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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1.
오후의 겨울 햇살에 눈이 부셨다.
시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한남동으로 간 이경은 동네 초입에 위치한 과일가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거의 2주 만의 방문이었다. 이것저것 단내가 풍기는 과일을 골라 담아 바구니를 채우고 천천히 낮은 언덕을 걸어 올랐다. 묵직한 무게에 한쪽으로 치우쳐진 어깨.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은 안쓰러울 정도로 가늘다.
대부분의 집들이 높은 담장에 가려져 있었지만 비죽 솟은 정원수들은 아름다웠고 골목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분명 같은 서울이었지만 자신이 사는 동네와는 전혀 다른 세상. 벌써 몇 년째였지만 여전히 이곳에 올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유독 담벼락이 높은 집 앞에서 멈추었다. 입술을 열자 버릇처럼 한숨이 절로 흘렀다.
벨을 누르자 이내 대문이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동시에 무전기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좀처럼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철제 대문으로 들어서면 경비실로 쓰고 있는 작은 건물이 서 있다. 그곳엔 여러 명의 건장한 남자가 24시간 돌아가며 머물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했고, 누구 하나 제외할 것 없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늘 그런 곳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자 집안일을 돕고 있는 경산댁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사모님이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무슨 일인지 표정이 썩 좋지 않으세요.”
언제부터인가 경산댁은 이경을 살갑게 챙겨 주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 아마도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을 것이다.
“이거. 아주머니 좋아하는 키위를 일부러 많이 넣었어요.”
“에구, 사모님께 또 한 소리 듣겠네.”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며 경산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이 무엇을 하든 꾸중을 들을 거라는 걸 알지만 괜히 자신 때문에 더 혼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뭐해? 회장님 기다리신다.”
이경의 인기척을 듣고 나온 황 여사는 다소 화가 난 표정이었다. 뭔가 제대로 심사가 뒤틀린 것이 틀림없다. 평소에도 곱지 않았던 시선이 오늘따라 유독 냉랭했다.
“어휴, 과일 고르는 눈썰미하고는……. 이거 손님상에 내지 말고 아줌마나 가져다 먹어요.”
서재로 들어가는 이경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황 여사의 가시 돋친 투덜거림에 이경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멈춰지지는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이런 반응을 과일을 고르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꽃을 사면 사는 대로, 다른 뭔가를 사면 사는 대로 황 여사는 늘 그걸 트집 삼아 투덜거리곤 했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오는 날이면 가정교육을 탓하며 부모를 들먹이는 바람에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준비해야만 했다.
조용히 문을 닫고 서재로 들어서자 서 회장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알은체를 한다.
“앉아라.”
일흔이 넘은 서 회장은 평판이 좋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과는 달리 그의 인상이나 눈빛은 너그럽기 그지없었고, 덕분에 그를 처음 보거나 그의 성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호인이라 불렀다. 하긴. 생김새만 놓고 봤을 때 서 회장은 선인처럼 보였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경은 언제부터인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웠다. 천하의 서 회장이 호인이라니. 원래 어려서부터 모진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독종인 사람이다. 자수성가로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의 부와 권력을 누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일 것은 분명하다. 하늘이 도운 천운을 가지고 태어났든가, 다른 누군가의 저주를 밥 먹듯 아무렇지 않게 들으며 살아왔든가.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서 회장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천하의 여걸로 소문난 황 여사도 그런 서 회장에겐 꼼짝을 하지 못했고, 소문난 망나니 아들 태훈도 그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아버지의 말이 법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몸소 깨닫고 자랐던 터라 서 회장이 눈썹만 꿈틀거려도 어지간한 일은 백기를 들고 마는 태훈이었다.
“부르셨다고요.”
이경의 담담한 목소리에 난을 치고 있던 서 회장은 붓을 내려놓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다오.”
“네.”
이경의 차분한 목소리에 서 회장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요즘 태훈이와 통 만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마침내 난 치는 일을 마치고 이경이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상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눈빛은 날카로웠다.
“정리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요즘 시간이 없었습니다.”
“졸업이 며칠 안 남았다지?”
“……네.”
“얘기는 들었다. 4년 내내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
“이제 슬슬 우리 빚을 청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기억은 하고 있지?”
서 회장의 질문에 이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지난 4년을 기다려 준 것으로 그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서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얼마 있으면 제 며느리가 될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집을 드나드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을 가녀린 체구의 이경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었다. 제 아비 일로 겁도 없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도 없애지 못한 아이.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이경의 맹랑함에 서 회장은 감탄했다. 보통의 사내놈들도 제 앞에선 기를 펴지 못하건만 고작 열일곱의 어린 계집은 당당했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언젠가는 제 손으로 다 갚을 테니 우리 가족……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어찌 그 말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맹랑한 계집이 건네는 경고에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고 말았던 그는 점점 이경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 그 영민함도, 남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도도함도, 제 가족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도, 자신의 약해 빠진 아들 태훈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아이였다.
처음에 이경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밤잠을 아르바이트와 맞바꾸면서까지 기일이 되면 꼬박꼬박 약속한 돈을 들고 그를 찾아왔을 때 서 회장은 이경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아이지만 나약한 아들의 짝으로 괜찮겠다 싶었다. 한량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영 못마땅했던 그는 이경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그 생각을 굳혔다.
동생의 엄청난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경을 애잔한 눈으로 보고 있던 서 회장은 졸업이란 말에 떠오른 상념들을 천천히 털어 내었다.
“가져가라.”
책상 아래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어 이경 앞으로 쓰윽 밀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당분간 생활비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번엔 거절하지 말고 가져가.”
“아닙니다. 이미 충분한 도움 주셨습니다.”
단호한 거절의 말에 서 회장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경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또한 만만찮은 고집을 지닌 터라 계속 이경의 뜻을 받아 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버티면서도 일체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던 이경 때문에 몇 번 언짢은 적도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만큼은 절대 간섭을 하지 말아 달라던 요구에 선뜻 응해 줬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허, 웬 고집이 그리 세. 어른 손부끄럽지 않게 어서 받아라.”
“…….”
“졸업이 이제 코앞이다. 이제 우리 집 사람이니 격식에 맞는 옷이라도 해 입어. 이건 예비 시아버지로서 주는 용돈이다.”
이경은 억지로 떠안다시피 받아 든 봉투를 노려보았다. 억지 인사라도 건네야 할 텐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졸업하는 대로 약혼식 날 잡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결혼식 치르면 좋겠다만 이 사람도 그렇고 태훈이도 그렇고 격식은 갖추고 싶어 하더구나. 또 일을 배우는 동안은 그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고.”
“…….”
“조만간 회사에 자리 마련하마. 태훈이 가까이로 마련할 테니 그리 알아.”
서 회장이 이것저것 말을 하는 동안에도 이경은 침묵을 지켰다. 반색할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선뜻 수긍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못마땅한 듯 서 회장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어졌다.
“……이경아.”
“네.”
“아직도 네 아비 빚 때문에 팔려 온다고 생각하느냐?”
직설적인 물음에 고개를 든 이경의 눈빛이 방 안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맹랑한 것. 거짓말이라도 좀 할 줄 알면 좋으련만……. 쯧쯧, 혀가 저절로 차졌다.
“태훈이 내 자식이지만 생각보다 나약한 놈일 게다. 적당히 눈 감아 줄 테니 네 손으로 휘어잡아.”
“!”
“제대로 사람 구실 하게만 만들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 주마. 돈이든 하고 싶은 것이든 전부 다.”
찻잔을 집어 들어 입에 가져다 대던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난을 치는 사이 식어 버린 찻물이 쌉싸래하다.
“저를 놓아 달라면, 놓아주실 겁니까?”
이경의 대답에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멈칫거렸다. 당돌한 것. 서 회장이 또다시 끌끌 혀를 찼다.
“약속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버텨내 보겠습니다.”
“허, 참.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구나. 가 보거라. 중요한 손님이 와 있어 오늘은 이만 끝내야겠다.”
끝끝내 서 회장의 입에선 어떤 약속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육중한 대문을 빠져나온 이경은 어지러움에 잠시 담벼락에 기대었다. 철옹성 같은 집을 벗어나니 참고 있던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 집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늘 역겨운 돈의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 같기도 하고 늙은 생선의 냄새 같기도 한 비린내. 그 냄새는 집을 빠져나온 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구역질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크게 숨을 쉬는데 손에 들린 핸드백의 지퍼 사이로 서 회장에게서 받아 든 봉투 끝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들어 있을까. 그 액수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가끔씩 불려가 이렇듯 봉투를 받았었다. 싫다는데도 억지로 쥐어 주는 일이 반복되었고 서 회장에게 갚아야 할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잔인한 노인네. 이경의 입술이 한껏 비틀렸다. 몇 달 내내 밤잠을 쪼개 가며 일을 해도 만져 보기 힘든 큰돈을 선뜻 내줄 때마다 이경은 점점 숨이 막혔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죄어 오는 올가미에 걸린 기분. 조금씩 죄어 오던 올가미는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 있었고 어느 순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그 간당간당한 숨이 탁 끊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실제로 여러 번 하기도 했었다.
골목을 벗어나 제법 멀리 있는 정류장까지 걸어간 이경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오고가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다. 버스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코끝이 시리다. 장갑을 꺼낼 생각에 가방을 열던 이경은 장갑이 아닌 봉투를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백만 원권 수표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오늘도 이만큼의 빚이 늘어났구나.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빚.
“…….”
순간의 기분을 참지 못하고 수표를 갈가리 찢어 버릴 기세로 쥐어 잡던 이경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바들거렸다. 차마 찢어 버리지 못하는 수표가 점점 나약해지는 자신의 마음 같아 이경은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바보. 혼자 잘난 척은 다하고 똑똑한 척은 다한 주제에 결국 끝이 여기잖아. 제아무리 고고한 척 굴어도 결국 네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남자에게 너를 던져야 하는 주제가 바로 너잖아. 뭐? 쓰레기? 넌…… 그보다도 못한 존재였어.
차라리 죽어 버릴까. 수십 번도 더 했던 끔찍한 생각이 또다시 떠올랐다. 차라리 죽어 버리면 이 악몽도 다 끝날 것이다. 더 견디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었다가도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이내 이경의 표정은 약해졌다. 자신이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까. 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을 어찌하나. 내 목숨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비굴한 삶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서글펐다.
밑바닥 인생답게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것은 어쩌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1.
오후의 겨울 햇살에 눈이 부셨다.
시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한남동으로 간 이경은 동네 초입에 위치한 과일가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거의 2주 만의 방문이었다. 이것저것 단내가 풍기는 과일을 골라 담아 바구니를 채우고 천천히 낮은 언덕을 걸어 올랐다. 묵직한 무게에 한쪽으로 치우쳐진 어깨.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은 안쓰러울 정도로 가늘다.
대부분의 집들이 높은 담장에 가려져 있었지만 비죽 솟은 정원수들은 아름다웠고 골목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분명 같은 서울이었지만 자신이 사는 동네와는 전혀 다른 세상. 벌써 몇 년째였지만 여전히 이곳에 올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유독 담벼락이 높은 집 앞에서 멈추었다. 입술을 열자 버릇처럼 한숨이 절로 흘렀다.
벨을 누르자 이내 대문이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동시에 무전기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좀처럼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철제 대문으로 들어서면 경비실로 쓰고 있는 작은 건물이 서 있다. 그곳엔 여러 명의 건장한 남자가 24시간 돌아가며 머물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했고, 누구 하나 제외할 것 없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늘 그런 곳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자 집안일을 돕고 있는 경산댁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사모님이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무슨 일인지 표정이 썩 좋지 않으세요.”
언제부터인가 경산댁은 이경을 살갑게 챙겨 주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 아마도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을 것이다.
“이거. 아주머니 좋아하는 키위를 일부러 많이 넣었어요.”
“에구, 사모님께 또 한 소리 듣겠네.”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며 경산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이 무엇을 하든 꾸중을 들을 거라는 걸 알지만 괜히 자신 때문에 더 혼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뭐해? 회장님 기다리신다.”
이경의 인기척을 듣고 나온 황 여사는 다소 화가 난 표정이었다. 뭔가 제대로 심사가 뒤틀린 것이 틀림없다. 평소에도 곱지 않았던 시선이 오늘따라 유독 냉랭했다.
“어휴, 과일 고르는 눈썰미하고는……. 이거 손님상에 내지 말고 아줌마나 가져다 먹어요.”
서재로 들어가는 이경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황 여사의 가시 돋친 투덜거림에 이경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멈춰지지는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이런 반응을 과일을 고르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꽃을 사면 사는 대로, 다른 뭔가를 사면 사는 대로 황 여사는 늘 그걸 트집 삼아 투덜거리곤 했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오는 날이면 가정교육을 탓하며 부모를 들먹이는 바람에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준비해야만 했다.
조용히 문을 닫고 서재로 들어서자 서 회장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알은체를 한다.
“앉아라.”
일흔이 넘은 서 회장은 평판이 좋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과는 달리 그의 인상이나 눈빛은 너그럽기 그지없었고, 덕분에 그를 처음 보거나 그의 성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호인이라 불렀다. 하긴. 생김새만 놓고 봤을 때 서 회장은 선인처럼 보였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경은 언제부터인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웠다. 천하의 서 회장이 호인이라니. 원래 어려서부터 모진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독종인 사람이다. 자수성가로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의 부와 권력을 누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일 것은 분명하다. 하늘이 도운 천운을 가지고 태어났든가, 다른 누군가의 저주를 밥 먹듯 아무렇지 않게 들으며 살아왔든가.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서 회장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천하의 여걸로 소문난 황 여사도 그런 서 회장에겐 꼼짝을 하지 못했고, 소문난 망나니 아들 태훈도 그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아버지의 말이 법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몸소 깨닫고 자랐던 터라 서 회장이 눈썹만 꿈틀거려도 어지간한 일은 백기를 들고 마는 태훈이었다.
“부르셨다고요.”
이경의 담담한 목소리에 난을 치고 있던 서 회장은 붓을 내려놓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다오.”
“네.”
이경의 차분한 목소리에 서 회장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요즘 태훈이와 통 만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마침내 난 치는 일을 마치고 이경이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상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눈빛은 날카로웠다.
“정리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요즘 시간이 없었습니다.”
“졸업이 며칠 안 남았다지?”
“……네.”
“얘기는 들었다. 4년 내내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
“이제 슬슬 우리 빚을 청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기억은 하고 있지?”
서 회장의 질문에 이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지난 4년을 기다려 준 것으로 그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서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얼마 있으면 제 며느리가 될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집을 드나드는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을 가녀린 체구의 이경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었다. 제 아비 일로 겁도 없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도 없애지 못한 아이.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이경의 맹랑함에 서 회장은 감탄했다. 보통의 사내놈들도 제 앞에선 기를 펴지 못하건만 고작 열일곱의 어린 계집은 당당했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언젠가는 제 손으로 다 갚을 테니 우리 가족……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어찌 그 말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맹랑한 계집이 건네는 경고에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고 말았던 그는 점점 이경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 그 영민함도, 남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도도함도, 제 가족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도, 자신의 약해 빠진 아들 태훈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아이였다.
처음에 이경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밤잠을 아르바이트와 맞바꾸면서까지 기일이 되면 꼬박꼬박 약속한 돈을 들고 그를 찾아왔을 때 서 회장은 이경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아이지만 나약한 아들의 짝으로 괜찮겠다 싶었다. 한량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영 못마땅했던 그는 이경이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그 생각을 굳혔다.
동생의 엄청난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경을 애잔한 눈으로 보고 있던 서 회장은 졸업이란 말에 떠오른 상념들을 천천히 털어 내었다.
“가져가라.”
책상 아래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어 이경 앞으로 쓰윽 밀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당분간 생활비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번엔 거절하지 말고 가져가.”
“아닙니다. 이미 충분한 도움 주셨습니다.”
단호한 거절의 말에 서 회장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경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또한 만만찮은 고집을 지닌 터라 계속 이경의 뜻을 받아 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버티면서도 일체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던 이경 때문에 몇 번 언짢은 적도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만큼은 절대 간섭을 하지 말아 달라던 요구에 선뜻 응해 줬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허, 웬 고집이 그리 세. 어른 손부끄럽지 않게 어서 받아라.”
“…….”
“졸업이 이제 코앞이다. 이제 우리 집 사람이니 격식에 맞는 옷이라도 해 입어. 이건 예비 시아버지로서 주는 용돈이다.”
이경은 억지로 떠안다시피 받아 든 봉투를 노려보았다. 억지 인사라도 건네야 할 텐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졸업하는 대로 약혼식 날 잡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결혼식 치르면 좋겠다만 이 사람도 그렇고 태훈이도 그렇고 격식은 갖추고 싶어 하더구나. 또 일을 배우는 동안은 그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고.”
“…….”
“조만간 회사에 자리 마련하마. 태훈이 가까이로 마련할 테니 그리 알아.”
서 회장이 이것저것 말을 하는 동안에도 이경은 침묵을 지켰다. 반색할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선뜻 수긍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못마땅한 듯 서 회장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어졌다.
“……이경아.”
“네.”
“아직도 네 아비 빚 때문에 팔려 온다고 생각하느냐?”
직설적인 물음에 고개를 든 이경의 눈빛이 방 안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맹랑한 것. 거짓말이라도 좀 할 줄 알면 좋으련만……. 쯧쯧, 혀가 저절로 차졌다.
“태훈이 내 자식이지만 생각보다 나약한 놈일 게다. 적당히 눈 감아 줄 테니 네 손으로 휘어잡아.”
“!”
“제대로 사람 구실 하게만 만들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 주마. 돈이든 하고 싶은 것이든 전부 다.”
찻잔을 집어 들어 입에 가져다 대던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난을 치는 사이 식어 버린 찻물이 쌉싸래하다.
“저를 놓아 달라면, 놓아주실 겁니까?”
이경의 대답에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이 멈칫거렸다. 당돌한 것. 서 회장이 또다시 끌끌 혀를 찼다.
“약속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버텨내 보겠습니다.”
“허, 참.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구나. 가 보거라. 중요한 손님이 와 있어 오늘은 이만 끝내야겠다.”
끝끝내 서 회장의 입에선 어떤 약속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육중한 대문을 빠져나온 이경은 어지러움에 잠시 담벼락에 기대었다. 철옹성 같은 집을 벗어나니 참고 있던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 집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늘 역겨운 돈의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 같기도 하고 늙은 생선의 냄새 같기도 한 비린내. 그 냄새는 집을 빠져나온 후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구역질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크게 숨을 쉬는데 손에 들린 핸드백의 지퍼 사이로 서 회장에게서 받아 든 봉투 끝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들어 있을까. 그 액수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가끔씩 불려가 이렇듯 봉투를 받았었다. 싫다는데도 억지로 쥐어 주는 일이 반복되었고 서 회장에게 갚아야 할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잔인한 노인네. 이경의 입술이 한껏 비틀렸다. 몇 달 내내 밤잠을 쪼개 가며 일을 해도 만져 보기 힘든 큰돈을 선뜻 내줄 때마다 이경은 점점 숨이 막혔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죄어 오는 올가미에 걸린 기분. 조금씩 죄어 오던 올가미는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 있었고 어느 순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그 간당간당한 숨이 탁 끊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실제로 여러 번 하기도 했었다.
골목을 벗어나 제법 멀리 있는 정류장까지 걸어간 이경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오고가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다. 버스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코끝이 시리다. 장갑을 꺼낼 생각에 가방을 열던 이경은 장갑이 아닌 봉투를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백만 원권 수표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오늘도 이만큼의 빚이 늘어났구나.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빚.
“…….”
순간의 기분을 참지 못하고 수표를 갈가리 찢어 버릴 기세로 쥐어 잡던 이경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바들거렸다. 차마 찢어 버리지 못하는 수표가 점점 나약해지는 자신의 마음 같아 이경은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바보. 혼자 잘난 척은 다하고 똑똑한 척은 다한 주제에 결국 끝이 여기잖아. 제아무리 고고한 척 굴어도 결국 네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남자에게 너를 던져야 하는 주제가 바로 너잖아. 뭐? 쓰레기? 넌…… 그보다도 못한 존재였어.
차라리 죽어 버릴까. 수십 번도 더 했던 끔찍한 생각이 또다시 떠올랐다. 차라리 죽어 버리면 이 악몽도 다 끝날 것이다. 더 견디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었다가도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이내 이경의 표정은 약해졌다. 자신이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까. 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을 어찌하나. 내 목숨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비굴한 삶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서글펐다.
밑바닥 인생답게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것은 어쩌면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