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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24화)
제10화. 습격 (2)


나우사가 말하기 전에 티르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오라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절대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독이 체내에 축적되었다간 죽고 말 겁니다. 적당히…….”
“아뇨!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오라를 쓰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납니다.”
목소리는 그야말로 결연했다.
실제로도 티르는 그런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라를 쓰지 못하면 세피아는 구할 수 없다. 그건 지난 오 개월간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결사적인 도약이 필요한 때였다. 나우사의 말대로 자신에게 자질이 갖추어져 있다면 분명 할 수 있을 테니까.
나우사도 티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한 건지 작게 한숨을 쉬더니 피식 웃었다.
“정말 당신다운 결심이군요.”
“제겐 시간이 없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세피아를 구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일단 지금부턴 수련 방식을 바꿔야겠군요.”
‘바꾸다니?’
나우사는 검을 다시 뽑아 들더니 가슴 앞으로 검을 세워 들었다.
사아아아아―
나우사의 주변으로 가볍게 바람이 인다.
희끄무레한 빛을 띠는 기운들이 바람을 따라 나우사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마법?’
아니다.
마법에 문외한인 티르였지만 직감적으로 마법과는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마법은 잘 정돈된 느낌인 반면 이 흰빛엔 왠지 모를 가슴 벅참이 느껴진다. 고고한 기상이 나우사의 인성이 형성화된 듯도 보였다.
“오라?!”
두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나우사의 검에서 흰빛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티르는 나우사의 오라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라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단지 희게 빛나는 불꽃같은 이글거림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오라에는 왠지 모를 기품과 기상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우사의 성품이 오라에 반영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어쨌건 나우사를 감싼 찬연한 빛의 무리와 날을 감싸고 일렁이는 빛의 파도는 여태 티르가 봤던 그 무엇보다 신성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게 오라입니다. 제 간절한 염원과 소망의 결정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우사의 말에야 티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우사가 한 걸음 다가온다.
어느새 티르가 디딘 땅은 나우사가 뿜어내는 오라의 영역 안에 들어 있었다.
지척에 이르자 나우사는 검을 쥔 손을 뻗어 티르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뭐라고 하는지 안다기보다 본능에 이끌려 티르는 손을 뻗었다.
나우사의 손과 포개지며 티르는 오라에 감싸인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
순간 찌릿하며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현기증이 일며 정신을 잃을 뻔도 했지만 이상하게 묘한 쾌감이 뭉클 샘솟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단잠을 잤을 때의 그런 쾌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마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단번에 해소되어 버리는 정신의 청명함! 태어나서 이런 개운함과 해방감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하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나우사가 오라를 거둔 것이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십니까?”
“글쎄, 잘은……. 하지만 뭔가 굉장히 시원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슴이 뻥 뚫리듯이.”
“지금 그 느낌을 어떤 형상으로든 잘 각인시켜 두십시오. 느낌을 형상화시킬 수만 있다면 의외로 오라를 발현하는 건 쉬울 수도 있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되느냐 안 되느냐는.”
뭔가 알 듯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티르였다.
좀만 더 가면 될 것도 같은데.
하지만 말로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해도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넘긴 후에야 모르지만 넘기기 전엔 무엇보다 어려운 페이지.
그것이 바로 새로운 경지로의 진보가 아니던가.
다만 의미 있는 건 드디어 티르도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느끼게 됐단 것이었다.
사냥꾼 시절의 티르였다면 나우사가 오라를 느끼게 해 주었더라도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의 티르는 그동안 필사적인 수련 덕분에 막연하게나마 오라의 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티르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런 티르가 대견하게 느껴졌는지 나우사의 표정엔 드물게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오라의 느낌을 형상화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티르가 뒤늦게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자 나우사는 미소를 거두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나우사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서 피식 웃음만 나오는 티르였다.
“아직 훈련 중입니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정신이 풀린 겁니까, 티르.”
“교관님이 먼저 웃고 계셨으니까요.”
나우사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생겼다. 그러고 보면 늘 무표정으로 다니면서도 난감할 때마다 짓는 저 표정도 은근히 귀여운 편이었다.
“제가 방금 웃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나우사의 약간 성난 듯 말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사실 장난질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티르였기에 바로 웃음을 거두었다.
그런데 나우사는 여전히 날이 선 표정을 한 채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수 있을 듯한 자세.
‘다짜고짜 훈련 재개인가.’
어쨌거나 훈련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티르 역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그때 문득 뒤에서 거친 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우사가 노려보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어깨 너머임 깨달은 티르였다. 검을 뽑으며 황급히 돌아섰다.
십여 브람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펼쳐져 있는 수풀이 흔들렸다.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이다. 사냥꾼의 감각으로 느끼건대 크고 묵직한 것이 달려오고 있는 것일 터.
하나 산짐승이라 하기엔 땅울림의 크기가 점점 커진다. 몬스터? 아마 트롤이나 덜 큰 오거 정도라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훈련소 근처에 그런 중형급 몬스터가 있던가. 아니, 애초에 그런 몬스터 따위라면 나우사가 경계할 리도 없을 터였다.
생각하는 사이 수풀 저편으로 달려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거친 동작으로 순식간에 몇 브람씩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더 거세게 잡는 순간 실루엣이 수풀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와 동시에 티르도 마주 돌격하려 했으나 순간 나우사가 팔을 뻗어 급히 제지시켰다.
이유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실루엣은 검술 훈련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쓰러져서 나뒹굴었는데 훈련소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저 덩치는 티르로서도 아주 익숙했다.
“딜크?!”
아니나 다를까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거구는 정말 딜크였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제복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심지어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티르가 급히 다가가며 물었다. 딜크는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디, 딜크 도망쳤다. 무, 무섭다.”
“뭐라고?”
“주, 주인님의 주인님들이…….”
딜크가 주인님의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한 부류밖에 없다.
검은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들.
그런데 그들을 왜 여기서 찾는단 말인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주변을 살피고 온 나우사가 딜크의 앞으로 다가섰다.
“딜크, 유니케 소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사, 사부님은…….”
사부님은 딜크가 유니케를 부르는 칭호였다.
딜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특훈을 하면서 딜크에게 그렇게 부르게 시킨 것이었다.
하여 평소에도 유니케를 잘 따르게 된 딜크였다.
그런데 그런 유니케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이렇게 겁에 질리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딜크! 진정하고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 피는 누구 겁니까? 소장님이 흘린 겁니까?”
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들.
그리고 유니케의 피.
필연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곳을 공격했고 유니케는 그들과 대적하게 됐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징후를 눈치 못 챈 걸 보면 결계를 펼친 모양이다.
그 말은 단단히 준비를 했단 뜻이기도 할 터. 정황을 갖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외에 달리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티르는 말을 아끼며 나우사의 명령을 기다렸다.
“일단 에밀리와 하스크와 합류해서 지금 바로 훈련소로 돌아갑니다.”
“유니케 소장님은?”
“물러 보여도 쉽게 당할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버티실 겁니다. 지금 걱정할 건 소장님이 아니라 훈련생들입니다.”
다급히 말하곤 나우사는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삐이익―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에밀리가 하스크를 데리고 나타났다.
“오늘은 벌써 끝난…… 아!”
천진하게 묻던 에밀리가 피투성이의 딜크를 보곤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스크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금 바로 훈련소로 돌아갑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오라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나우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본격적으로 오라를 내뿜었다. 순간 아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흰빛이 퍼지면서 사방이 밝아졌다.
나우사가 훈련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하스크, 에밀리가 뒤를 따랐다.
티르도 가장 후미에서 딜크를 부축하며 나우사를 따라가다 문득 뒤로 돌아보았다.
숲 속의 어둠 저편에 그들이 있을 터였다. 세피아를 훔쳐 간 그 빌어먹을 놈들이! 그런 생각이 들자 티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기다려라. 반드시 붙잡아서 세피아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토하게 해 줄 테니까.’
굳게 결심하는 티르였다. 하나 어둠이 유독 깊어 보이는 건 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