녀석에겐 그다지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문제는 다른 훈련생들이었다. 이대로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간 오히려 불안감만 가중시킬 것 같았다.
설령 놈들과 싸우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훈련생들이 불안해하는 심리 상태론 나을 것이 없을 터였다.
티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다.”
“흐, 흑마법사?!”
루시안이 흠칫 놀라며 중얼거렸다.
루시안뿐 아니라 그 패거리와 다른 훈련생들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어, 얼마나 되는데? 유니케 소장님이 녀석들에게 당했단 소문도 사실이냐? 그러면 너랑 저 반푼이 년은 어떻게 도망친 건데?”
반푼이 년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티르는 녀석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줄까 싶었으나 그런 기미를 눈치챘는지 에밀리가 손을 잡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에서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화를 속으로 삭이곤 훈련생들을 보며 다시 말문을 뗐다.
“나도 전부 확실하게 아는 건 아냐. 단지 여기 오기 전에 녀석들과 싸운 적이 있어서 아는 거다. 유니케 소장님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나 놈들의 숫자에 대해선 나도 아는 게 없어.”
“젠장, 뭐 그런 무책임한…….”
“하지만 놈들도 사람이다. 칼 맞으면 죽어. 마법도 까다롭긴 하지만 맞는다고 무조건 죽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이 그동안 받은 훈련이면 상대하고도 남아. 겁먹고 움츠러들지 않을 때 이야기지만.”
불안감에 수군거리던 훈련생들이 티르의 말에 조금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처음보단 불안감이 덜한 느낌이었다.
하나 티르의 말에 되찾은 자신감은 다음 순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 멀지 않은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으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일제히 비명이 들린 방향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몇 초 후에야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그 한마디를.
“유니케 소장님 아니야?”
비명 소리는 바로 유니케의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독왕 티르』 제2권에서 계속>
1판 1쇄 찍음 2013년 7월 15일
1판 1쇄 펴냄 2013년 7월 18일
지은이|남시온
펴낸이|정필
펴낸곳|도서출판뿔미디어
편집장|이재권
기획·편집|심재영, 윤영상
편집디자인|이진선
관리, 영업|김기환, 임순옥
출판등록|2002년 9월 11일 (제1081-1-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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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8,000원
ISBN 978-89-6775-407-5 04810
ISBN 978-89-6775-406-8 04810(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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