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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티르 1권 (23화)
제9화. 특별 훈련 (3)


“그러한 생존 과정에 있어 일종의 진화로 익히게 된 것이 바로 오라입니다. 일설에는 거인 종족이 피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어 내는 주술에서 나왔다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시대는 인간에게 있어선 시련의 시대였고 검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소중한 것을 지켜 내기 위해 스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오라라는 방식으로…….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해 주는 건지 알겠습니까, 티르?”
나우사의 갑작스런 질문에 티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추측하여 입을 열었다.
“그들처럼 나도 스스로 진화하란 건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정확히는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걸 말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라는 누가 가르쳐 준다거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했듯 의지와 열망이 중요한 거니까요. 어떤 기사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안 되고 반대로 어떤 떠돌이 용병이나 검사들이 간혹 오라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티르, 당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신에겐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열망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오라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당신이 나태해서인 겁니다.”
나우사의 말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나우사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도움닫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오라의 유래에 대해 듣고 보니 자신도 오라를 다룰 수 있게 되리란 믿음이 생겼다. 사실 잠시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은근히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자신은 할 수 있다. 오라를 익힐 것이고 누구보다 강해져서 세피아를 구할 것이다.
“그럼 훈…….”
의욕에 가득 차서 티르가 소리치려는데 그때 나우사가 뭔가를 느낀 건기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티르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했다.
하지만 나우사가 응시하고 있는 수풀 속에서 티르는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나우사가 수풀 한편을 응시하고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그만 나오십시오. 알고 있으니까.”
설마 적인가 싶어서 약간 긴장하는 찰나 수풀이 흔들리더니 한 사람이 나왔다.
“에밀리?”
뜻밖에 그 사람은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들킨 것이 무안한지 쭈뼛거리며 나우사의 앞으로 걸어왔다.
“왜 엿보고 있던 겁니까?”
나우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떠보는 게 아니라 대답 여하에 따라선 정말로 죽일 수도 있다는 그런 차가운 살벌함이었다.
에밀리는 나우사의 살기에 잠시 움찔했으나 용기를 낸 건지 소리쳐 말했다.
“티르가 혼자 보충 훈련을 하는데 저만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온 거였는데……. 절대 말을 엿듣거나 그런 이유로 온 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에밀리…….’
에밀리의 진심 어린 말에 티르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딜크뿐 아니라 자신을 생각해 주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니.
솔직히 말해서 에밀리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긴 해도 이 정도로까지 생각해 주고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우사의 입장에선 또 다른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우사에게 에밀리는 단지 특훈의 도중에 끼어든 불청객일 뿐일 것이다.
나우사는 잠시 에밀리를 쳐다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상대를 불문하고 이제부턴 엿보는 자가 있다면 죽일 거니까.”
나우사의 살기 어린 말에 에밀리는 움찔 떨었지만 물러서기는커녕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저도 티르와 함께 보충 훈련을 하게 해 주세요! 분명 함께하면 티르도 힘을 내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교관님!”
에밀리가 간절히 소리쳤다.
녹색 눈동자에도 간절한 빛이 가득 차 있었지만 반면 나우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말리진 않을 테니 티르의 특훈이 끝날 때까지 달리기나 하고 있던가요.”
“예? 예!”
에밀리는 나우사를 보다가 뒤늦게 대답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련장 바깥의 숲으로 가더니 정말로 달리기 시작했다.
것도 전력질주를 하는 건지 나무 기둥 사이로 에밀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티르는 그런 에밀리의 모습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하란다고 정말로 하다니.
누가 들어도 방금 전 나우사의 말은 허튼짓 말고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한데 녀석은 그걸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다.
‘둔한 녀석.’
티르는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문득 나우사가 입을 열었다.
“하프 엘프군요.”
뜻밖의 말에 티르는 나우사를 쳐다봤다.
하프 엘프가 맞긴 하지만 귀가 뾰족하지도 않고 단순히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 외엔 특별히 두드러지는 점도 없는데 그걸 알아차리다니.
“엘프에겐 특유의 기척이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에 제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도 제가 엘프의 걸음을 나름 연구해서 개량한 덕분이죠. 저 아인 미숙하긴 해도 본능적으로 엘프의 걸음걸이를 가졌더군요. 아까 수풀 속에서 나올 때.”
‘엘프의 걸음…… 그런 게 있었군.’
처음 듣는 말이지만 납득할 순 있었다. 기척에 민감한 자신이 나우사의 기척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느낀 적이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아까 달리기를 하라고 시킨 게 빈말이 아니라 나름의 훈련일 수도 있단 말이다.
“하프 엘프에게 통상의 훈련을 해 봤자 도태되기만 하겠죠. 가장 필요한 건 극한까지 가 보는…….”
“으아아악―”
나우사가 나직이 설명을 덧붙이는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괴성에 말이 묻혀 버렸다. 먼 곳에서 들리긴 했지만 틀림없이 딜크의 목소리였다.
‘뭐지? 대체 무슨 훈련을 하고 있기에 저런 비명이 나오는 거야?’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는데 그때 빛이 번쩍하더니 스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나우사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으니 우리도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죠.”
끄덕.
처음부터 진검으로 한다는 게 뜻밖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이 강해지기 위한 길이라면.
티르는 나우사의 앞에 마주 서며 검을 뽑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훈련의 시작이었다.



제10화. 습격 (1)


채채채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튄다.
오 개월 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공방,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우사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곤 해도 불과 오 개월 만에 이 정도로 검을 받아 낼 수 있게 된 건 기적이라 할 만했다.
단지 받아 내는 것만도 아니었다. 순간 은빛 섬광이 나우사의 얼굴을 향해 뻗어 나갔다.
나우사가 고개를 젖히며 피한 탓에 머리카락 몇 올만 잘랐을 뿐이지만 이 일격으로 싸움의 승기는 티르에게 넘어왔다.
그대로 다시 일 검을 내지른다면 아무리 나우사라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지면을 내딛자마자 티르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목에 서늘한 감촉이 드리운다. 고개를 들어 보면 나우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한계입니까?”
티르는 어금니를 악 물며 일어섰으나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나우사는 그런 티르를 무심히 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티르의 다리를 잡았다.
한 손으론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론 정강이와 허벅지 근육을 주물러 주었다.
상당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티르는 신음을 삼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 훈련에 지장이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우사에게 이런 도움을 받는 자신이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고작 한 시간이라니.’
그간의 실전 덕분에 본능적으로 근력을 강화하고 반사 신경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된 티르였다.
하나 이 능력엔 대가가 컸다. 사용하는 만큼 몸에 부담을 가한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한 시간 정도를 버틸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어차피 시한부 능력이란 점엔 변함이 없다.
이대로 정체될 순 없었다. 오라만 쓸 수 있다면! 오라를 통해 독을 방출해 낼 수만 있다면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젠장!”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우사는 잠시 쳐다보다가 마사지만 계속해 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마사지가 끝난 후에야 나우사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검술 실력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다만 능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너무 높군요. 실전에서 이렇게 쓰러졌다간 바로 끝입니다.”
그런 것은 자신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어쩌란 말인가?
오라만 쓸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그게 안 되는데!
그런데 자신 보고 어쩌란 말인가.
소리치고 싶었다.
하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도저히 입 밖으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야 마치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그저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뿐.
나우사의 시선이 그런 티르의 주먹에 머물렀다.
은연중에 티르의 심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나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로 세상엔 절박함이나 간절함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티르는 고개를 들어 나우사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설마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은 불가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눈빛과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항의가 가득 실린다.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절박함과 강한 의지야말로 오라의 근원이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릴?! 소리치려는 찰나 나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당신의 절박함은 오라를 발현하는 데 충분한 정도입니다. 또 제가 보장하는데 검에 대한 감도 그 정도면 초보적인 오라는 발현할 수 있는 수준은 될 겁니다.”
“그런데 왜 아직 오라를 쓸 수 없는 겁니까? 발현은커녕 감도 오질 않는다고요!”
나우사의 자극에 결국 가슴에 쌓아 두었던 불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반면 나우사는 여전히 담담히 말했다.
“당신에겐 다른 탈출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절박함을 오라가 아니라 독 능력을 통해 발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다른 탈출구라는 말에 반박하려다가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진 티르였다.
자신이 방금 나우사의 지적을 당당히 부정할 수 있을까? 자신은 온전히 오라에만 모든 것을 걸고 나우사의 검을 받아 냈었나?
“오라에 대한 기원은 전에도 말해 줬을 겁니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염원을 오라로 발출해 낼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우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티르 당신에겐 그 독 능력이 오히려 해가 되는군요. 물론 덕분에 검술에 대한 이해도와 실전 감각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감각이 오라 발현의 밑바탕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해서 지금까진 능력을 용인했습니다만.”
티르는 고개를 들어 나우사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